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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해안국토종주 8-5(줄포버스터미널-새만금방조제홍보관)농은버스승강장-김낙선의사기적비,(2018년 5월 21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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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국토종주 8-5(줄포버스터미널-새만금방조제홍보관)농은버스승강장-김낙선의사기적비,(2018년 5월 21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6. 21. 06:30


보령원(保寧院) 保寧書院 입구 농은버스승장장을 지나서 가는길

상서면 감교리 봉은마을과 주산면 사산리 봉은마을이 함께있는 마을이 보인다, 탑이 있는 건물은 감교교회다,

그리고 길건너 상서면 감교리와 주산면 사산리마을 도 보인다,

이곳은 상서면과 주산면 경계가 있는 마을로 행정구역과 마을이 함께 겹치는 마을인것 같다,

200m후방에 신흥으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있고


감교 교회로 들어가는 길도 있다,

앞에 보이는 승강장은 봉은버스승강장이고

봉은마을 표지석도 있다,

길건너편에 보이는 저길이 주산으로 들어가는 도로다,

개암사 입구도 지나간다, 개암사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개암로 248번지에 있다. 개암사는

634년(백제 무왕 35)에 묘련대사가 창건한 절로. 1314년(고려 충숙왕 1)에 원감국사가 다시 지어 큰 절로 거듭나게 되었다,,

개암사 대웅전은 공포가 기둥 위 뿐만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의 건물로. 비교적 높은 기단위에

막돌 초석을 놓았으며, 건물에 비해 굵은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우람한 기둥 덕분에 안정감이 느껴지며, 조각기법에서도 세련미가

돋보이는 건축물로 보물 제292호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대웅전은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였다.

개암사는 이곳애서 약 2,7km 지점 우금산 아래에 있다,

가는길 왼쪽에 상서면 감교리 807-12에 있는

별이농장도 보인다,

길 건너에도 상서면 감교리가 이어지고

회시마을도 보인다, 회시마을은 다소 큰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나무

숲아래 정자도 있다, 여름철 그늘 쉼터인 모양이다,

회사마을 입구에는

회시마을 표지석도 있고 회시버스승강장도 있다,

회시마을로 들어가는 길

회시마을에 있는 상서주유소


주유소를 지나니 처음보는 이름이 보인다,

원숭이 학교 다

원숭이학교 자연사 박물관,이다, 문화관광부 지정 전라북도 제4호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된

원숭이 학교는 90여 마리의 다양한 원숭이와 다양한 악어가 서식하는 악어 동물원, 문화 예술적으로 보전 가치가 있는

동양 최대 규모의 화석, 원석 보석 박물관, 봄의 요정이 부르는 로즈마리 터널, 라벤다 동산, 스피아민트 광장 등

향긋한 허브향이 함께하는 허브식물원, 다람쥐 동산 등

다양한 볼거리와 20여명의 원숭이 학생들이 선보이는 좌충우돌 원숭이 친구들의 학교생활,

원숭이 공연과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아슬아슬하고 웃음과 감동이 교차하는 중국 기예단 공연이

함께펼처지는 학교라고 안내되여 있다,

가는길 건너편은 천등마을 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이렇게 새로지은 주택과

대대로 내려오는 집들이 묘한대조를 이루는곳 이곳은 부안로 1811 이다,

부안로의 끝은 어디서 어디까지일까? 새로 만들어진 도로명은 시군을 뛰여넘고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이러다가 앞으로 어느 싯점에서인가는 도로명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나누어야 할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인도가 있는 길을 잠시 따라가면서

즉흥적으로 생각이 나서 하는 소리일뿐 내가 걱정해야 하는 일은 아닌데,

감교마을이다,

지금까지 긴긴 감교리를 따라 왔는데 정작 감교마을은 이곳이라니

이제 감교리 마을 끝 지점이다,

올라가는길 항일의병 선봉장 김낙선의사 기적비가 있다, 김낙선 의병(1881~1925)은 부안군 상서면 출신으로

1909년부터 의병장 이용서 부대에 가담 의병 30여명과 함께 고부, 부안, 태인등지를 근거로 활동했다, 구 한말시대 20대 때부터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운명을 달리한 항일의병의 뜻을 기리기위한 기적비로 2004년 후손들이 부지를 매입하고

전북도와 부안군 지원으로 2009년에 세워졋다,

김낙선의사는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3월 28세때 태인군 남촌면 일대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교전중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탈출에 성공해 은신하며 치료해 후일을 도모했다, 같은해 7월 의병 12명을 규합 선봉장이 되여서 항일유격전을

전개해 크고 작은공을 세웠다, 다시 한달뒤 김제군 홍산면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중 총상을입고 체포구금되여

11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됬다,


1916년 11월 7년형을 모두채우고 출옥했지만 이미 고국은 일본의으로 넘어간 후였다,

뛰여난 활약상을 보였든 김의병은 1925년 고문의 휴유증을 못이겨 44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1986년 12월 16일 건국포장이

1990년 12월 26일 건국 애국장이 추서 되였어며 2003년 5월 20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