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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청계산 이수봉에서 혈읍재 매봉(2018년 6월 24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서울·북한·도봉

청계산 이수봉에서 혈읍재 매봉(2018년 6월 24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7. 2. 06:00


청계산은 이름그대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산이란 듯으로,

옜골 원터골 등 계곡이 믾은 편이다,

청계산은 조선 태조 이상계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자,

고려말 충신이였든 조윤이 송도를 떠나 입산했든 곳이라 전해지는 산이다,






청계산은 청룡이 승천했든 곳이라고 해서 청룡산으로 불리기도 하며

풍수지리학적으로 관악산을 진산으로 수리산을 백호, 청계산을 청룡이라하여

좌청룡 우백호의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청계산은 예로부터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짐승이 많아 왕의 사냥터로 유명했다,

단종은 청계산에서 두번 사냥을 했고 세조 성종은 청계산에 와서 주로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고 전해진다,

세조실록에는 짐승 잡은것이 많았다, 새를 잡은것이 많았다, 는

기록이 있고 이들이 잡은 동물의 종류로는 사슴, 멧돼지, 노루, 토끼등이 있다고 했다,

연산군은 청계산에서 활쏘고 사냥하는 것을 즐긴 대표적인 조선시대 왕이였다,

위에 보이는 안테나가 있는 곳이 청계산 정상이다,

저곳에는 군부대 주요 시설물이 설치되여 있는 곳이라서 출입금지 구역이다,

군부대가 있어나 군 전용도로가 있다,

우리는 이수봉 방향에서 왔어니 군 도로로 매봉방향으로 간다,

군 전용도로 로 잠시 내려 가다가

커브를 틀 즈음에 앞에 보니는 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면

매봉으로 가는

군 부대 아래 쪽 우회 등산로가 있다,

청계산 등산로는 거의 전부가

숲이 우거저 있어 그늘이 진 곳을 따라 가는게 특징이다,


등산로는 맞는데 등산로 같지는 않고

둘레길 같은 청계산 등로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런길이다,

그래서 일까

의왕대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 이길이다,


이제 매봉이 700m 남았고

가는 시간은 12분정도 걸린다는 이정표도 보인다,

그리고  그옆에는 혈읍재 라는 안내가 있다,

정여창의 피눈물 혈읍재는 조선 연산군때 유학자 정여창 선생이 스승 김종직 선생께서 무오사화로 부관 참시

당하였다는 소식에 온거지인 금정수(하늘샘)로 가기 위해 피 눈물을 흘리며 넘어 다녔다는 고개다,

이수봉은 정여창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김광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산에 은거 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번이나 넘겻다고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한 봉이다,

- 위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또한 이곳 청계산은 1506년 중종 1년 경기관찰사 윤금손이 청계산 기슭에 나무가 빽빽해

도적의 소굴이 되였어니 나무를베어 소통을 시키소서 하고 아뢰니 왕이 그리하라 명한 기록도 있다,

1594년 선조 27년 에는 30세의 송유진이라는 자가 속리산에서 나와

도적의 무리를 모아 청계산에서 머물럿다, 당시 그를 따르는 무리는 2000여명에 달했다,

서울의 서열출신이엿든 송유진은 자칭 의병대장이라 부러며 나라에서 소인들만 채용한다,

어진 수령은 좇겨나고 무능력한 사람이 중용된다 며 역모를 꾀했어나 송유진을 포함해 주도자 8명이

(오원종, 김천수, 유춘복, 김연상, 송만복, 이추, 김영)은 모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반면 청계산은 고려 충신 조윤이나 정여창 선생의 일화에서 보듯 충신과 대학자가

머물든 은둔과 지조의 땅이기도 했다, 고려말 三隱(삼은)의 한명인 목은 이색이 이 산에서 숨어 살았고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뒤 옥녀봉 아래서 말년을 지냈든 산이기도 하다,

이런생각 저런생각을 하면서 걷다가보면 불현듯 앞에 세워진 표지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매봉이다, 옛날에는 청계산에 매가 많았던 모양인지 매가 이름 앞에 붙은 매바위도 있고 매봉도 있다.

매봉에도 이정표가 가는길을 알려주고 있어며

성남 누비길 안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