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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포진(金浦 德浦鎭)가 포대 - 병인양요(2018년 2월 17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덕포진(金浦 德浦鎭)가 포대 - 병인양요(2018년 2월 17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2. 19. 18:23


김포 대명항 끝 개펄에는 함상공원이 있고 해안길은 평화누리길이다,

평화누리길은 이곳 대명항에서 시작하여 연천 신탄리역까지 장장 192km의 DMZ 철책길이다,

이곳 대명항에서 시작하는 평화누리길 1코스는

저 아치형 출입구를 지나서 문수산성 남문까지로, 평화누리길은 총 12개 코스로 나누어저 있다,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과

대명항에서 출발해서 다시 대명항으로 돌아오는 6km의 순환코스도 있다고 알려준다,

철책길을 들어가면서 보이는 염하강,

그리고 최전방 DMZ 철책길이 시작된다,



길은 덕포진으로 이어지고 보이는 포대는 덕포진 가 포대다,

가, 포대를 바라보며 앉는 의자가 익살스럽다,

의자가 있는 그 옆에는 평화누리길 마크가 새겨진 탁자도 있다,

김포 덕포진(金浦 德浦鎭)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에 있는 조선시대 진영이다.

1948년 9월 25일 대한민국 사적 제292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진영으로, 이곳은 서울로 통하는

바닷길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대 였던 곳이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현종 7년(1666)에 강화에 포함되었다.

높직한 평지에 세운 포대인 돈대와 대포를 쏘는 포대, 그리고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는 파수청이 있다.

돈대는 중요한 전략지에 있어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싸웠다. 1980년에 행한 발굴조사 결과

7개의 포탄과 2개의 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고 주춧돌과 화덕자리를 발견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는1866년 고종 3년에 흥선대군의 병인박해인 천주교 탄압을 구실삼은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적인 전쟁이다. 로즈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이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침략의 빌미를 제공한 병인박해의 시작은 철종(재위: 1849년~1863년)조에는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든때라, 조선 조정은 천주교에 대해 관대했다. 이 틈을 타 베르뇌 주교, 리델 신부, (1861년 입국)등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많이 들어와 선교를 함으로 1861년 (철종 12년)에는 천주교인의 수가 1만 8천명, 1865년(고종 2년)에는 2만3천 명에 이르게 된다.

한편 1864년 (고종 1년) 러시아인들이 함경도 경흥부에 방문해 조선정부에 통상을 요구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요구에 조선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도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당시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방문 중이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조선 정부가 프랑스, 영국과의 동맹을 체결한다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측의 통상요구 시일이 지나면서 조선 정부는 안심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이 제안했던 삼국 동맹도 무산되게된다.

또한 동맹 제안에 대해 무책임한 주선으로 간주하며 선교사들을 지탄하였다.

그러던 차에 흥선대원군의 처소인 운현궁에 천주교도들이 드나든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대왕대비

조씨와 정부 관료들이 천주교도들의 행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단행한다

1866년(고종 3년) 정월에 전국에 천주교 탄압령이 내려지면서 대대적인 피바람이 불게 되었다.

남종삼, 정의배(丁義培) 등 조선의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었고, 당시 조선에 머무르고 있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된다.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3명 중 하나였던 리델 신부는 1866년 5월 8일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7월 6일

청의 주푸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리델이 도착했을 때 프랑스 극동함대(極東艦隊)사령관 로즈 제독은 톈진에 있었다. 리델은 톈진으로

직행하여 조선에서 발생한 프랑스 신부들의 처형소식을 전하고 생존해 있는 다른 신부 두 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

함대를 출항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주력함대가 돌아오는 대로

조선 원정을 단행할 것을 약속했다.

1866년 10월 19일(음력 9월 11일) 로즈제독이 인솔하는 프랑스 군함 3척이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지금의 인천 앞바다에 다다랐다. 특히 리델 신부는 프랑스 군함이 조선 연안에 출현하면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이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 순무영에서 프랑스 함대에 격문을

보내니 회답 격문이 왔다. 그에 따르면 선교사가 죄없이 죽었으므로 왔다고 주장하면서, 죽은 프랑스 천주교회 선교사

9명에 갈음하여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일주일후 프랑스군은 1866년 10월 26일(음력 9월 18일)지금의 강서구 마곡철교 하단부를 통과하여

한성부(서울)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에 진출했다. 이로 인해 서울 도성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이에 조선 정부는 급히 어영대장 이용희를 파견하여 한강연안 경비를 강화한다. 프랑스 함대에는 3척의 소(小)함대로는 도성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11월 2일(음력 9월 25일)에 청나라로 물러났다.

그해 11월 17일(음력 10월 11일) 로즈 제독은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일본의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300명을 포함한, 도합 1230여 명 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다시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 근처로 진출해 들어온다, 11월 20일에는 프랑스 함정 4척과 해병대의 일부가 강화도의 갑곶진(甲串鎭) 부근의 고지를

점령한 뒤 한강의 수로를 봉쇄했다. 이어 11월 22일(음력 10월 16일)에는 프랑스군의 전군이 동원되어 강화성을 공략해

점령하고 여러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이경하(李景夏)·이기조(李基祖)·이용희·이원희(李元熙) 등의 장수들을 급히 양회진과

통진(通津)·광성진(廣城津)·부평(富平)·제물포등의 여러 요소와,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지에 파견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면서 11월 25일(음력 10월 19일)에는 프랑스 측에 공문을 보내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로즈 제독은 조선의 선교사 처형 등의 천주교 탄압행위를 비난하면서 전권대신의 파견을 요구했다.

12월 2일(음력 10월 26일)에는 120여 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다가 매복 중이던 한성근(韓聖根)등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12월 13일(음력 11월 7일)프랑스군은 다시 교동부(喬桐府)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포격하고,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160여 명의 프랑스 해병이 정족산성 공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매복 중이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 및 사격에 능한 500여 명의 조선군 포수들의 공격을 받아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로즈 제독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과 더 이상의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했다.

12월 17일(음력 11월 11일)프랑스 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官衙)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금은괴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갑곶진을 거쳐 청나라로 철군했다. 다만 프랑스군 기록에선

병인양요 전체 기간 중 프랑스군의 피해는 3명의 전사자와 35명의 부상자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