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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華陽九曲,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2019년 9월 2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충청·경상·전라

華陽九曲,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2019년 9월 2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9. 9. 2. 13:51

이곳은 화양구곡 주차장이다,

주차장은 넓은터에 만들어저 있어 주차를 하지못하는 걱정은 안해도 된다,

 

화양구곡은 1975년에 화양동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어며

1984년에 속리산국립공원에 편입된 곳이다.

 

화양계곡은 넓고 깨끗한 암반과 맑은 하천,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울창한 수목이 한 폭의 산수화 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으로 금강산 남쪽에서

으뜸이라 했다, 그래서 화양동 소금강 으로 도 불린다.

 

주차장에서 화양구곡으로 가는

길은 매점 앞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된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화양동

화양계곡에 있는 아홉 개의 골짜기를 보고 구곡(九曲)이라 이름을 붙였다,

 

또한 9개 골짜기의 이름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9개의 계곡에 각각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지는게 지금까지 이어저 오고 있다,

 

화양구곡 중 제1곡은 경천벽(擎天壁)이다, 이어서 제2곡은 운영담(雲影潭),

제3곡은 읍궁암(泣弓巖), 제4곡은 금사담(金沙潭), 제5곡은 첨성대(瞻星臺), 제6곡은 능운대(凌雲臺),

제7곡은 와룡암(臥龍巖), 제8곡은 학소대(鶴巢臺), 제9곡은 파천(巴川)이라는

이름으로 화양구곡을 이룬다,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걷다가

 다리를 건너면서 보이는 계곡에 설치한 보가 있는데

 

이곳이 운영담( 雲影潭)으로 화양구곡 중 제2곡이다, 

주차장 전에있는 1곡인 경천벽에서 약 1.2Km 북쪽이다, 안내판에는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고 해서 운영담 이라 했다, 운영담 앞은 계곡의 맑은 물이 모여

소(沼)를 이루고 있다.

 

운영담 맞은 편에는 상가 가 있다, 

그 중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식당 이름이 운영식당이였다,

 

운영담을 지나 잠시 올라가면

 

우암 송시열(1607 ~ 1689) 선생의 유적지가 보인다,

우암은 조선 후기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으로.

주자의 학설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다,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 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어며. 강상 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 사회 기강을 확립하고자 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적지이자 화양서원이다,

 

유적지로 둘어간다,

중앙에 있는 문은 추양문이며 왼쪽에 증반청 과 오른쪽에는 존사청이 있다,

 

그리고 존사청 앞에는 풍천재가 있다,

 

추양문으로 들어가면서 왼쪽에 보이는 증반청,

 

추양문을 들어서면 돌계단 위 높은 곳에 성공문이 있다,

성공문 아래 오른쪽에는 작은 정자각이 있는데 이는 만동묘정 비각이고 만동묘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은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아홉 칸으로 가파르게 설계되여 있는데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중국 명나라 황제의 은혜에 대한 예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한다,

 

만동묘로 올라가는 계단은 균형을잡고 걷기 힘들 정도로 위태롭게 만들었다.

아래부터 위를향해 계단을 3칸, 5칸, 3칸, 5칸을 오른뒤 맨 위에 황제를 상징하는 9칸 계단을

오르도록 배치했다. 임진왜란으로 망할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살려줬으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의도가 숨어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이 발탁한 인재다.

하지만 최명길의 대척점에 있던 척화파 김상헌처럼 숭명배청(崇明排清) 노선을 걸었다.

성공문 앞 으로 올라와서 내려다 보니 오른쪽에 증반청, 가운데는 추양문,

왼쪽으로는 존사청과, 풍천재가 내려다 보인다,

 

병자호란 이후 1644년 명나라가 멸망했는데도 송시열은 화양구곡( 華陽九曲)의

명당자리인 이곳에 만동묘를 짓도록 했다. 선조때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 숭정제의 위패를 송시열 사후인 1704년 만동묘에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만동묘 내부는 이렇게 단이 설치되여 있었어니 단 위에는 아무 것도

올려저 있지 않았다, 만동묘는 친 명나라, 반 청나라, 주의자였던 송시열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준 명나라 신종 황제와 의종황제의 위패를 모신 곳이 였지만

지금은 명나라 황제의 위패를 보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만동묘 내부 천정 단청은  

제실 답게 지나친 화려함은 보이지 않는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 조종암(朝宗巖)에 선조가 남긴 

만절필동(萬折必東) 네 글자를 송시열이 화양구곡의 첨성대 바위 절벽에 새겼고,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만동묘라고 이름 붙였다. 만절필동은 황하 흐름이 수없이 꺾여도 

결국 동쪽으로 간다는 뜻뿐 아니라 충신의 절개로 의미가 확장됐다. 

