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남한산성 좌익문에서 동장대터까지(2020년 5월 10일) 본문
남한산성 4대문중 가장 낮은 지대에 있는 동문인
좌익문을 지나서 성곽으로 올라간다,
남한산성 동쪽구간으로 올라가면서
내려다 본 동문일대 동문옆으로 광주로 이어지는 도로가 보인다,
동문에서 장경사신지옹성 방향으로 올라가는 성 길은 가파를수 밖에 없다,
산성내에서는 제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길이 힘에부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본 동문
도로건너편 수문까지 보인다,
짧은구간이지만 경사도가 있어니
그리고 또 올라가야한다,
이곳은 남한산성 동문에서 동장대터로 가는 성길이다,
아마도 남한산성내 에서는 제일 좁은 성길을 지나가야 하는 곳이다,
이곳 성 밖은 송암정이 있든 송암정 터다,
송암정은 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옜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해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했다,
이때 그 무리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여내려 자결했는데
그후 달 밝은 밤에는 이 곳에서 노래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 왔다고 한다,
이 바위에 서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내부 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 부르는
소나무다, 바위와 고사목↓소나무가 보이는 저 바위에 정자(송암정)가 있었다는 전설이다,
이 구간의 성은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따라 축성한 것이라서
보이는것 만으로도 멋스럽고 아름다운 전경이다,
성곽은 계속해서 이어 지지만
조금 높게 설치된 성곽이 보인다, 뭔가 다른점이 있을것 같아서 살펴보니
성 위에 낮게 담을 쌓아 이곳에 몸을 숨기고 적을향해
총이나 화살을 쏠수 있게 만든 시설인 총안과 타구 아래 성곽을 낮게 파서
성곽을 들어내고 작지만 포대를 설치한게 보인다,
포대시설이 있는 성길을 지나가니
성곽길이 넓어진다,
계속해서 성길은 이어지는데 한발만 물러서서
멀리 바라보면 전쟁을 위해 만든 성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평화롭기만 하다,
그러다가 도로를 만난다, 이 도로는 동문에서 들어오는 도로다,
걸어서가 아니라 자동차를 가지고도 이곳 장경사 까지 들어올수 있다는게 된다,
장경사는 인조2년 1624년 산성수축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사찰이다, 병자호란 당시인 인조15년(1637) 1월 19일 적이 동쪽성을
침범하여 성이 함몰위기에 빠지자 장경사에 있든 어영별장 이기축이 군사를 독전해 적을 물리친다,
적이 물러가고 나서 왕이 친히 납시여 위로하고 품계를 더해 완소군에 봉해지기도 했다,
남한산성을 축성할때 승군의 숙식을위해 창건한 산성안에 있었든
사찰은 모두 9개였다, 그러나 1907년 8월 1일 일제의 군대해산령에 의해 성안의
화약고와 무기고를 파괴할때 대부분 파괴되였어며 지금은 일부 사찰만 남아 있다, 그중 장경사도
마찮가지였고 더욱이 1975년 화재로 소실되였어나 다시 중창한 사찰이다,
장경사신지옹성 암문은 남한산성 16개 암문중 제 2암문이다,
장경사신지옹성과 본성을 연결하는 이 암문은 폭이 1,3m 높이가 1,42m로서 다른암문에
비해서는 비교적 큰 편이다, 본성에 설치되여 있는 11개의 암문을 문 밖에서 보면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지만 제6암문과
이 문은 윗 부분을 "ㅡ" 자형으로 만든 평거식 문이다,
다른 암문은 원성 축조시 함께만들어저 사전에
계획된것인 반면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을 쌓어면서 만든 암문이다,
남한산성 5개의 옹성중 장경사신지옹성은 한봉성과 봉암성에 대한
방어를 주 목적으로 설치되였어며 둘레가 159m다, 옹성 끝에는 두개의 포대가
설치되였고 포루의 좌측 벽에는 이방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다,
전투시에 성내로 출입할수 있도록 본성으로 연결되는 출입문을 설치했다,
남한산성은 수백년간 우리네 산성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고대 이래 중세까지 동양의 성곽 축성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4대 요새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은 청량산, 검단산, 망덕산 등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걷기에도 좋다. 또한 남한산성 안에는 관아와 장고, 행궁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가족나들이와 더불어 역사 공부도 할 수 있다.
남한산성은 산성을 따라 걷는 길로 비록 평지길은 아니지만
길일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힘들면 쉬여가면된다,
무었보다 산성길은
마음의 여유를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인것 같다,
더욱이 내가본 산성길은 낙엽진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건 그때만의 생각이였고 5월에 보는 신록의 산성은 더욱이 오늘처름 비가온후
안개까 끼인 남한산성은 운치가 다르다,
결국 계절과 날씨에 따라 천의 얼굴을 가젓다고나 할까
그럼 답은 언제 어느때든 남한산성에 와도 결코 후회할 일이 없다는게 된다,
동문에서 동장대터까지 가는 구간은 오름의 연속이다,
그러니 남한산성길은 마실길을 걷는듯한 평지길은 아니다, 그래서 잠시의
구간을 걷는다면 모르겠지만 남한산성 전 구간을 종주한다면
나름 준비는 해야 한다,
남한산성 군포지 라는 안내가 보인다, 군포軍鋪란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중정남한지(1818)에 따르면 남한산성내 에서는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한군데도 남아 있지않다,
조사결과 이 군포지는 주변보다 조금 높은 평탄한 대지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보이는 초석과 벽체 그리고 다수의 와편과 조종탄환이 나왔다,
이를 통해 군포는 목조 가구로 된 건물에 기와를 얹고
벽체는 토석벽을 둘린 건물로 보인다, 또한 군포는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있고 내부에 온돌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군포터를 지나면 동장대터가 있다, 동장대터에는 남한산성 여장이 있는데,
여장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이다,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화살을
쏠수 있게 만든 시설이 여장으로,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는 보기힘든 전돌로 축조한 평여장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 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여장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서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했다,
이곳여장은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원총안 2개등 3개의
총안이 있고 여장과 여장 사이에 활을 쏘기 위한 타구가 마련된다,
여장크기는 길이 3,8m 높이 1m 폭 0,8m 내외가 일반적이다,
여장이있는 이곳은 동장대가 있든
東將臺址다,
남한선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이곳 장대는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장대라 했다,
이곳은 남한산성에 주둔하든 수어청에 소속된 5영중 좌영장을
지휘하든곳이다, 동장대는 인조 2년 1624년 산성 수축시 설치되였고 누각도 함께
건립했어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이며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어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졋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국내 山行日記 > 인천·경기·강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한산성 북문~서문~마천동까지(2020년 5월 10일) (0) | 2020.05.16 |
---|---|
남한산성 동장대터에서 북문까지(2020년 5월 10일) (0) | 2020.05.15 |
남한산성 남장대터에서 좌익문까지(2020년 5월 10일) (0) | 2020.05.13 |
남한산성 남문에서 남장대터까지(2020년 5월 10일) (0) | 2020.05.12 |
산성역에서 남한산성 남문으로(2020년 5월 10일) (0) | 2020.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