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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역사를 따라 가보는 경복궁(2015년 2월 20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역사를 따라 가보는 경복궁(2015년 2월 20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5. 2. 20. 17:38

경복궁은 뒤로는 백악산, 좌우에는 인왕산과 낙산이 버티고 있는 자리에 터를 잡았다.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임금님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왕의 조상님들을 모시는 종묘를 짓고

왕실가족과 나랏일을 돕는 신하들이 머무르는 궁궐 을 짓는 일이였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620년 전이,

 기록에 따르면 태조 3년(1395) 12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완성하였다고 하니 궁궐을 짓는데 걸린 시간은 10개월 정도였다.

 

 궁궐 안에는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 왕과 왕비가 사는 곳, 신하들이 출근해서 일하는 곳, 궁궐담장과 출입문

등이 있었고 궁궐의 이름은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시경(詩經)에서 따와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경복궁이라는 뜻은 나라가 오래도록 큰 복을 받으며 번성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다,

경복궁은 명칭과 입지 선정에 당대 최고의 사상가가 온갖 정성을 들인 작품이지만,

운명은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실 조선의 임금은 경복궁 보다는 이궁인 창덕궁에서 주로 생활했다.

 

절도와 기품이 서린 경복궁보다는 자연 지세를 살려 설계된 창덕궁에서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국이 화마에 휩싸인 임진왜란 때 두 궁궐은 모두 불탔지만, 임란후 조선왕실은 창덕궁만 재건해 사용했다.

그러나 경복궁은 약 270년간 폐허로 방치돼 있었다. 500년 조선역사에서 절반이 넘는 세월이다,

흥례문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가 있고,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어구(御溝)는 경복궁 뿐만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에도 있으며, 고려궁궐, 중국의 궁궐, 베트남의 궁궐에도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의 궁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구와 영제교는 근정문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시에 신하들이 도열할 위치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했다.

영제교를 중심으로 북쪽에 2품 이상의 관원이 서고, 남쪽에 3품 이하의 관원이 정렬하였다.

경복궁 중건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해결했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해 1865년부터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그 결과 경복궁은 건물 500여동을 갖춘

장엄한 궁궐로 환생한다. 그러나 일제가 총독부와 야외 전시관을 신축하면서 또 다시 대부분이 파괴된 것을.

1990년대 부터 복원 공사가 진행돼 다소나마 옛 모습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며 아직도 복원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근정문 勤政門 이다,

근정전(勤政殿)이다. 근정전은 경복궁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왕이 공식 행사를 치르던 정전으로 조선의 권위와 명예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삼면이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닥에는 촘촘하게 박석을 깔았다

 

근정문 勤政門 에서 근정전으로 들어서는 길은 어도라고 하고,

어도 좌우에 비석처럼 생긴 돌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이 돌들은 품계석이라 한다,

품계석은 근정전에서 행사을 할때 신하들이 자신의 지위에 맞게 줄을 설수 있도록 표시한 돌들이다,

품계석은 근정전을 바라보면서 오른쪽(동쪽)에 있는 품계석에는 문신들이 차례로 줄을 서고

왼쪽(서쪽)에는 무신들이 품계석에 따라 줄을 서게 되여 있다.

그리고 근정전 勤政殿 앞 넓은 조정 마당에 깔린 돌들은 박석이라고 하는데 박석 겉 부분을 거칠게 만들었다,

 거친 박석을 놓은 것은 신하들이 조심스럽게 다니도록 일부러 만들었다고 한다. 

군주의 공간은 근정전 뒤편의 사정전(思政殿)으로 이어진다.

아래 사진은 사정전으로 들어가는 사정문이다,

사정전은 임금이 평상시에 정사를 펼치고 주연을 즐기던 편전이었다.  

사정전에서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휴식을 취하고 잠을 청하는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다.

조선 최고권력자인 군왕은 이처럼 일직선 상에 놓인 정전, 편전, 침전을 오가며 일상을 보냈다.

↓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행각에 연이어 있는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 뒤에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내진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이다. 

남녀가 유별하던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도 당연히 나뉘어 있었다.

 여성들의 구역은 교태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교태전은 확실히 여성스럽고 단아한 분위기가 풍긴다.

