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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남한산성 남장대터에서 좌익문까지(2020년 5월 10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인천·경기·강원

남한산성 남장대터에서 좌익문까지(2020년 5월 10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0. 5. 13. 07:45

남장대터에서 남한산성 동문인 좌익문으로 간다,

이곳에서 부터의 산성길은 내림길이지만 조금 가파른 길이다,

성길은 계속해서 길게 이어지고 있고

잠시 성길을 따라 가다가 암문을 발견한다,

이번에는 성 밖으로 나간다,

산성 밖에서 본 암문,

불은색의 나무 문이 달려 있다,

남문에서 부터 이곳까지는 성내 성길을 따라 왔다,

오늘 처음으로 성 밖으로 걷는다,

성 밖 길에서는 산딸기가 많이 보인다,

같은 성길인데 성내와 성밖은 다르다,

성 밖은 성내에서는 느끼지 못했든 또다른 자연으로 다가 오는것 같다,

성 밖으로 가다가 만난 제3남옹성 팻말,

산성남쪽의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 적의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설치한 제3남옹성이다,

제3남옹성의 길이는 125m이고 

끝 부분에는 5개의 포대가 설치되여 있는데 

포혈의 형태가 일반적인 사각형이 아니고

사가형 위에 작은 사각을 더 뚫은 형으로 설치된 것이 특이하며 포구는

전면과 좌우 포함 5군데나 만들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

암문이 없다는게 다른 옹성과는 다른점이다,

남문에서 남한산성 남측 성길을 따라 오면서 본

남옹성의 위치는 아래 지도를 참고, 오늘 우리가 가야하는 목적지는

서문까지니 아직도 한참의 거리다,

제3남옹성을 지나 암문으로 성내로 들어간다,

이렇게 가까운거리 좌우에 암문이 두곳이나 있어니 옹성 전용 암문을

따로 만들지 않은것 같다,

암문으로 성내로 들어와서 성밖으로 내다 본 전경이다,

작은 암문이지만 넓직한 평형의 바위돌을 암문천정으로 튼튼하게 만든게 보인다,

잠시의 길이였지만 성밖에서 성내로 들어와

동문으로 내려간다, 동문은 성내에서 제일 낮은 곳에 있어니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게 맞다,

이곳에서의 길은 성벽과 붙어 있는길과

성내로 편안하게 걸을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길이 또 있다,

성 길은 이렇게 생겻다,

우리는 성 길로 내려 간다,

이제는 맞은편 산에

띠 처름 길게 늘어선 성곽이 보인다,

남한산성 남쪽 구간인 남문에서 동문 사이 성길은

거의 한적 한곳이다,

남한산성을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볼거리가 있고

길이 비교적 편한 수어장대나 북문 정도에서 남한산성을 둘러보고

가는게 대부분 이기도 해서 일게다,

남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마지막 구간을 내려간다,

동문옆 도로가 있는 곳까지 내려서면 성아래 동암문이 있다,

남한산성에는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동암문은 그중에서 제11번째 암문이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할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동문(좌익문)에 인접한 이 암문은 폭이 2,86m 높이가 3m 이고

길이는 5,6m 로 남한산성 암문중 가장 큰 문이다, 이는 동문은 계단으로 통행을

해야하는 구조라 大門이지만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 했다, 그래서 수레나 일반인들의 통행은

주로 이 암문을 이용한것으로 보인다, 조선말 천주교 박해때 희생당한 시신도

이 문을 통해서 버려저 천주교인의 성지순례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산성내에서 광주로 나가는 도로를 건너야 동문으로 연결된다,

남한산성과 광주로 연결되는 도로가 필요했든 이유로 이곳은 남한산성 성곽중 유일하게

성곽을 끊어내고 도로를 개설했다, 도로를 건너가기 전 성곽 안쪽으로

깊은 웅덩이↓가 있는게 보인다,

앞에 보이는 좌익문(동문)은 지금의 상태로 보면 높이 설치되여 있다,

그러나 지형을 살펴보면 원래 이 지역이. 남한산성내에서는 제일 낮은 지대였든것 같다,

가장 낮은지대에서 좌우 높은지대에 맞추어 성곽을 쌓다보니 자연히 성의 높이가 높아지게 되였고

그곳에 성문을 만들다 보니 높아진 것 만큼 계단을 쌓아서 출입문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물처름 깊게 파진 웅덩이?는

수문水門 이다, 

해발370m~450m 정도의 산 능선에 축성된 남한산성은

지세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대부분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가야 하는데

남한산성은 성곽으로 막혀있어니 물이흘러가야 하는 수로水路?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수구문을 만들고 바닥에는 홈을파고 깊이는 옹벽을 쌓아 적의 침입을

막았을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내에는 물이 풍부했든 지역으로 알려진다,

약 80개소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정도로 수자원이 많아서

지금도 산성내 마을은 급수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성곽을 끊어내고 도로를 만든 자리를 건너가야한다,

성곽을 끊어내고 도로를 만든 지점은 남한산성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리고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쇄로 중요한 역활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였다는 기록도 있고 나당 전쟁이 한창이던 신라문무왕 12년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인조 14년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해 항전했지만 왕자들이

피해있든 강화도가 함략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열고 삼전도로 나가 우리민족

자자손손 대대로 잊을수도 없고 잋어서도 안되는 가장 치욕적인 항복을 한 역사를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땅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룬 곳이라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해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에도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 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을 할수 있었든 역사가 증명해준다, 

이처름 오랜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름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성이 아니라 본성과, 봉암성, 소암성과

5개의 옹성으로 만들어진 복잡한 구조다, 인조 4년에 중창부의 가장 큰 본성이 완성되였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레 증축을 거처 현재의 성 모습을 갖추게 되였다,

남한산성 남동쪽에 있는 좌익문(동문)은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이용하든 성문이다,

조선 선조때 보수했고 인조 2년인 1624년에 다시 건립했어며 정조3년 1779년에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했다, 이때 성문마다 하나씩 이름을 붙였는데, 동문은 좌익문이라 했다,

이는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였기

때문에 계단을 쌓아서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을 이용했다, (출처 : 광주시청)

 

우리는 이제 동문을 지나 계속해서 성길을 따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들고나는 좁은길은 성곽을 따라가는 길이고 앞 도로는 장경사로 들어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