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남한산성 북문~서문~마천동까지(2020년 5월 10일) 본문
남한산성북문에서 산성내를 바라본다,
북문과 남한산성 행궁지가 있는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와는 붙어있다,
행궁이 있는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보니 남한산성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북문은 보고 갈 정도로 인기있는 성문이다,
이 문이 남한산성 북쪽에 있는 문이라 북문이라고 하지만 이 대문의
이름은 전승문이다, 이곳 북문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수세에 몰려있든 조선군이
영의정이였든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과 전투를
벌였어나 전멸을 한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이기도 하다,
법화골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 규모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된다. 그 후 정조가 성곽을 보수하고 성문을
다시 고치면서 전쟁에 임하면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의미로 전승문이라는
이름을 명했다고 하는 아픈 역사를 가진 이름이다,
북문에서
울창한 소나무들을 보면서 서문으로 간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은 차량 통행은 할수 없지만
이렇게 도로를 만들어 놓은길이 있다
이 구간의 길은
성곽을 따라가는 길은 없다
어떤 의미로 이곳에 이런 내용이 안내되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시" 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있는데 "한양다음으로 큰 완전한 소비도시 산성리" 라는
제목에 내용은 조선시대 한양은 20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18세기 후반산업혁명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가 5만명 이였다는 사실에 비교해 보면 당시의 한양 인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든 도시인지를 짐작할만하다, 라는 안내가 있다,
이말은 남한산성 옜길이 위치한 남한산성 산성리 지역이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였는데 1627년(인조 5년) 광주부의 읍치(행정중심지)를
산성내부로 옮기면서 산성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어나
1895년 갑오경장이후 행정구역 개편과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페합에 따라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그 규모가 줄어들게 된다,
이로서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든 지역중 하나였든 남한산성 산성리는 한적한 마을로 변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였지만, 남한산성은 한때 한양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길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삼국시대부터 천혜의 요쇄였든 남한산성내 도시의 번창하든
시절이 상상이 안된다, 그러나 남한산성 일대에서 보이는 금강송
군락은 할말을 잊게 한다,
이정표가 보이는이곳에서 부터 산성내 길과 성곽길로 갈라진다,
성곽길의 정상은 연주봉옹성이 있는 남한산성 제5암문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지난주에 마천동에서 연주봉으로 올라와서 북문으로 하산했든 코스라
오늘은 산성 내 길을 따라 서문으로 간다,
오늘따라 밤새 내린 비 탓인지? 가는내내 솔향에 취해서 간다,
그냥 이곳에 오래도록 머물다 가고 싶다,
그러나 그냥 자연 그대로를 보고 즐기면되는데
욕심을 부린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렇게 길을따라 서문으로 가는데 송림속에 불현듯 건물들이 보인다,
저 건물들은 국청사國淸寺 로
1625년(인조 3)에 각성(覺性),을 팔도 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
(八道都摠攝總節制中軍主將)에 임명하고,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축조를
담당하게 할 때 7개의 사찰을 창건했는데 그 중 하나가 국청사다.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군기(軍器)와 화약, 군량미 등을 비축했던 사찰이다. 그 뒤 한말에 의병의 군기창고로
사용되다가 비밀이 누설되자 일본군이 불태워서 절터만 남아있던 것을 1968년에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한산성, 이곳에서는 병자호란의 아픈역사를 잊을수없다,
1636년 12월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침략한다, 조선은 이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왕은 수구문水溝門을 나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을했다,
남한산성에서 40여일을 치열하게 버틴 조선군은 식량이 바닥나고 병사들이 얼어죽을 정도로 추위가
매서웠어며 왕자들이 피신을한 강화도까지 청군에 함략되자 더이상 버틸 힘이 없었든, 인조는
1637년 1월 26일에 항복문서를 보내고 30일 삼전도에서 조선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록된 항복의 당사자가 된다,
우익문은 남한산성내 서쪽에있는 문이라 西門이라고 불린다,
1637년 1월 30일 유난히도 추웠든 겨울날 인조는 삼정승과 판사, 승지와 사관만을
거느리고 바로 이 서문을 나가 삼전도를 향해 걸어갔다. 군사를 도열시켜 놓고 장막에서 기다리던
청 태종 홍타이지는 인조 일행이 도착하자, 그와 함께 배천의식을했다. 청의 입장에서는
조선이 한 집안이 되었다고 하늘에 고하는 의식이었다.