 

그리고 이제 성공문을 나가야 한다,

 

 

조금 일찍 성공문을 냐려간 일행들이 아래서 손을 흔들어 준다,

이런 표현도 조금 더 지나고 나면 좋은 추억으로 기억 될 수도 있겠다,

국가의 역사든 개인의 삶이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추양문 앞으로 내려와서 성공문을 올려다본다,

만동묘로 올라가는 계단과 성공문, 만동묘정비각이 꽤나 멋스럽게 배치되여 있다,

만동묘로 올라가는 돌 계단은 경사가 70도를 넘을 정도로 가파르고 계단 폭도 매우좁다,

황제를 모신 사당이니 개처럼 기어서 올라와서 개처럼 기어서 내려가라는 무언의 압력이 느껴진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계단이 하도 가팔라서 하인의 부축을 받고 올라가자 옆에 있던 문지기가

밀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1865년 만동묘를

가장 먼저 철거했다, 이에 반발한 유림이 1875년 다시 세웠다.

 

만동묘 앞, 화양서원 묘정비가 있다,

광복후 화양서원 터에서 서원의 건립 취지와 배향한 인물에 대한

기록을 담은 묘정비가 발견되었는데, 이 비는 1716년(숙종 42)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윤봉구(尹鳳九)가 지었다고 적혀있다,

 

묘정비는 서원 건물이 헐릴 때 매몰되었던 것으로, 후일 다시 만든 것을 포함해서

모두 4개가 발견되였는데, 화양서원 자리에는 현대에 들어 성공문, 외삼문, 숭삼문, 중반청, 존사청,

풍천재, 비각, 사당 등의 건물이 복원되였고 1999년에 국가사적 제417호로 지정되였다,

 

묘정비 뒤는 화양계곡이다, 화양서원 앞 계곡에는

화양구곡 중 3곡인 읍궁암이 있다, 읍궁암(泣弓巖)은 희고 둥글고 넓적한 바위다,

 

우암 송시열은 이 바위에서 자신의 제자였던 효종이 죽은후,

매일 새벽마다 이 바위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고해서 후일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읍궁암이라 불렀다.

 

예전에는 화양서원이였고

지금은 우암 송시열의 유적지가 되여있는 곳을 지나간다,

 

서원을 지나서 암서재 방향으로 가는길 싱그러움에 눈이부시다,

이제 곧 이곳 숲길에 단풍이 들면 또다른 눈 호강을 시켜줄 것 같은 그런 길이다,

 

그리고 또 보이는 상가, 국립공원 내 지역이지만

오래전부터 있었든 마을이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부터 내려오는

이곳 주민들의 삶의 터전 이기는 해도 조금은 낮설다,

 

상가 앞 개울은 화양계곡 제 4곡인 금사담(金沙潭) 다,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고 해서 금사담이이라 불리워지는 곳이다,

그리고 금사담 물가, 큰 바위 위에 보이는 정자는?

 

1666년 송시열이 암서재(巖棲齋)라는 서재를 지어놓고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든 곳이다,

 

암서재는 대지 약 65㎡(약 20평)정도에 목조기와로 지였어며 2칸은 방이고 1칸은 마루 구조다,

 방 안에는 현판 5점이 걸려있다. 앞에는 암반 사이에 일각문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말에 후손들이 수리를했고,

1970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암서재기(岩棲齋記)에 우암선생어병오년간축정사어계남(尤庵先生於丙午年間築精舍於溪南)

이라고 쓰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666년(현종 7) 8월 암서재를 짓고 이곳에 거주했음을 알수 있다,

 

암서재가 건너 다 보이는 동원식당,

 

식당 앞에 고목 한그루가 보인다,

 나무의 수령은 알수 없지만, 보이는 것 만으로도 오랜세월

풍파를 이겨낸 듯한 연륜이 배여 있는 것 같다,

 

암서재가 있는 금사담을 지나서 이제 5곡으로 올라간다,

 

가는길 오른쪽에

도명산으로 들어가는 등로가 보이지만 우리는 오늘 화양구곡을

찾아 걷는 길이다, 그러니 도명산은 패스다,

 

그리고 화양삼교를 건너간다,

 

화양삼(3)교에서 보는 화양계곡

 

화양 삼교를 건너가면 첨성대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맞은편 도명산 방향으로

 

화양 제5곡인 첨성대(瞻星臺)가 있다, 도명산 기슭에 우뚝 치솟러 경치도 좋지만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고 그 아래 비례부동 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어 첨성대라 했다.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다. 첨성대는 별자리를 관측하는 이름인데

누가 저 높은 바위에 올라가서 별저리를 관측했을까?

 

화양구곡 주차장에서 부터 시작한 화양구곡 5곡 까지의 일기는 여기까지다,

다음장에서는 6곡인 능운대 부터의 일기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