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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현세의 평안과 내세의 극락왕생을 빌었든 수종사(2020년 2월 15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인천·경기·강원

현세의 평안과 내세의 극락왕생을 빌었든 수종사(2020년 2월 15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0. 3. 16. 16:25

운길산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

운길산 8부 능선에 있는 수종사로 들어간다

수종사 창건연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1459년 세조 5년에 왕명으로 중창했다,

금강산에 다녀오든 세조는 이두수(현재의 양수리)에서 1박을 하게되고 한밤중에 종소리가 들려서

다음날 산으로 올라갔는데

한곳의 바위굴속에서 16나한을 발견하고 굴속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암벽을 울려 마치 종소리처름 들리는 것임을 알고 여기에 절을 짓게하고

물소리가 종소리 처름 울린다고 해서 수종사(水鐘寺)라했다,

이때 5층 돌계단을 쌓아 터를딱고 절을지어

16나한을 봉안하는 한편 5층 석탑을 세우게 한 절이라고 알려진다,

해탈문으로 들어간다, 解脫門(해탈문)?은 말 그대로

모든 괴로움과 헛된 생각에서 벗어나 아무 거리김이 없는 진리의 깨달음을 얻는 문으로,

이 문은 精進(정진)을 촉진시키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정진이란? 모든 잡념을 버리고

불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쓴다는 뜻이다,

해탈문을 들어가니

아직 빛도 바래지 않은 부처상이 조각되여 있는게 보인다,

최근에 불사로 조성한 부처상인 모양이다,

그 옆 왼쪽 언덕에 응진전이 있다, 응진전이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로 모시고,

다시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끝부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한다.

때로는 아난과 가섭 대신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羯羅菩薩)을 안치하여

삼세불이 이루어지게 배열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함께 안치되는 16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많은 아라한(阿羅漢)들 중 말세(末世)의 중생에게 그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正法)으로

인도하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성자들이다,

이들이 일찍이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크게 신봉되어 나한신앙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사찰 중요 당우의 하나인 응진전에 봉안된 것이다. 후불탱화(後佛幀畫)로는

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16나한도가 많이 봉안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보물 제730호로 지정된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불영사(佛影寺) 응진전이다.

응진전 위 산령각이 있다,

수종사 산신각은 산령각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산령각은?

산신을 모시는 각으로 불교와 토속신앙의 산신각과 같다,

산신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수종사는

산령각 바로 아래 선불장과 삼정헌이 있는게 보인다,

왼쪽 끝에 있는

큰 건물이 수종사 대웅전이다,

내려다 보이는 두물머리, 바로 앞 한강은 북한강이고

두번째 보이는 강은 남한강이며 오른쪽으로 길게 보이는 강은 경안천이다,

삼정헌(三鼎軒)앞으로 내려왔다,/p>

삼정헌은 수종사 다실이다, 누구나 들어가서 한강을 내려다 보며 차를 마실수 있다,

찻상에는 녹차와 다기(茶器)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이곳에서 봉사하는 보살은 차를 마시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차를 우려주기도한다,

선불장 건물이다,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는 알지못한다,

선불장 옆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大雄)은 마하비라(mahāvīra)를 번역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에 대한 많은 존칭 가운데 하나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사찰의 중심 건물이다.

보통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다.

문수는 지혜를, 보현은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행원(行願)을 상징하는데,

본존불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을 협시보살(脇侍菩薩)이라 한다.

대웅전(大雄殿)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할때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고, 다시 각각의 좌우에 보좌하는 보살을 모신다.

수종사 대웅보전 현판아래 양 옆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 있다, 무슨 뜻이 있는지?는 알수없어니 그저 구경만한다,

대웅보전의 여러 불상 중에 무슨 부처인지는 인계(印契)로 구별하는데,

인계는 무드라(mudrā)를 번역한것이다. 인상(印相) 수인(手印)이라고도 한다.

이는 부처의 깨달음 또는 서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손 모양을 말한다.

수종사에는 태종의 다섯 번째 딸 정혜옹주(?~1424)의 부도가 있다.

부도 옥개석의 낙수면에 太宗太后/貞惠翁主/舍利造塔/施主文化柳氏/錦城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日

(태종태후/정혜옹주/사리조탑/시주문화류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시월일)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말을 풀어보면 태종의 첫번째 후궁인 의빈권씨(1384~1446)가 정혜옹주의 사리탑을 만들었는데

문화류씨와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1426~1457)이 시주했으며

정통 4년 기미년(1439년) 10월에 세웠다는 기록이다.

수종사 부도는

유형문화재 제157호다,

대웅보전 옆에있는 정혜옹주의 부도와 함께 팔각오층석탑과, 작은 삼층석탑 등 석탑 3형제가 서 있다.