건물이 독립돼 있는 강녕전과 달리 행각이 ㅁ자집처럼 모두 연결돼 있다.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푸근하다.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당시가 아니라 세종 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수차례 소실됐는데, 20세기 이후에도 철거와 재건의 역사가 반복됐다.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일어나자 교태전을 뜯어내 내전인 대조전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태전은 1995년 완공된 새것이다,

조선여성 최고권력인 왕비와 대비가 살았든, 교태전과 자경전은 왕실의 여성에게 바쳐진 공간이다,

이곳은 내명부의 공간이라 궁궐의 살림을 살아야 하는 장소이자 권력이기도 했다,

 

 

 

전각의 뒤뜰에 있는 가산(假山)인 아미산에는 약 150년 동안 자리를 지킨 굴뚝 4개가 서 있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인 아미산 굴뚝은 주황색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육각 기둥 형태로 만들었다. 

굴뚝 벽면에는 장수와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학, 소나무, 매화, 사슴, 해태, 불가사리 같은 그림을 끼워 넣고,

위쪽에는 기와를 얹은 뒤 자그마한 연기 구멍을 냈다. 아미산은 굴뚝뿐만 아니라 창덕궁 낙선재에 비견되는 화계도 볼만하다.

경회루 앞 연못을 파낼 때 생긴 흙으로 조성한 아미산은 비탈진 오르막이 아니라 계단으로 돼 있다.

여기에 다양한 식물을 심어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만발한다,

아미산 정원 오른쪽 조금은 넓은공터 건너편에 자경전이 있다,

 

자경전의 꽃담,..자경전에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글씨가 들어가 있는 꽃담이 있다.

 꽃담은 여성을 위한 전각인 자경전과 잘 어울린다.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꽃담도 인상적이다.

조선의 꽃담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자경전 담에는 다채로운 그림과 글자, 무늬가 표현돼 있다.

은은한 색감과 단정하고 정연한 모양새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  대비를 위해 세워진 자경전,..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아들을 왕으로 간택해 준 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고종은 궁궐에서 나고 자란 왕자가 아니다. 족보를 따져보면 왕가의 후손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주상에 오를 사람은 아니었다. 조선후기에 왕이 대를 이을 적자를 낳지 못하고 죽는일이 연달아 일어나자.

고종의 친부 대원군은 혼돈의 틈바구니 속에서 은밀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여 아들을 권좌에 앉혔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에게 옥새를 넘겨준 인물은 헌종의 어머니이자 대비인 신정왕후다.

 

신정대비는 이곳에서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행했다. 자경전은 준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가 발생했지만, 1888년 재건된 경복궁의 침전 중 유일하게 100년 이상을 버텼다.

왕가의 최고 어른인 대비에게 헌상된 자경전은 교태전보다 구조가 복잡하고 위엄이 느껴진다. 

전각을 정면에서 봤을 때 오른쪽에 청연루(淸燕樓)라는 누마루와 별채인 협경당(協慶堂)이 붙어 있고,

뒤편에는 온돌이 놓인 복안당(福安堂)이 연결돼 있다. 침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웅크리고 있는 동물상인 서수(瑞獸)가 있다. 

 

자경전에서 눈길이 가는 곳은 따로 있다. 우선 전각 뒤쪽에 있는 십장생 굴뚝이다.

자경전과는 별도로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유산으로, 생김새가 매우 독특하다. 길쭉하고 늘씬한 일반적인 굴뚝과는 다르게

 담을 돌출시켜 만들었다. 커다란 캔버스 같은 담에는 대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도가 그려져 있다,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 는 뜻이담긴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연못은 향원지라 부르고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 는 뜻의 취향교(醉香橋)라 했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향기가 퍼지는 정자,..향원정은 연못과 건물이 네모반듯한 경회루와는 반대로 부드러운 곡선이 조경의 핵심이다.

 그래서 분위기가 자못 여성스럽고 아담하다.

 

 

↓ 경회루는 침전 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경회루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에 중건된 것이다. 다시 지어진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회루는 중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왔다.

