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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425년의 역사 (2018년 10월 9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행주산성, 425년의 역사 (2018년 10월 9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10. 12. 06:00


 행주산성 대첩문이다, 1593년 2월 12일, 왜군 3만여 명이 한양 서쪽의 행주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부대를 세 무리로 나누어서 총 공세를 펼쳤다. 성 안에서는 권율장군이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왜군과 맞서 결사 항전을 벌여 마침내 이들을 물리친다. 성 주변의 부녀자들은 앞치마로 돌을 날라

투석전을 벌였다. 이것이 관민이 일치 단결해 일구어낸 행주대첩이다, 그로부터 425년 후인

 2018년 10월 9일 이제는 유적지이자 전설이 된 행주산성을 찾았다,

대첩문을 들어가면 행주대첩 승리를 이끈 조선의 명장 권율장군 동상이 있다,

장군은 1537년에 태여나,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선조 37년인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 되었다.

임진왜란당시 바다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선무공 권율장군이 있었다,

행주산성은 곧 권율 장군의 이야기다, 지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권율(權慄)장군은 왜란 초기 광주 목사로 있으면서 진산의 배고개에서 왜군을 물리쳐 전라도 순찰사가 된 뒤, 

한양을 먼저 수복해야 한다고, 병력을 이끌고 북상해서, 수원 독산성(禿山城)을 거쳐 한양 서쪽 행주산성에 거점을 확보했다.

권율장군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명나라 군대와 합세해 한양을 탈환하려 했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패배해 후퇴하는 바람에 고립된 상황이었다.

독산성에 주둔할 당시 권율은 한양 서쪽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조방장 조경(趙儆)에게

진지를 물색하게 했다. 조경은 한강을 건너 한쪽은 한강, 나머지는 평야에 둘러싸인 이름없는 고지를 발견했다.

며칠 뒤 권율과 함께 이곳을 주둔지로 삼아 군사들을 이동시키고, 울타리를 치는 등 성을 구축했다.

이곳이 행주산성(幸州山城)이다. 아울러 권율은 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금천(衿川, 시흥)에 주둔하게 하고,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에게는 강화 지역의

해안에 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충청감사 허욱(許頊)에게는 통진(通津, 김포)에

주둔하게 해 행주산성을 지원토록 했다.

길가에 자그마한 홍살문이 있어 이곳이 신성한 장소임을 알려준다,

홍살문을 지나 삼도를 따라 들어가면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가 있는데 이곳으로 들어가자면

三道三門(삼도삼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삼도는 가운데 神道(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參道(참도)를 둔다, 神道(신도)는

 사당에 모셔진 神(신)이 다니시는 곳으로 일반인은 오갈수가 없어나 부득히 넘어갈때는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고 넘어가야 한다,

三道三門(삼도삼문)이 있을때 들어가는 방법은 右入左出(우입 좌출)로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온다, 이것이 禮(예)다, 충장사는 원래 한강변 행주나루 부근

 마을에 있든 행주서원 사당이였든 기공사의 기능을 옮겨 놓은 것이다,

충장사 三門(삼문)이다, 전통적인 서원의 사당은

통영 충렬사 처름 외(外)삼문 내(內)삼문이 있는데  이곳에는 그런 구분 없이 삼문만 있다,

충장사는 조선시대 부터 있었든 사당은 아니고 70년대 성역화사업때 콘크리트로 지은 사당이다,

그러다보니 전통적인 사당의 모습은 아니고 전형적인 70년대 풍의 건물 모습을 하고 있다, 현판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로, 충장사는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일각에서는 박정희 대톨령의 현판이나 흔적을

지워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한 건 사실이지만 이런 것 마저도 우리의 역사다,

충장사란? 충성된 장군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이다,

한산도 대첩과 진주성 대첩, 그리고 행주 대첩 등 임잔왜란 3대 대첩중 행주 대첩을

이끌었든 권율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행주 대첩의 원년 양력 날자인 3월 14일에 대첩을