배천의식을 마치고 홍타이지가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단 아래에서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한번 절할때마다 머리를 세번 땅에 찧는의식)를 했다,
중요한 것은 세번의 절은 신에게 하는 의식이다,
산자는 한번 죽은자는 두번의 예를하고 신에게는 세번의 절을하는게 의식인데
결국 홍타이지를 신으로 모신다는 의식이였어니 인조의 피맺힌 한은
대를이어서도 갚을수 없는 치욕스러운 역사였다,
우익문인 서문 밖에는
남한산성 4대문에 대한 설명도 붙어있다,
그리고 남한산성 밖 성길은
위례둘레길이라는 이정표도 있는게 보인다,
서문을 나와 왼쪽은
수어장대와 남문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이고
오른쪽은 북문 방향으로 가는
둘레길인 모양이다, 산성길도 모자라서 위례둘레길은 또 뭔가?
이제 우리도 1637년 1월말 (383년 4개월 전)
인조가 걸어서 삼전도로 갔든 역사의 길을 따라서 내려간다,
서문 밖,
뜬금없는 호랑이 안내판도 있다,
지금으로 부터 약 383년전 이 험한 산길을 임금님은 어떻게 걸어서 내려갔을까?
오죽하면 우리민족 자자손손 대대로 북방에있는 한족은 잊어서도 안되고 잊을수도 없음을
뜻하는 의미에서 북쪽에 있는 삼각산에 성을 쌓어면서 북한산성이라고 했을까?
가파르게 내려가는 길이지만
내려가야하는 거리는 얼마 되지는 않는다,
지금은 이렇게 잘 정비를 해놓은 길이지만 그 옜날에는
얼마나 험한길이 였을까, 기록을보면 병자년 추위가 대단해서 눈은 무릅까지 쌓이고
매서운 바람이 추위를 더했다고 하니 치욕도 그런 치욕이 어디에 있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만 있을 뿐 패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역사는 패자인 조선이 기록한 것이다, 패자가 기록한
역사가 이 정도면 승자인 청에는 어떤 기록이 남아 있을까?
우리는 오천년의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라고 가르치고 배운다,
그러나 오천년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치욕의 한을 품고 살아야 했을까,
지금이라고 다를까? 이는 우리 민족이 풀어내야할 영원한 숙제다,
오늘은 성남 산성역에서 남한산성을 한바퀴 돌아 마천동으로 내려왔다,
이길은 초행이라도 길을 잃어 고생하는 일은 없는길이다,
남한산성에 볼거리는 성 말고 또 뭐가 있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아픈역사만큼이나 아름다운 자연이 남아있는
후손들을 치유해 준다면 볼거리는 차고 넘치는게 아닐까,
언제 어느때든 마음만 먹어면 5호선 마천역이나
8호선 산성역에 데려다준다, 그 다음은 유유자적 즐기기만 하면 된다,
가다가 힘들면 언제든 돌아올수 있는 교통편도 있다, 수도권에서 가까운 곳 중에
이만한 곳이 있을까? 언제든 훌쩍 다녀오고 싶은 곳으로 추천드린다,
남한산성 서문에서 내려온 길 첫 마을은
하남시 감이동이다,
앞에 보이는 청운사를 지나서 나가면
서울 송파구 마천동이며 이곳에는 5호선 마천역이있다,
성남 사성역에서 남한산성 남문으로 올라
남장대와 동문, 동장대, 북문, 그리고 서문으로 해서 마천역까지
13km 남짓을 약 5시간정도 걸려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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