1957년 팔각오층석탑을 수리할 때 탑신과 옥개석 등에서 19구의 불상이 나왔고 1970년 이전할 때는 2층 3층과

옥개석에서 12구의 불상이 더 나왔다. 함께 발견된 묵서를 통해 성종과 인조 때 중수된 것임을 알려준다,

조선시대 석탑 중, 유일한 팔각오층석탑으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 보물 1808호다,

팔각오층석탑 기단 중대석에서 발견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하단부의 명문을 통해

제작연대와 발원자인 인목대비가 확인됐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로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광해군

집권 후 폐비가 되어 서궁에 갇혔다. 그리고 그녀의 소생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묵계(默契)속에 살해됐다.

인륜에 어긋난 폐모살제(廢母殺弟)는 인조반정의 명분을 제공했다. 광해군이 폐주로 전락하면서 인목대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지만 죽은 아들 영창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인목대비는 수종사를 찾을

때마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1628년(인조 6년)에 봉안된 불상들은 성인(性仁)이라는 조각승이 제작했다.

불상들을 눈여겨보면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려 움츠린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목이 짧고 수인(手印)을 맺은 양손도 매우 작다. 옹색하고 초라하고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불교미술

전문가들은 인목대비의 가슴에 묻힌 영창대군의 모습이 불상에 반영된 것 같다고 해석한다.

인목대비가 조성한 불상군 ↓ [사진=불교중앙박물관]

수종사 범종각, 오른쪽 건물이 범종각이다,

종각이 2층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는 범종루라 하고, 불전사물 가운데 범종만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범종각이라고 한다. 이곳에 비치되는 사물은 모두 부처님에게 예배드릴 때 사용되는

불구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새벽 예불과 사시공양(巳時供養), 저녁예불 때 사용된다.

 

이들은 소리로써 불음(佛音)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하고, 홍고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내 보낸다는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이 사물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규모가 작은 사찰이라도 범종만은 반드시 비치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범종각은

산문(山門)을 들어서서 좌측 편에 위치하는 것이 통례다.

수종사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서 있다.

1458년(세조4년) 수종사를 중창하면서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고 수종사 사적기에

기록돼있는 것으로 보면. 이 은행나무는 2020년 기준으로 562살이다. 수종사를 오간 왕실의 여인들과

조선의 명사들, 그리고 그시절의 승려와 민초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이 은행나무는

562년의 모진 세월을 견뎌내고 오늘도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다,

조선시대 운길산 일대 토지의 상당 부분은 수종사 둔전(屯田)이었다.

수종사는 둔전을 경작해 남한산성의 군사들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남양주에서 생산한 식량은

한강과 경안천을 통해 남한산성에서 가까운 상번천까지 배로 실어날랐다.

 

둔전이란?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다.

군인이 직접 경작하는 경우와 농민에게 경작시켜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어 가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광해군 인조 연간의 문신 임숙영은

수종사 승려들이 둔전에서 나온 소출로 돈놀이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었다

조선시대 수종사 주지는 안팎의 살림을 잘 꾸리는

사판승(事判僧) 출신이 많았던 탓인지? 오래된 절 치고는 큰 스님의 부도가 적다.

조선시대 수종사는 왕실 여인들의 원찰이었다.

왕에따라 부침하는 궁궐의 여인들은 한양에서 가까운 수종사에 불상을 시주하면서

발원문(發願文)을 불상 안에 넣고 현세의 평안과 내세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운길산 팔부능선에 자리잡은 수종사(水鐘寺)는 검단산까지 전망이 탁 트였다.

최고의 경치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경치를 수종사 앞마당에서 보는 것이다.

북한강과 남한강 그리고 경안천이 합수되여

거대한 필당호를 만들었다,

풍수와 지리에 밝았던 세조때 대제학 서거정(1420~1488,)이

동방의 사찰 중 제일의 전망 이라고 했을 정도로 한강의 아름다운 전경을 만날수 있는 곳이 수종사다,

이제 수종사를 나간다,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은 겨울부터 여름까지 흰색이 주를 이룬다.

겨울이면 온 산이 얼어붙어 설산(雪山)이 되고, 눈이 녹은 봄이면 하얀 배꽃으로 뒤덮인다. 여름에는 운해(雲海)가

흰 장막처럼 산을 가린다. 4계절 중에 가을만 단풍으로 붉고 그 외엔 하얀색 풍광이 운길산을 점령한다.

나기는길 불이문을 지나간다, 절에서 불이문이란?

불이는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이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되며,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됨을 의미한다.

주일을 맞아 수종사로 들어오는 많은 사람들

수종사는 운길산역에서 1시간 정도 걸어서 올라오거나 자동차로 올수도 있다,

절 입구니 부처상은 기본일테고

그리 오래되여 보이지는 않는 부도 도 있다,

浮圖(부도)?는 절에서 살면서 불도를 닦고 실천하며 포교하는 사람, 즉 중(승려나 스님)을

뜻하는 말이지만 결국 중이 죽어면 사리를 보관하는 무덤이다,

수종사 주차장이 있는곳

수종사 일주문 현판은 운길산수종사라 붙어있다, 일주문이란? 절에서 기둥을

한줄로 배치 한 문이다, 일주문을 나가면 부처가 사는 불정토에서 사바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사비세상이란? 견디고 참고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뜻이지만 이 세상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