기념하는 제례가 매년 이곳 충장사에서 열린다,

충장사 옆에는 목련나무, 언덕 아랫단에는 백일홍도 있다,

물론 70년대 성역화 사업으로 옮겨 심은 것이기는 하지만 수령은 역사가 있는 듯 하다,

충장사에서 일반 참배객은

사당에 미리 준비되여 있는 향을 피우고 경건한 마음으로 禮(예)를 올리면 된다,

이제 충장사를 나간다,

그리고 충장사 다음 갈림길에서 오른쪽 갈림길로 들어가면

조금은 외진 곳에 대첩기념관이 있다,

대첩기념관에는 임진왜란당시 사용했든 각종 무기류가 전시되여 있었다,

대첩 기념관 앞 마당에 반송이 있다, 반송은 높이 2 ~ 5m, 잎은 바늘 모양으로

길이 8 ~9cm, 너비l 1,5mm다, 꽃 은 5월에 피는데 암꽃이 수 꽃보다 약간 작고, 수 꽃은 타원형이며

황색을 띠고, 암 꽃은 달갈형이 자주색을 띠는 나무다,

대첩 기념관 내부

작은 공간이지만 대략 이런 전시실이다,

힘이없는 국방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할수가 없다, 임진왜란때에도 10만양병 주장이

반대파들의 득세에 밀려 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조선의 강산이 전쟁의 참화를 격어야 했고 그로부터

얼마지나지도 않아서 또다시 병자호란을 격어야 했는가 하면 다시 조선말 일제 강점기로

나라가 없어젓든 시절도 있었다,

1597년 임난이 끝나고 39년후인 1636년(병자년) 12월 청 태종이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온다. 광해를 반정으로 몰아낸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서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지자 청에 항복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는 치욕의 의식을 치르며

전쟁이 끝이 났지만 비교적 짧은 전쟁기간에도 조선은 수많은 전쟁 포로가 발생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로부터 다시 267년후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된다.

무력을 앞세운 일제는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8월 22일 이완용과 총리대신 데라우치 사이에

한일 합병조약이 조인되여. 조선 왕조 건국 519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가 되여 36년 동안 일제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어며 나라없는 통한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미, 소 양군에 분할 점령되였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남침 함으로써 한반도 전쟁이 일어나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 세월이 무려 68년이다, 그동안 북은 핵까지 보유했지만, 우리는 북한의 핵페기가 아닌 핵동결 정도의허울좋은 

말만으로도 마치 통일이라도 된것처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양보만 하자는 형국이다, 일반 국민이 보기에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평화는 피로 지켜진다, 더 이상의 답은 이세상 어디에도 없는게 진리다,

힘이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그 것은 역사가 말한다, 425년전 임진왜란의

참화속에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이곳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의 정부군과 승군, 그리고 조선의 백성,

더욱이 아녀자들까지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서 왜군을 물리첫다, 전쟁은 반드시 강한자가 이긴디는 법은 없다,

군 관 민이 함께 한마음이면 이 길수도 있다, 이 평범한 진리를 외면하는 국가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작금의 세태가 불안하기만 하다,

주제넘게 내가 걱정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무었때문일까?

어찌되였건 대첩기념관을 나와서 대첩기념탑 방향으로 가다가 보니 한강이 내려다 보인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방화대교와 공항고속도로가 이어저 있고 그 뒤로 강서, 양천, 구로, 금천지역 일대가 모두 다 조망된다,

이곳은 행주산성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山 이름은 행주산이 아니라

해발 125m의 덕양산이다, 잠시 아래쪽에 있는 진강정으로 내려간다, 뭐 특별한 곳이

있는게 아니고 진강정이라는 정자가 있기 때문에 내려가 보는 것이다,

진강정은 이런 모습이다, 그러나 이곳의 전체 건물이나

정자도 모두 목재로 지여 진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모양을 낸 70년대식 건축물이다,

정자를 둘러보러 내려갔다기 보다는 이곳이 어디서 어디로 연결이 되여 있는지 그리고

그 곳에는 또 어떤 길이 있는지 궁금 하기도 해서다, 진강정 앞에서는 행주산성을 한바퀴 돌아볼수 있는 둘레길이 있다,

지금의 이 둘레길릉 고양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이라 부른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이 강변길인 둘레길은 

