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예산 가야산(2019년 3월 10일) 본문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가야산으로
가야산 등로가 아니라 백제의 미소길 안내도 와>
오늘 우리가 올라야 하는 가야봉은 3,2km에 100분이 걸린다는 안내도 있다,
짧은 거리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는 난이도가 높다는 뜻일테니 오름이 빡센모양이다,
좁은 길이지만 포장 도로를 따라간다,
가야산 등로는 남연군 묘지 앞으로 가야한다, 남연군 묘는 조선조 말 야심가였던 흥선대원군의 야망이
묻힌 곳이라 보면 된다, 당시에는 안동 김씨 세도가가 정권을 좌지우지하고 종친들은 조금이라도 잘못 보이면 역모로 몰려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가기 가 예사이던 시절이라 흥선군은 한편으로는 파락호로, 또 한편으로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으니 그 오랜 계획을 실천에 옮긴 교두보가 바로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곳으로 옮긴 일이다. 그 옮긴 장소와 옮기던 내력이 모두 숱한 뒷얘기로 남았으니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소상히 전하고, 조금씩 다른 점이 있지만 예산의 향토사가 박흥식 씨의 『예산의 얼』에도 전한다,
대원군은 가야사 금탑자리가 2대 천자가 나올 자리라 하여 절을 폐하고 남연군 묘를 썼다.
1822년에 남연군이 돌아가고 난 뒤 어느 날 한 지관이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 주었다, 지관은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했다. 흥선군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야산을 택했다. 그러나 정작 가야산에 지관이 가리키는 자리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명당이라는 자리에는 금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 기슭으로 옮겼다. 그 땅은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로 그 후손에게서 자리를 빌려서 했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리길을 종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었으므로
상여는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옮겼는데, 맨 마지막에 운구를 한 나분들(남은들)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다. 이 상여는 지금 남은들 마을에 보존되어 있다.
두번째 일은 가야사를 폐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중들을 쫓아내고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하고, 충청감사에게 중국 명품 단계벼루를 선사하여 가야사 중들을
쫓아내고 마곡사의 중들을 불러다가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한다. 절집을 폐허로 만든 뒤에는 탑을 헐어 내는 일이 남았다.
탑을 헐기 전날 밤 잠을 자던 흥선군의 네 형제는 똑같은 꿈을 꾸었다. 꿈에 수염이 흰 노인이 나와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만약 일을 벌인다면 네 형제가 폭사하리라 고 하는 것이다.
깜짝 놀라 깬 형들이 꿈 이야기를 하니 모두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흥선군은 그렇다면
이곳은 진실로 명당자리 라며 운명을 어찌 탑신이 관장하겠느냐고 하여 형들을 설득했다. 마침내 탑을 부수자
바닥에 바위가 드러났는데 도끼가 튀었다. 그때 흥선군이 나라고 왜 왕의 아비가 되지 말란 말이냐 하고
하늘에 소리친 뒤 도끼를 내리치자 바위가 깨졌다고 한다.
그 다음해인 1845년에야 뒷산에 임시로 모셨던 곳에서 묘를 옮겼다. 뒷날 도굴의
일을 염려하여 철 수만 근을 붓고 강회로 비비고 봉분을 했다. 임시묘가 있던 곳은 구광지(舊壙地)라고
하여 지금도 움푹 패어 있다.
경기도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리길을 맨 마지막에 운구를 한
나분들(남은들) 사람들에게 상여를 기증했다는 이 상여는 지금 남은들 마을에 이렇게 보존되어 있다.
- 여기까지의 남연군 묘 이야기는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고했다, -
가야산은 일반적으로 석문봉을 지나서 가야봉으로 올라야 하지만
오늘 우리는 시산제 일정이 있어 조금은 서둘러서 하산을 해야 하므로 가야봉으로 바로 올라간다,
산 정상부에 철탑이 보이는 곳 저곳이 가야봉이다,
조금 더 가깝게 본 가야봉,
오름길은 그냥 산길 다운 평범한 길이다,
가야산 등산 지도 가 안내되여 있었어나 역사?가 있는 산이라
그런지 하도 오래 되여 보이지도 않는다,
대신 이정표는 아무런 망 서림없이 선택을 해도
좋을만큼 깔끔하게 정비가 되여 있다,
가야봉은 주차장에서 4km가 채 안되는 비교적 짧은 거리다,
이제 능선으로 가는 조금은 비탈진길을 따라 올라간다,
하늘이 보이면
석문봉에서 가야봉으로 이어지는 가야산 능선이다,
얽히고 삻킨 소나무 한그루
한뿌리에서 자란 가지가 이렇게 많은 나무도 좀처름 보기가 어려운 나무다,
소나무는 이렇게 얽히고 섫킨 나무가 보기 드문일인데 그래서 특이하게 보이나 보다, 바람잘날 없다고 하더니
이제 가야봉으로 올라간다,
가야산은 충청남도 북부지방을 북·남 방향으로 뻗어 있는 소규모 가야산맥에 속하며,
규모는 작지만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을 간직한 명산이다. 가야산의 높이는 678m이고, 주봉인 가야봉을 중심으로
원효봉(元曉峰, 605m), 석문봉(石門峰, 653m), 옥양봉(玉洋峰, 593m) 등의 봉우리가 있다.
덕숭산(德崇山, 495m)과 함께 1973년 3월에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봉 아래 계단으로 올라가는길
조금은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 생김새는 발가락? 같은데
이 바위도 필경 무슨 이름이 붙어 있을 것 같다,
가야봉 정상에 있는 이정표
이곳이 가야봉 정상이다,
덕숭산(德崇山, 495m)과 함께 1973년 3월에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다,
가야산 정상에서 보이는 아랫녁
멀리 서산 A 지구 방조제 일대도 보인다,
석문봉 방향에서 가야봉으로 오는 능선
정상 인증샷 을 끝으로
주차장으로 하산한다,
정상에서 하산길 초입은 데크 계단이다,
생각보다 잘 설치되여 있는 이정표
이곳은 이정표만 따라가면 절대로 등로를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잠시 내려서다가 이런 밧줄이 걸린 내림길에 들어서면
급한 내림길을 내려가야 한다,
짧은거리지만 다소 거칠고 급한 내림길을
밧줄에만 의지해서 내려서면
이런 돌계단길이다,
그리고 잠시 뒤
헬기장으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있다, 길은 계속해서 직진으로 가면
천수답이 였다가
지금은 농를 짓지않아 밭이된 계단식 논배미를 지나게 된다,
이곳까지 내려서면 가야산 등로는 거의 끝이난다,
민가도 보이고
상가리 저수지 위쪽 계곡을 건너는 징금다리도 있다,
상가리 저수지,
이 지독한 겨울 가뭄에도 저수지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다,
상가리 저수지 끝 마지막 이정표,
저수지를 건너가면
남연군 묘이고 저수지 아래로 내려 가면 주차장이다,
맞은편에서 건너다 본 남연군 묘
언덕을 만들어 묘를 조성한 여느 묘들과는 전혀 다름 모습이다,
대원군의 절대적 권력이 느껴지는 그런 묘인듯
상가리저수지에서 수로를 따라 바로 주차장으로 내려 가는길
가야산 정상의 안테나 탑들이 점점 멀어진다,
매화도 아닌것 같았는데 새싹이 나고 한송이 꽃을 피운 나무
벌서 봄이 성큼 다가 와 있는것 같다,
가야산 등로 중 가장 짧은 코스, 6,4km에 3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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