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덕포진(金浦 德浦鎭)포대 - 신미양요(辛未洋擾)(2018년 2월 17일) 본문
이곳은 덕포진 나 포대다,
덕포진 나 포대에 대한 간략한 안내
포대는 토성(土城) 아래에 이렇게 만들어저 있다, 앞 구멍이 포신이 적에게 불을 토해내든 포구(包口)다,
나 포대를지나 파수청타로 가는길 그때는 어땟는지 알수없지만
지금은 그림처름 아름다운 토성(討城)이다,
토성 넘어로 보이는 염하강
그리고 파수청 터와 손돌묘가 보인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곳이 파수청터다,
파수청은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동시에 포병을 지휘했든 장소로 생각된다. 1980년의 발굴조사
당시 7개의 포탄과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고, 건물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추정되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파수청 터 뒤 언덕에 보이는 묘는 고려 고종때 이곳에 사는 사공이였든 손돌(孫 乭)의 무덤이다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길에 배를 타고 이곳의 바닷길을 건너다가 거센물길에
위험을 느껴자 사공이 임금을 해할려는 흉계를 꾸몄다고 오해 해서 그를 처형했으나,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가자 잘못을
뉘우치고 후일 후하게 장사를 치루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 무덤이다,
지금도 덕포진 손돌묘앞의 좁은 바닷길을 손돌목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 돈대터에서는 1874년(고종 11)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광성보와 맞서있는데, 시야가 막힌데다가 해협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빠르고 소용돌이치므로 적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했을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이곳 덕포진 돈대의 위치는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와 싸웠던 격전지기도했다.
전편에 병인양요에 대하여 긴 설명을 부첫다 내친김에 신미양요에 대한 이야기도 하려한다,
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 6월 1일(고종 3년 음력 4월 14일)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 전쟁이다,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조선의 주요 수로였던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고
조선 측의 거부를 무시하고 탐침을 시도하여 교전이 일어났다, 3일간의 교전결과 조선은 광성보가 함락되고 순무중군
어재연을 비롯한 수비 병력 대다수가 사망했다. 미해군은 20일간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하였으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한다.
신미양요는 1871년 조선과 미국사이에 발생한 군사적 충돌로서, 조선측에서는 이를 신미양요
(신미년 조선과 서양 즉, 미국사이에 발생한 전쟁 또는 소동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반면 미국은 이 사건을 1871년
한국 군사 작전 또는 1871년 미 - 한 전쟁(United States - Korea War of 1871)이라 역사에 기술되여 있다,
조선 시대는 한국의 역사 에서 외국과의 접촉 범위가 가장 좁았던 시대였다. 조선은 사대(事大)와 선린(善隣)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과 일본 등 매우 제한적인 국가들과 외교를 유지했다, 이러한 외교는 중국을 중심에 두는 상하 관계로서
조선은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를 하는 한편 이웃한 일본, 유구(琉球, 류큐), 섬라(暹羅, 태국) 등지의 외교 사절에 대해서는 종주국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으로 대한다. 이때문에 17세기 이후 서양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으나 이들을 대등한 외교의 상대로 여기지는 않았다,
정조시대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여러 차례 박해가 있었다. 1801년 황사영이 베이징 주재
프랑스 주교에게 천주교의 포교를 위해 서양 군함 백 척과 수만 명의 병사를 보내달라고 쓴 편지가 발각되는 이른바 황사영백서
사건이 일어났다.이 사건 이후 조선은 외국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의 열강들은 아시아 각지를 탐험하고 통상을 앞세워 제국주의적인 침탈을 하고 있었다.
