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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평화누리길 1코스,(염하강철책길) 김포대명항 ~ 문수산성입구(2016.09.19) 본문

2017년 平和누리길/평화누리길 결산

평화누리길 1코스,(염하강철책길) 김포대명항 ~ 문수산성입구(2016.09.19)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11. 15. 20:57


이 日記는 평화누리길, 2차 답사때인 2016년 9월 부터

 2017년 4월까지의 기록으로 매 구간별로 여러편으로 나누어 기록되여있기 때문에

구간별로 1편씩으로 함축해서 재 구성한 것이다,

 평화누리길은 우리 국토의 최북단 길이다, 물론 시내길도 있고

마을길도 있지만 김포대명항에서 부터 연천 신탄리역까지 이어진다, 평화누리길은 군 경계철책을

따라 걷는 최북단의 길로 분단의 아픔을 평화로 승화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관리처는 경기도 관광공사로 해당 시,군의 협조를받아 운영하고 있어며 

김포 대명항에서 부터 시작하는 평화누리길은 강원도 경계인 역고드름굴 까지는 195km 나 되는 먼 길이다,

그러나 누구나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걸을수 있도록 각종 자료와 시설물들이 잘 설치되여

있기 때문에 분단의 현장을 보면서 평화를 생각하는 안보의 길이다,

평화누리길이 시작되는 1코스 대명항 염하강 철책길 아치문으로 들어간다,

철책사이로 보이는 염하강 건너 강화도가 보인다, 이곳에 설치되여 있는 군 경계철책은 이곳에서

시작되는게 아니고 경기도 끝 지역에서 부터 설치되여 해안을 따라 올라 온다,  그리고

한강을 지나 임진강으로 남과 북을 가로 지르는 분단의 경계가 된다,

나는 2015년에 이곳 대명항에서 연천신탄리역까지 약 210km 의 평화누리길을 완주 했었다,

그때의 기록도 블로그에 구간별로 모두 정리되여 있다, 오늘 2016년 9월 19일 다시 평화 누리길 1코스를 걷는다,

가능하면 계절별로 이 길을 다시 한번 돌아보려는 생각 때문이다, 작년 여름 북에서 핵실험을 했든 날파주구간을 걷고있었다,

이제 다시 이길을 걷는 이유는? 평화누리길은 관광의 길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며

걷는 아픔의 길이자 안보의 길이기 때문이다,

1년전 7월 그날은 태풍이 오는날로 예보되여 있는 날이여서 비가 많이 내렸다,

그래서 그날의 사진은 비를 흠벅맞고 찍어야 했기때문에 다소 엉성했다, 오늘은 날씨도 맑고 좋어니

평화누리길 1코스 구석구석을 사진을 찍을수 있는 여유있는 기회이기도 한 날이다,

이곳은 덕포진 쉼터다, 평화누리길을 들어서면서 첫번째 쉼터,

앙증맞은 의자 모습이 재밋다,

덕포진 가 포대다,  강화만을 거처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인 손돌목에

천혜의 지형을 이용해 설치한 조선시대의 군영 덕퍼진은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때 서구 열강과 치열하게 싸웠든

격전지로 역사적 가치와 유뮬사적 의의를 가진 곳으로 포대는 이곳에서 손돌목까지 이어진다,,

덕포진 가 포대에서 나 포대로 넘어가는 언덕길

그리고 나 포대다,

나 포대를 지나와서 돌아보면 이렇게 자리하고 있다,

덕포진 포대는 가 포대, 나 포대, 다 포대로 3곳에 포대진지가 있다,

덕포진 포대진지가 끝나는 지점에 덕포진 파수청터가 나온다,

이곳 파수청터는 돈대와 포대의 중심부에 있어며 포를 쏠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했든 장소와

군사를 지휘하든 장대였다고 해설이 되여 있다,

파수청터 에서 보이는 선돌묘가 있는 언덕

손돌묘다, 손돌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을 할때

뱃길을 잡은 뱃사공인데 험한 물길에 불안을 느낀 왕이 그의 목을 베였는데 손돌은 죽음에 직면 하면서도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띠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한 왕은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지낸후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선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손돌묘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았을때 왼쪽으로 보이는 강이 손돌목이다,

손돌목은 안면도 염창동과 함께 난파 위험지역으로 꼽히며 물살이 빠른 곳이다, 태조 4년 1395년

조운선 16척, 태조 3년 1403년, 30척, 태종14년 1414년 60척이 침몰한 기록이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산이 지금 가고있는 곳 문수산성 이 있는 문수산다,

오늘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 철책길은 저곳 문수산 문수산성 남문에서 끝이난다,

