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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청평사(2018년 9월 16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인천·경기·강원

청평사(2018년 9월 16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9. 20. 06:00

청평사 대한불교조계종 제 3교구 신흥사말사다, 973년(고려 광종 24)백암선원으로 창건했다,

1,000년이상을 이어온 선원으로 청평사를 에워싼 끝봉, 경운산, 오봉산, 부용산등이 창평사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사진은 청평사로 들어 가면서 작은 다리 아래에 있는 연못에서 본 것이고

아래 ↓ 사진은 청평사 왼쪽에 있는 요사채 다,

청평사 회전문이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문으로 보물 제164호. 큼직하고 반듯하게 다듬은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아 문과 좌우 행각을 지었는데 현재는 행각의 주춧돌과 문만 남아 있다.

6·25전쟁 때 소실된 극락전 앞에 세워진 중문으로 중앙은 통로고, 좌우에는 협칸을 만들어

천왕상을 안치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는 문짝도 없이 문만 남아있는 문이다,

회전문과 대웅전 사이에 새로 지어진 불이문인 경보루다,

누하진입을 이루러 한것 같은데 회전문과 대웅전 사이의 공간이 좁아서 계단을 오른후

전면에 있는 대웅전이 너무 가깝게 있는 것처름 답답해 보인다,

누하진입(樓下進入)이란? 누마루 아래 불이문을 통해 계단으로 올라 본전의 정면을 바라보며

법당 앞 마당에 이르는, 보통 산지에 있는 사찰에서 즐겨쓰는 방법으로 일 열로 배치된 가람구조에 누마루 아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본전의 정면을 바라보며 계단을 올라서면 밝은 빛과 너른 마당에 도달하는

사찰의 진입 방법중 하나를 말하는 용어다,

경보루 아래를 통과하면서 좌우를 살펴보면 우측에도

좌측에도 이런 붉은색 연등을 걸어 놓았다,

경보루 아래 계단을 올라가면 전면에

대웅전이 나타난다,

대웅전 문 창살

대웅전 삼존불,

석가모니불 옆으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그리고 대웅전 왼쪽에는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이란?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살을 모신 당우로 관음전이 많이 세워진 까닭은,

관음이 모든 환란을 구제하는 보살일 뿐 아니라 그의 서원이 철두철미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 한 인연과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이다.

관음전 내에는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연화좌 위에 앉은 관음상을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나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楊柳觀音), 보관 위에 11개의

다른 모습을 가진 십일면관음, 그 밖에 해수관음(海水觀音)·백의관음(白衣觀音)·

용두관음(龍頭觀音)·천수관음(千手觀音) 등을 모시기도 한다.

오른쪽에는 나한전이 있다, 나한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이룬 성인을 모신 전각이다. 흔히 깨달은 성인을 아라한이라고 부르는데,

나한은 이를 줄여 부르는 호칭이다. 나한전을 보면 16명의 나한이 모셔져 있다.

이는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기 위한 회의를 열자

500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 제자들 나한의 모습을 보면 웃거나 졸기도 하고, 등을 긁기도 하는 등

다양한 표정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한이 복을 주고 소원을 이뤄주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으며, 특히 고려시대에 나한 신앙이 발달했다

천평사 대웅전 뒤에는 극락보전이 있다, 극락전(極樂殿)은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본존불로 모신 법당이다. 우리나라에는 이 법당이 대웅전 다음으로

많이 설치되어 있다. 이상향인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보통 동향에 설치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로서 봉인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극락보전 옆 엄청나게 큰 주목이 있다,

수령 530년,

지정일이 1982년이니까, 2018년 현재로는 570년이나 된 주목이다,

융고 135cm,

회전문 옆에 있는 범종각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조선 중기에 세워진 절의 문. 보물 제164호.

회전문을 나간다,

회전문을 나서면 청평사의 넓은 마당과 한켠에 있는 편의 요사채

이렇게 넓은 공간을 두고 다닥 다닥 붙여서 중수를 한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도 터가 그런 모양이다,

청평사를 나간다, 가는길 옆 1981년 발굴 조사단의 지표발굴 및 측량조사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연못인 영지(影池)를 발견했다, 영지는 청평사 하면

빼놓을수 없는 이자현이 조성한 직사각형의 연못이다, 영지를 이자현이 조성했다는 내력을

알려주는 문헌은 김시습의 한시에 언급이 되여 있다,

영지는 청평사 뒤의 오봉산이 비치도록 되어 있으며,

연못 가운데 세 개의 큰 돌이 있고, 그 사이에 갈대를 심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몄다. 고려시대

이자현은 37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청평사계곡에 암자와 정자, 연못을 조성했는데

이렇게 조선된 고려선원은 자연적 인문학적 의미가 매우 크다,

이곳은 계곡 곳곳에서 이자현(1061-1125)의 발자취를 느낄수 있었는데

청평사를 나가면서 오른쪽에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 부도가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자현이 죽고난 뒤에 임금이 眞樂公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안내되여 있다,

청평사 진락공 이자현 승탑 淸平寺 眞樂公 李資玄 僧塔 (두산백과)

고려시대의 학자이자 거사(居士)로 잘 알려진 이자현의 사리를 보관한 탑이다. 진락(眞樂)은 그의 시호(諡號)다.