19세기 무렵 서양인들은 조선을 북극보다 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여겼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던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터는 조선을 자신이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너무나 깊은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외국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섬나라, 라고 표현하였으며, 중국해안에서 증기선을 타고 하루 안에 닿는 이곳에서, 반 야만적인 정부가 자국 백성의 소원에 반해
출입금지 문구를 써 붙이고 전체 문명세계에 도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은 여러 차례 조선의
통상 개방을 요구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은 아편전쟁의 결과 청나라가 쇠퇴하고 영국 프랑스의 연합군이 베이징에서 방화를 일삼는 가운데
베이징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면서 더욱 해안 방어를 강화하였었어며 1866년 7월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올라와 통상 요구를 핑계로 횡포를 부리다 관민의 손에 불태워지는 제나널 셔먼호 사건이 일어났고, 9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해
정족산성의 외규장각을 약탈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가 서양 열강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판단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비번사를 혁파하고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여 군비를 강화한다,
1866년 말 로버트 슈펠트는 셔먼호 사건 진상 조사와 거문도의 해군 기지 설립 조사를 지시 받고 조선으로 향했다.
슈펠트를 태운 와츄세트호는 병인년 12월 18일(양력 1867년 1월 23일) 황해도 장연 앞 바다에 정박하였는데, 이들은 그곳을
대동강 하구로 오인했다. 슈펠트는 최대한 존대하는 통상을 희망하는 문서를 조선 조정에 보냈으나, 조선은 비록 화목을
구한다고 하나 속 뜻을 알기 어렵다는 이유로 장현 현감에게 슈펠트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지시한다,
1867년 미국은 군함 새넌도어 호 를 보내 다시 한 번 셔먼호의 생존 선원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였고,
조선은 이미 생존 선원이 없다는 답변을 했다. 새넌도어 호는 처음에는 대포를 쏘며 무력시위를 하였으나 조선 역시 새넌도어
호의 종선에 총을 쏘며 완강히 저항하자 별다른 소득없이 철수한다, 1868년 페비거는 셔먼호의 생존 선원 석방을 위한 특사 파견과
새넌도어 호의 종선에 총격을 가한 사건에 대한 사과와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조선 정부의 답신이 없으면 미국 군함이
다시 올 것이란 협박을 한다.
1871년 미국 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하기로 결정하고 주 청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Fredrick Low)의
지휘 아래 5척의 군함을 파병한다. 1870년 프레드릭 로우는 베이징 주재 미국공사로 부임한 뒤 미 해군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와 원정 계획을 수립하여 이듬해 5월을 원정 시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킨 가나가와 조약의 전례에 따라
조선도 무력시위를 통해 개항시키고자 했다. 로우는 청나라 총리 아문을 통해 조선에 사전에 자신들의 목적을 통지하도록 했다..
1871년 음력 1월 17일에 발송된 편지에서 로우는 자신을 대아미리가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흠명출사조선지공사(欽命出使朝鮮之公使)로 소개하며 미국의 요구사항을 조선 조정에 전달하였다. 편지에 적힌 주요 내용은
제너럴 셔먼호의 재발 방지를 위한 자국 선박의 항해 안전 보장과 일본의 예와 같은 통상조약의 체결이었다.
그는 편지 말미에 화친을 구하는데도 갖은 방법으로 거절하면 불목을 부를 것이니 또 누구를 탓하겠는가
라며 무력 사용을 협박을 했다, 편지를 받은 조선은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기로 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평안감사였던
박규수가 답신을 보냈다. 박규수는 미국봉합전체자(美國封函轉遞咨)에서 위험에 빠진 선원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전통이고, 셔먼호가
경계를 무단 침범하여 발생한 일이란 것을 누차 해명하였는데 이제와서 다시 문제를 삼는 까닭을 모르겠다. ,
미국 상선이 우리나라 사람을 먼저 능멸하지 않았다면 조선 관민이 어찌 먼저 남에게
능멸을 가하겠는가 라고 오히려 미국의 잘못을 지적했고, 통상 요구에 대해서는 우리는 중국의 번국이니
사대를 하는 신하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외교를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박규수의 이러한 답신은 대원군과 박규수가 이 시기에 쇄국론과 개국론으로 대립했다는 통설과 달리
사실은 긴밀히 협조해 미국과의 분쟁에 대처했다는 새로운 평가의 근거가 됭다, 외교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조선 침공을
강행했고 뉴욕헤럴드 는 이 교도들과의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도한다, 미국은 프랑스 신부 리델을 길잡이로 삼아
5척의 군함과 1,200여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한다, 이것이 신양묘의 발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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