한강 뱃길로 수송해온 아군의 군수품을 나르든 중요한 통로였다,

고양 역사누리길 고양시정연수원에서 진강정 까지의 한강변 길은

 군부대 경계 지역이였든 곳으로, 지금은 군 초소였든 곳이 전망대 역활을 하는 곳으로 변했다,

이 구간에서 한강 조망은 어주 아름다운 곳이다, 그렇게 잠시 둘러보고나서

진강정에서 대첩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조금은 높은 언덕에 있는 덕양정이다,

이곳 산 이름이 덕양산이니 덕양정이라 이름을 지였다, 행주산성내에 있는

정자는 특별한 역사성은 없고 잠시 쉬였다가 가는 머무는 공간이다,

덕양정을 지나와서 조금 높은 지대에서 본 덕양정 모습이다,

이곳 행주산성에 있는 모든 건물은 70년대 행주산성 성역화 조성 당시에 지어진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예로부터 있엇든 건축믈을 복원한게 아니라 성역화사업 계획에 따라 새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다른곳 문화재처름 고증을 거처 목재를 사용해 복원한 곳과는 다르다,

덕양정을 지나 옆으로

올라가면 행주대첩비로 가는 길이 있다,

행주대첩비 안내, 높이 178㎝, 너비 82㎝, 두께 18㎝.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다,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602년(선조 35) 대리석 재의 비로서 기단부는 묻혀있다. 앞면의 상부에 약간의 균열이 있고, 측면에는 상부에서

하단까지 약 3㎝ 정도로 쪼개져 있으며, 마멸이 매우 심하여 부분적으로 수십자 밖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태 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도 역사다,

비문은 최립(崔岦)이 짓고 한호(韓濩)가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元帥權公幸州大捷碑(원수권공행주대첩비) 9자를 두전(頭篆)하였다. 비음은 사위인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비문에는 막료와 사병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동기를 적고있다.

즉, 1593년 2월 권율이 정예군  2,300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주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육박전으로 승리하고 

적군의 깃발, 투구, 갑옷, 무기 등을 노획한 혁혁한 전과를 밝히고, 권율의 가문과 같이 좋은 가문에서 비롯된 인격과 덕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밖에 없었으며 나아가 이를 기리지 않을 수 없어 비를 세운다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오늘 본 행주대첩비각 안에 세워진 비석의 글자는 한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모가 심했다,

행주대첩비에서 내려다 보이는 덕양정과 한강 전경,

여기서 잠시 권율장군이 왜적을 물리첫든 당시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425년 전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 자리를 잡자, 왜군 지휘부는 이를 의식하고 권율은 지략이 뛰어난

장수라 잠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속히 쳐부수지 않으면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라며 총력을 기울여 행주산성에 대한 공세를 감행 했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성을 에워싼 왜군 3만여 명은 징과 북을 쳐대며 기세를 올렸다.

군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권율은 수만의 왜적을 목전에 두고 조국의 운명을 이 일전으로 타개하려 한다.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같이 죽기를 맹세하자. 라며 전의를 북돋웠다. 왜군은 새벽부터

어스름이 질 때까지 교대로 성을 공략했다.

행주산성의 뒤쪽은 강벽(江壁)에 막혀 달아날 길도 없는 상황이어서 조선의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조선 군사들은 왜군이 성 쪽으로 접근하길 기다렸다가, 화차(火車)와

수차석포(水車石砲),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총통 등을 일제히 발사해 왜군의 성내 진입을 차단했다. 특히 왜군은

산 아래 쪽에서 올려다보고 총을 쏘아야 했기 때문에 고전했지만, 조선 군사들은 위에서 아래쪽으로

활을 집중적으로 퍼부어 왜군의 기세를 꺾어놓았다.

왜군이 짚단을 쌓고 불을 놓아 화공(火攻) 전법으로 나오자, 성안에서는 물을 길어 불을 껐고,

 조선군의 화살이 거의 바닥나려 하자 수사 이빈(李蘋)이 배로 수만 개의 화살을 실어 날랐다. 왜군이 서북쪽의

방어망을 뚫고 성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권율이 직접 나서서 조선군을 독려하며 왜군을 쫓아내고 방어망을 재정비하기도 했다.