이자현은 인종(仁宗) 때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 오봉산에 들어가 아버지가 지은 보현원(普賢院)을 중건한 뒤 문수원(文殊院)이라

개칭하고 선학(禪學)을 닦았다. 보현원과 문수원은 모두 청평사의 옛 명칭이며, 청평사라는 명칭도 이자현의 호인 청평거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청평사에는 승탑외에도 이자현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데, 사찰 입구에 그가 조성한 영지(影池)도 잘 알려진 유적이다.

진락공 이자현 부도 앞에는 두마리의 사자가 크게 포호를 하고 있다, 무었을 알려 주기 위해 수백년을 소리치고 있을까?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니 무척 오래된 것 같은 누각이 보인다,

설명이 없어니 무었을 하든 곳인지 알수는 없지만 이곳 청평사에서는 본전주변 말고는 전혀 관리를 안하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저 내릴것 같은 누각,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격고 지나온 문화 역사가 아깝다,

이제 계곡을 따라 내려 간다,

엄밀히 말하면 산에서 내려 왔어니 청평사를 나가는 길이다,

청평사 계곡 구송폭포(九松瀑布)가 보인다,

구송폭포(九松瀑布) 한자로 보면 9홉 그루의 소나무 폭포다,

설명을 보니 폭포주위에 아홉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아홉가지 폭포소리도 들린다고해서

구성폭포(九聲瀑布)라고도 했다, 일년내내 많은량의 물이 쏟아저 내리는 폭포로 양쪽에 수직으로

펼처진 절벽은 단정한 모습의 선비의 기상을 지녓다고도 한다, 또한 폭포 위쪽에는 

사람이 쉴수있는 구송대(九松臺)도 있다,


이곳은 청평사 일대는 고려선원(高麗禪圓)이다,

고려시대 이자현, 원진국사 승현, 문하시중 이암, 나옹왕사 등이 조선시대에는 김시습, 보우, 환적당,

환성당등이 이곳에 머물럿다, 고려선원에 머문 당대최고의 고승과 학자들은 학문과 사상을 전파 하였고 뛰여난

문인들은 시문으로 이곳의 자연과 문화를 노래했다,

고려선원은 구송폭포흫 비롯한 많은폭포들이 계곡을 수놓고 있어며 자연 그대로

보존된 선동(仙洞)과 서천(西川)계곡, 이들을 에워싼 부용봉의 바위들이 청평사 두변을 장식하고 있다,

고려초기에 건립된 삼층석탑, 이자현이 조성한 영지(影池), 한국서예사에 빛나는 문수원기비(文殊院記碑)와

시장경비(施藏經碑) 사찰주변의 노란 매화군락지, 등이 있고

조선시대 스님들의 사리 (舍利)를 안치한 부도, 비를 기원하든 기우단(祈雨壇)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든 천단(天壇)과, 제단식터. 공주설화가 전해지는 회전문(廻轉門)등은

고려선원(高麗禪圓)의 풍부한 인문 자산이다,

거북이 처름 보이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이 바위 가 거북 바위다,

공주설화(公主說話)

중국 당나라 태종의 딸 평양공주를 사랑한 청년이 있었다, 태종이 청년을 죽이자

청년은 상사뱀으로 환생하여 공주의 몸에 붙어 살았다, 당 나라 궁궐에서는 상사뱀을 떼여 내려고

여러치료방법을 찾아 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공주는 궁궐을 나와서 방랑을 하다가 한국의 청평사에 이르게 된다,

공주굴에서 하루를 자고 공주탕에서 몸을 깨끗이 씻은 공주는 스님의 옷인 가사를 만들어 올렸다,

그 공덕으로 상사뱀은 공주 와 인연을 끊고 해탈하였다,

이에 공주는 당나라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청평사를 고처 짓고 탑을 간립했다고 한다,

이 때 세운탑을 공주탑이라고 하고 공주가 목욕을 한곳을 공주탕 이라고 하며 상사뱀이 윤회를 벗어난 곳을

회전문이라 부르게 되였다는 공주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공주설화의 주인공인 공주

조형물을 지나서 계곡을 따라 내려 간다,

이제 부터는 상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청평사 매표소를 지나서 청평계곡을 나가는 다리를 건너간다,

이 다리는 많이 낡았는지? 옆에다가 새로운 다리를 만들고 있는 공사가 진행중이였다,

여러기의 묘들이 있다, 어느분들의 묘 인지는 알길이 없지만

천년의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인사들이 지나간 곳이니 이 자리에 이런 묘가 있는게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묘 의 배치를 보아 부모 산소와 앞에는 자식들 산소가 6기가 있는 가족 묘 인듯 하다,

잠시 도로 옆으로 나있는 데크 인도를 따라 가면

부용계곡에서 소양호로 흐르는 하천 위 다리를 지니간다,

이곳에는 상가와 청평사 주차장이 있어며 주차장 못미처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이

소양호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