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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2020년 5월의 남한산성(5월 3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인천·경기·강원

2020년 5월의 남한산성(5월 3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0. 5. 5. 06:55

옹성 옆으로 걷는다,

옹성 성곽은 그리 높지 않아 성 밖에서 옹성내부가 모두 들여다 보인다,

옹성 시작 지점인 남한산성 성곽과 이어지는 곳인

남한산성 암문이 보인다,

옹성내로 들어와서 행궁 옆 들어온 길 쪽으로 돌아본다,

나즈막한 언덕이 보인다,

성곽암문 앞 연주봉옹성이라는 안내가 보인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여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보이는 이 문이 남한산성 제5암문이자 연주봉옹성암문 이다,

암문(暗門)이란?, 성곽에 문루를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이다, 주로 일반인이나

적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만든 숨겨진 문이라 하여 暗門이다,

전시에 적이 모르도록 비밀스럽게 물자나 군사의 이동을

용이하게 할수 있도록 만든 문이다

남한산성 제5암문(연주봉옹성암문)에서 북문방향으로 조금 내려가서

올려다 보면 남한산성 성곽과 옹성이 맞물려 설치되여 있는게 잘 보인다, 더욱이 남한산성에는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소나무가 줄지여있는 곳이니 성곽과 소나무 그리고 그 속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그림처름 아름답게 보인다,

이제 다시 이곳 연주봉옹성에서 우익문으로 간다,

우익문은 남한산성 서문이다,

우익문과 옹성문 사이 제일 높은 곳

이곳이 연주봉이다,

연주봉에서 내려다 보이는 하남지역과 잠실,

사진이 흐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잠실롯데타워도 보인다, 롯데타워가 있는

지금의 잠실일대는 조선시대 삼전도로, 삼전도는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주던 나루였다

지금의 석촌호수와 탄천사이 송파구 삼전동일대가 삼전도 나루다,

삼전도와 남한산성, 이곳에서는 병자호란의 아픈역사를 잊을수없다,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침략한다, 조선은 이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왕은 수구문水溝門을 나가 南漢山城으로 피신을한다, 남한산성에서 40여일을 치열하게

버틴 조선군은 식량이 바닥나고 병사들이 얼어죽을 정도로 추위가 매서웠다, 이에 인조는

1637년 1월 26일 항복문서를 보내고 30일 삼전도에서 조선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항복의 당사자가 된다, 

연주봉에서 우익문이 내려다 보인다, 우익문은 남한산성내 서쪽에있는

문이라 西門이라고도 불린다, 1637년 1월 30일 유난히도 추웠든 겨울날 인조는 삼정승과 판사,

승지와 사관만을 거느리고 바로 이 문을 나가서 삼전도를 향해 걸어갔다. 군사를 도열시켜 놓고 장막에서

기다리던 청 태종 홍타이지는 인조 일행이 도착하자, 그와 함께 배천의식을했다. 청의 입장에서는 조선이 한 집안이

되었다고 하늘에 고하는 의식이었다. 배천의식을 마치고 홍타이지가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단 아래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한번 절할때마다 머리를 세번 땅에 찧는의식)를 했다,

인조가 우익문으로 나간것은 청 태종이 남한산성의 정문인 남문으로 가마를타고

나와서는 안되고 걸어서 와야 한다고 했기때문에 행궁과 가까운 곳에있는 이 문으로 나가 험한 산길을

걸어서 삼전도로 항복을 하려갔다, 우익문은 이렇게 우리민족에게 뼈아픈 역사를 가진 문이다,

우익문 앞 이정표는 수어장대가 약 600여m 정도의 거리에 있다고 알려준다,

수어장대 守禦將臺 는 남한산성 5개의 장대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기도 하지만

성 안 건물중에서는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기도하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 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했고 영조 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2층으로 다시 짓고 守禦將臺 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守禦將臺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달려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수어장대로 가지는 않는다,

우익문(서문)을 둘러 보았어니 이제 다시

연주봉 옹성문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가는 길은 전승문(북문)이기 때문이다,

북문北門이 전승문 全勝門으로 불리는 것은

모든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 이라 이름을 붙였다,

옹성문에서 북문방향으로 가는 길은 다소 가파른 내림길이지만

많은사람들이 다니는 성곽길이라서 나무계단으로 불편함이 없도록 해놓았다,

더욱이 남한산성의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남한산성은 1985년에 지표조사가 실시된 이래, 1998년부터

8차례에 걸쳐 행궁터, 인화관터, 일부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를 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것은 주거지 2곳과 저장구덩이 8곳 등은 확인되였어나 성곽의

흔적은 발견되지않아 백제시대에 쌓은 성은 아닌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방어를 위해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등이

확인되였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673년(문무왕 1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日長城)을

쌓았는데, 성 둘레는 3,460보였다고 기록되어있어 신라시대 옜성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주장성이 곧 남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은 당시에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었다.

2005년에 북문과 동장대 사이의 제4암문과 수구(水口)터 주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행궁터 발굴 조사에서는

대규모 건물터가 확인되어, 주장성 당시 성 안에 무기고(武器庫)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하였음도 밝혀졌다.

남한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묘지명(李世華墓誌銘)에

고려사(高麗史)에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항전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산성안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광주성은 바로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둘레가 3,993보이고 성 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 7곳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성 안의 논밭이 124결(結)이나 된다고 했다. 이 기록 역시 신라때 축성된 주장성, 

일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옹성에서 북문으로 가는길

성 城 너머로 하남시 일대와 한강 건너 구리시 까지도 보인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후금(後金)의 위협과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뒤

인조 2년(1624)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李曙,1580∼1637)에게

산성 축성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했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했다.

남한지(南漢志)에는 성벽의 안쪽둘레는 6,290보로 17리 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 5곳의 옹성과 16곳의 암문,

125곳의 군포, 4곳의 장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이 문이 전승문(全勝門)이다,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기습공격을

감행할 때 사용하던 문이다. 하지만 전승문인 북문에도 쓰라린 패전의 경험이있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과 맞붙었으나

전멸했다. 법화골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는 병자 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 규모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된다.

이후 북문의 이름을 패전의 경험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전승문(戰勝門)이라 했다. 선조때 기록을 보면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다.

북문에서 산성내로 들어오면 행궁터다,

행궁지 앞 로타리에서는 성남 산성역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84-29 일대는 남한행궁지다,

지금의 남한산성호텔 자리와 그 뒤의 공터를 모두 포함하는 약 1만평 규모다. 

행궁터는 산성호텔 야외휴게실 입구에 있는 4각 석재기둥 2개와 그 뒤에 남아있는 1동분의 

주춧돌과 여기저기 남아있는 기와편, 돌축대등이 있고, 상 궐터로 보이는 곳에도

주춧돌이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고도 했어며, 

1624년(인조 2) 9월에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건립했다,

주, * 남한산성에 관한 역사적인 내용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남한산성편을 참고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