12시간 이상 공방을 주고받은 끝에 왜군은 행주산성을 뚫지 못하고 결국 패퇴했다. 왜군이 후퇴하면서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아 풀로 덮고 태웠는데, 10리 바깥까지 그 냄새가 났다고 한다.

조선 군사들은 달아나는 왜군을 뒤쫓아 13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조선의 완승이었다.

이튿날 명나라 부총병(副摠兵) 사대수(査大受)가 접전지를 둘러보고 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권율이 행주산성 직후 파주의 대흥산성(大興山城)으로 옮겨 진지를 구축하자 왜군이 침입해 오다

권율이 주둔한 것을 알고 싸우지도 않고 모두 물러났다. 이것이 행주대첩의 역사다,

권율이 한양 서쪽에서 왜군을 물리쳐 보급로를 차단하고, 명나라의 사대수 등이 한양 용산 쪽의

왜군 보급기지를 공격해 군량미를 불태우는 등 조선과 명나라의 반격이 거세지자, 왜군은 휴전을 제의한다.

당시 왜군 진영에서는 전염병도 나돌고 있었다. 명나라와 조선이 휴전 제의를 받아들이자,

왜군은 1593년 4월에 한양을 떠나 경상도 해안 지역으로 물러났다.

이로부터 3년이 넘도록 명나라와 일본은 협상을 벌였다. 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왕으로

봉하고, 조공을 바치는 것을 허락한다는 조건으로. 이에 일본은 조선의 8도 가운데 4도를 할양하고,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으며,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들일 것 등을 요구한다. 하지만 일본의 요구 조건이 명나라는 물론

조선으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어서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 다시 2차 침입을 했으나 육지에서는 권율,·이시언의 조명

연합군에 패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하여 7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이 끝이 났다. 이것이 임진왜란의 역사다,

덕양산 정상에 우뚝 서 있는 행주대첩탑,

이제는 대첩탑 뒤 행주산성 토성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이곳부터 토성은 이어저 있지만

현재는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土城 은 말 그대로 흙으로 성을 쌓은 것이다,

흙으로 언덕을 만들어 비탈이 지게해서 적이 쉽게 접근 할수 없도록 만든 것을 토성이라 했다, 

아마 요즘으로 치면 물이 넘치지 않도록 쌓은 하천변 제방 정도일 것 같다,

토성 외벽은 최대한 지형을 이용해서 가파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토성 위는 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야 전쟁에 유리하게 이용할수 있기 때문이다, 

德陽山 (덕양산)은 한양 서쪽의 교두보였다,

행주산성 토성 길은 아주 편안한 둘레길로 조금은 긴 이름인 고양행주산성역사누리길 이다,

행주산성 대첩문에서 부터 이곳까지는

아주 편안한길로 이어진다, 요즘 흔히 말하는 무장애 둘레길이다,

토성 위 길은 편안하지만

 토성 아래로 떨어지는 경사도는 생각보다 상당히 높다,

총을 쏘면서 올라오는 왜병들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쏘는 화살을 막을수는

없었을 것 같았다, 행주산성은 그런점에서 적을 맞아 방어를 하기에는 최적의 전략적 위치인 것 같다, 

425년이 흐른 지금의 후손들의 눈으로 보아도 분명하다,

이곳은  土城 門址(토성문지)다, 토성문지란? 행주산성 출입문이 있든 곳으로

학술조사 결과 문터의 서벽아래 문을 세우기 위한 두께 50cm 가량의 통일신라시대 성토층이 확인되였다,

문의 폭은 7m 가량이였어며, 지면 아래서 확인된 생토 암반을 파고 들어간 배수로는 산성의

자연배수로 역활도 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일대는 행주대첩 전투지였든 곳이다,

이곳은 행주산성의 주 출입구(성문)가 있든 곳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든 지역이다,

행주산성의 토성중 현재까지 복원된 구간중 가장 낮은 곳에 해당하며 산성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가장 완경사를 이루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권율장군의 조방장 조경이 목책을 쌓아 행주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였어며

전투경험이 풍부한 승군등이 이 부근에 배치되여 치열한 전투 후 대승을 거둔 곳으로 여겨 진다, 전략적인

위치상 이군과 적군사이에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되였을 것으로 추정되여 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