1997년에 경회루 연못을 청소하려고 물을 뺐더니 청동으로 만든 용(龍) 두 마리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용은 길이가 146.5㎝, 넓이가 14.2㎝, 무게가 66.5㎏ 나 되였고. 옛날부터 용은 물을 다스리고 비를 내리게

할 수있는 물로. 경회루에 불이나지 않도록 빌기 위해 왕의 명령으로 연못 북쪽에 용을 넣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나무로 건물을 지었다. 나무는 불에 약하고 불이 나면 쉽게 타버리기 때문에.

나무로 지어진 경회루가 불에 타지 않도록 바라는 마음에 비를 내리는 용을 연못에 넣어둔것으로 보인다

이때 발견된 용은 지금 경회루 연못이 아니라 국립 고궁박물관에 전시중이다,

↓  이제 다시 근정전과 근정문으로 돌아 나왔다,

연휴라 많은 사람등리 모여든 경복궁, 이중 거의 절반은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들이였다,

근정전 내부다, 들어갈때는 많은 사람들로 해서 도저히 볼수 없었다,

그나마 한참을 뒤에서 기다리다가 사진 한장 찍은 시간만 들여다 보았어니 10초 쯤은될까?,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하월대와 상월대로 구분되는데 이 월대를 오르내리는 답도 중앙에 상월대에는 봉황문과 당초문이 새겨저 있고, 

1 단격인 아래에서 근정전으로 오르는 하월대 답도(아래사진)에도 형식은 다소 다르지만 봉황문과 당초문이 새겨저 있다,

↓  이제 경복궁을 한바퀴돌아 다시 근정전으로 돌아왔어니

근정전 앞에 는 저 근정문으로 해서 경복궁 정문인 화문으로 나가면 오늘의 경복궁 순레도 끝이난다,

궁궐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그 가족들이 생활을 하던 곳이다.

그리고 왕과 왕비를 도와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랏일을 보는 관리,

왕실 가족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일을 하는 궁녀와 내시, 궁궐을 지키는 군인,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와

병을 고치는 의사등 많은 사람들이 궁궐에서 살거나 출입을 하면서 일을 했다.

 

그러면 경복궁에는 도대체 몇 명이나 살고 있었을까?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개 3,000명 정도가 궁궐에서 살거나 궁궐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왕실가족, 궁녀, 내시 등이 500명 정도이고 궁궐을 지키는 군인이 2,000명 정도 그리고 나랏일을 보는

신하들과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이 500명 정도였다고 기록되여 있다,

오늘은 구정 명절을 맞아 특별히 경복궁을 지키든 군인들의 교대의식을 재연하는 공연을 하고 있었다,

임금님이 살든 궁궐이니 궁궐을 수비하든 군인들이야  당시 조선 최고의 군인들이 였어리라,

 여기서 잠시 경복궁과 중국의 자금성을 비교해보자, 닮은점은 무었이고 다른점은 무었일까?,

 

우선 중국의 자금성 궁궐은 네모난 형태다. 그리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요한 건물들이 지어져있고

양 옆에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 서 있는 웅장한 궁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지런히 정리된 건물들이 가득하다.

자금성은 폭이 넓고 깊이가 얕은 대신, 경복궁은 폭이 좁은 반면 깊이가 매우 깊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자금성 밖으로는 넓은 물줄기가 자금성을 감싸고 있다.

이러한 물줄기를  해자 라고 하는데 이는 밖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위해 궁궐밖에 땅을파고 물을채운 것이다.

하지만 경복궁 밖에는 자금성처럼 궁궐을 감싸는 물줄기가 없다. 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물길을 두를 필요가 없었다.

 

또 다른 점은 자금성이 있는 곳은 산이 없는 평지다. 자금성 뒤 산은, 땅을 파낸 흙으로 만든 인공산이다.

하지만 경복궁은 백악산(북악산) 아래에 궁궐을 지어 자연의 요새가 있는 셈이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백두산을 신령한 산으로 여기고 소중히 하였다.

백두산의 신령한 기운이 산줄기를 타고 경복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옛날 지도에 백두산의 산줄기가 경복궁 교태전의 아미산으로 이어져 있는 것으로도 알수가 있다,

참고자료 / 문화재청 경복궁 자료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