선돌묘에서 돌아 본 파수청, 지금은 사진에 있는 저 건물도 헐어지고 없다,

아마 복구가 잘못되여 헐어버린 것 같았다, 손돌묘 앞은 덕포진 돈대터다, 돈대는 적의 침입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해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곳에 보루를 만들고 화포를 비치한 소규모 방어시설이다,

덕포진은 조선시대 해안방어를 위해 설치되였든 진영으로 처음 설치된 시기는

선조때(재위 1567~1608)로 추정된다,

덕포진의 위치는 서해에서 강화만을 거처 수도 한성으로 침공하려는

외적을 방어할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1866년 병인양요때는 프랑스 함대, 1871년 신미양요때는

미국함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가 이곳 이다,

손몰목에서 부래도 방향으로 간다, 이 길은 거의 철책을 따라가는 길이다,

강화만으로 칩입하는 적이 육지로 들어오는 길목이기 때문에 군 경계가 아주 철저한 곳이기도 하다,

포장도로는 직진으로 가지만 평화누리 길은 철책 옆으로 들어간다,

철책 사이로 보아는 부래도 앛 덕포나루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 늘어서 있는게 보인다, 짱둥어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덕포나루 앞에 보이는 섬이 부래도다,

철책사이로 보이든 해안옆 철책길을 따라가서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서면

조금전에 철책 사이로 보았든 덕포나루다,

덕포나루로 들어가는 입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래도 기록이 등장하며

해동지도에서는 동진현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섬으로 표기되여 있다, 항무이도 라고도 불렸어며 통진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현의 남쪽 23리 지점에 위치한 항무이도는 둘레가 4리 라고 기록되여 있는데 이것이 부래도 에 대한 설명에 해당한다,

강화와 통진사이로 흐르는 염하를 따라 한강물에 떠내려 왔다고 해서 부래도라 부른다,  섬안 산에는 성터도 남아 있어며

1866년 병인양요에 양현수 장군이 덕포진에서 염하를 도하할때 강화의 관성진으로 상륙하든 전초기지 였다,

부래도 입구 덕포나루를 지나

100m 정도 더가면 이렇게 부래도 쉼터가 있다, 두번째 쉼터다,

쉼터에서 잠시 물 한잔 한후 계속해서 이어지는

철책길을 따라간다,

해안에 바짝 붙어서 있는 논(畓)

작은 논이지만 벼가 영글어서 금방이라도 낫알이 떨어질 것만 같은 모습이다,

해풍을 맞어면서 영글은 쌀맜은 어떨까?

철책길의 단조로움을 잋게해주는 쇄암리 부석바위 앞 흔들다리 다,

이곳은 쇄암리다, 김포군지 지명 유래에 따르면 마을 서쪽 염하수로와 접한 해안은 암벽인데 

잘 부스러지는 돌로 되여 있어 그 뜻으로 쇄암리라고 부르게 되였어며 고유지명은

바삭바위 바석바위로도 불렸다,

원래 전래의 지명은 우마니로 이 마을 산 모양이 소와 말이 누워있는

모양이라서 그런 이름이 되였다고 하는데 우마니가 움안이 즉 움안마을의 뜻이 아닌가  한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있어 움안에 사는 형국이라서 그렇게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염하강과 강화도가 멋스럽게 다가오는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염하강 철책을 따라 걷는 이 길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처름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강 건너편 강화에 있는 광성보가 보인다, 광성보는 1871년 신미양요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미해병 450명으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극동함대의 함포 지원사격을 받으며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끝까지 싸워 중군장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을 비롯한 49인의 장사와 200여명의 군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된 누각과 성곽 등은 1976년에 복원되었고. 현재 광성보에는 어재연등 장수등의 용맹을 기린

쌍충비각과 무명 병사들의 무훈을 기린 무명 용사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 덕포진과 강화도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염하강은

150년전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의 처절했든 전투에서 어재연장군을 비롯한 250여 명의

이름 없는 우리 선조들께서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적의 권유도 뿌리치고 대포와 총으로 무장한 적들에 

창칼로 맞서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열하게 산화한 이 땅의 역사를 알고는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이곳에서도 무장 해제를 해야하는 이상한 세상이 되였어니

안보의 두손을 모두 놓아버린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150년전 그때와 지금이 다를바 하나도 없는데

평화는 힘으로 지키는 것이지 말로 지켜지지 않는 것임을 역사가 말해주는데 ~ 

염하강 철책길,

길 이름에서 느끼는 삭막함이 아니라 보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길이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걷는 즐거움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보면 두려움이 앞선다,

염하강 철책길은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쇄암리 전망대 쉼터가 나온다,

이미 두곳의 쉼터를 지나 왔지만 이곳은 제대로 잘 만든 공원 쉼터다,

이곳 쇄암리 쉼터는 평화누리길 1코스 절반 정도의 위치에 있다, 아랫층은 화장실이며

옆에는 정자도 있고 화장실 옥상은 전망대다,

쉼터 옥상 쇄암리 전망대에서 보이는

염하강과 강화도 일대

김포는 지명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강과 조강, 염하강으로 둘러 쌓여 있어

포구가 발달한 곳이다, 염하강에는 원머루나루, 바삭바위나루, 덕포나루, 대명나루, 성동나루, 등이 있어나

둑과 철책으로 원형이 훼손되였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구, 청군, 몽골,

프랑스군, 미군, 등이 침략했든 장소로 625 까지 끊임 없는 전쟁터 였다,

쇄암리전망대 입구 버스 정류장이다,

1년전에는 없었는데 마을버스가 이곳까지 들어오는 모양이다, 물론 자주 다니지는 않겠지만

왼쪽은 염하강과 철책, 오른쪽에는 넓은 농토에 가을이 익어간다,

이곳은 평화누리길 1코스 4번째 쉼터인 고양리 쉼터다,

이 쉼터는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있든 것을 쉼터라는 이름만 붙여 놓은것

같았어니 여하튼 쉼터다,

염하강 철책길을 따라서 간다,

평화누리길 1코스는 100% 철책선 옆이 길이다,

가는길 왼쪽은 염하강

오른쪽은 김포씨사이드 컨트리 클럽 골프장이다,

길은 골프장 정문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작은 다리를건너가는 두 갈래길이다, 이곳에서도 해안철책길로 따라간다,

철책은 적의 칩입을 막는 철조망 인데

보이는 것 만으로는 그냥 자연에 녹아든 그림인 것 같다,

그리고 철책선을 따라 걷는 사람들도 그 속에 녹아든다,

이 구간에서는 특이하게도 이런 다리가 놓여저 있다, 

군 경계 근무용으로 원래부터 있었든 것이 아니라 평화누리길을 만들면서 새로 만든 것 같은 인도교다,

길은 이제 포내리로 들어간다,

여태까지는 산 비탈을 따라 왔다면 포내리는 평야다,

포내리 배수 펌프장도 지나간다,

배수 펌프장 옆에는  생태 공원도 만들어저 있다,

앞에 보이는 산,

저산이 문수산이며 산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이 문수산성이다,

이곳부터는 철책과 들판 이 외에는 볼거리도 없는 직선 세멘트포장 길을 가야 한다,

대명항에서 부터 이어지든 그림 처름 아름다운 길은 이제 끝이다,

포내리 벌판을 지나고, 포내양수장도 지나서 포내천을 건너는 다리를 건너가면 강화교다,

지금은 강화대교가 주 통행로지만 예전에는 이 강화교가 강화도와 육지인 김포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였다,

지금은 강화도로 드나드는 자전거 길이자 인도교 다,

길은 강화대교 아래로 들어간다,

강화대교 아래를 지나가서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문수산성 남문이 있다, 문수산성은 서울의 첫 번째 관문이면서 주,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지만 분단의 최전방이어서 북한과 지척에 대치하고 있는 곳 이기도 하다

문수산성 남문은 염하를 건너가고 건너오는 사람들이 통행했던 문으로 강화도의 관문 역할을 했든 문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평지를 놔두고 궂이 언덕을 오르내렸어야 했는지? 그 이유는 알수 없어나

강화도와 한양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행로였든 곳이 문수산성 남문이다,

이곳에서 염하강 철책길인 평화누리길 1코스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평화누리길 2코스인 조강철책길이 시작된다, 김포시 관활에는 3개 코스의 평화누리길이 있다,

첫번째인 1코스는 염하강철책길이고, 2코스는 문수산성을 넘어 애기봉까지 가는 조강철책길, 3코스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한강철책길로 구성되여 있다, 결국 김포시는 염하강,과 조강, 그리고 한강에 둘러쌓인

도시지만 지금은 아라뱃길까지 개발되여 물의 도시가 되였다,

사진영상으로 재구성 하면서 의도적으로 음악을 삽입하지 않았다,

음악이 들어가면 좋기는 하겠지만 어떤 음악도 이 길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였다

평화누리길 자료와는 별 반 차이가 없다,

조금의 차이는 공식적인 거리와 내가 걸은 길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고

많이쉬고 많이 즐기면 시간은 더 걸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