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울성곽길(한양도성,16) 돈의문(서대문)터 ~ 소의문(서소문)터 ~ 숭례문 본문
강북 삼성병원 앞 도로변에 데크로 설치 해놓은 구조물이
돈의문 터 표식이다, 삼성병원 앞 정동사거리가 돈의문(서대문) 자리인데
일제는 이곳에 돈의문을 철거하고 도로를 냈다, 이 사진은 삼성병원 앞
4거리 대각선상에 있는 경향신문 사옥 앞에서 찍었다,
삼성병원 건너 경향신문사 앞길, 정동으로 들어가는 도로,
여기서 부터는 한양도성이 있었든 자리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다, 성곽은
도시화로 흔적도 없이 사라졋어니 여기서 소의문(서소문)으로 연결된 서울 성곽은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오늘은 소의문 터를 찾아 정동사거리에서
덕수궁으로 들어가는 도로로 들어간다,
정동사거리 경향신문사 앞에서 덕수궁 으로
이어지는 정동길은 보이는 것 모두가 살아있는 역사의 길이다,
이화여자고등학교다, 이학교에는 유명한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세워진 여자 학교. 이화 학당이 세워질 무렵 조선에서 여자들은
공부는 커녕 바깥나들이조차 하지 않든 시절이다. 학당이 문을
열었어도 찾는 학생이 없었다.
스크랜턴 부인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딸을 학당에 보내라고
사정했지만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숨기에 바빴다. 스크랜턴 부인은
가난한 집 어린이를 데려오거나, 병에 걸린 어린이를 치료해 주고 학당에 입학시켰다.
그러고는 옷과 음식을 주고 잠도 재워 주면서 시작한 조선 최초의
학교가 이화여고다,
길게 늘어선 이화여고 담장을 따라 가면,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정동교회, 정동극장, 이화여고, 신아기념관,
서울시립미술관, 러시아 대사관,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등등
모두가 다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조선시대에 사대문안이 가장 중요한 장소였지만,
후기에는 주요 거점이 정동으로 바뀌게 된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
이것이 아관파천 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전쟁때 파괴되었고, 지금은 하얀색 탑
하나만 복원되어 쓸쓸히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복원공사를 하면서 밝혀진 사실은,
러시아 공사관과 덕수궁 사이에 지하 비밀 통로가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근대화의 계몽기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신문이였다,
정동길 근처에는 많은 신문사가 있었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아일보사 등.
정동은 대사관들이 몰려있는 곳이였기에 이곳에 드나들고 정보를 수집하려면 가까울수록
좋은게 당연지사. 이 건물들이 이곳에 집중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는 점이 재미있다.
지금의 러시아연방 대사관이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건물을 지나 서소문로까지 나오니
길을 건너는 건널목이 없다, 이곳에서 길을 건너가자면 시청역 지하철역으로
건너거나 오른쪽으로 약 200m 정도는 더 가서 서소문로 고가차도 아래
사거리 건널목으로 건너가야 한다,
길을 건너 중앙일보사 사옥 앞으로 해서 다시 시청방향으로
거슬러 올라 가다가 보니 생각지도 못했든 작은 표지석 하나를 발견?했다,
중앙일보 사옥 정문으로 들어가는 도로 입구 길 건너 한켠 에서다,
조금전 이 도로를 건너오기 전에 그렇게도 찾았든 소덕문 터가 생각지도 않은
곳에 있다니, 서소문로에서 영업을 하는 주민은 물론 심지여 교통경찰까지도 모두 모르고 있는
장소인 소덕문(서소문)터가 여기다, 이 소의문도 1914년에 일제가
도로를 내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졋다,
문류와 성곽은 흔적도 없이 사라젓어나
소의문인 서소문은 한양도성의 정문이였든 남대문이나 동대문과는 달리
대문이 할수없는 역활을 한 문이다,
이곳 소의문도 광희문과 함께 시구문 이였다,
즉 도성에서 상여가 성밖으로 나가든 문이다, 더욱이 소의문은 상여뿐만이
아니라 죄지은 사람을 처형한 장소기도 했다, 영화나 연속극에서 보든
조선시대 죄인들 처형 장소가 소의문 밖이였든 이곳이다,
1890년대 초중반의 모습,
소덕문(昭義門, 昭德門) 속칭 서소문(西小門) 外측 모습,
소의문, 또는 소덕문(昭義門, 昭德門) 속칭 : 서소문 바깥쪽 모습,
성문안팍 왼편에 성곽이아닌 석축이 보이며, 왼쪽 성곽너머 안쪽에 수평으로 된 건축?
구조물과 굴뚝으로 보이는 것이 있어며 전봇대를 보면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초기의 모습으로 보인다, 오른쪽 성곽의 나무 모습도 보이며, 성문앞길
오른쪽의 지형이 여느 성문주변과 다른모습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에서 본 소의문 (昭義門)
속칭 서소문西小門 이라고도 한다, 숭례문(崇禮門)과 돈의문(敦義門)사이,
즉 지금 서소문동 큰 길에 위치하였던 서남간문으로 일반적인 통로가 되였고,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밖으로 운반하든 통로 구실을 하였다,
이 문의 창건당시인 1396년(태조 5년) 9월에
다른성문과 함께 지어 졋을때는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
이 곳은 지대가 태조때 토성을 쌓았든 곳이며, 1422년 세종 4년에
이 곳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으로 미루어 소덕문으로 고쳐서 지였어리라
믿어지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경성부사(京城府史)에 1472년 성종 3년에
예종비(睿宗妃) 한씨(韓氏)의 시호를 소덕왕후(昭德王后)라 한
까닭에 문 이름을 소의문으로 고쳣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앙일보로 들어가는 이 도로 끝에 숭례문이 있다,
정리를 해보면 돈의문에서 소의문, 그리고 숭례문이 일직선 상에 있는 거라면
강북 삼성병원에서 이곳 중앙일보, 그리고 남대문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도심의 한양성곽에
대한 윤곽이 잡힌다, 역사학자나 전문가는 다 알고 있겠지만 일반인들이야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니 그저 그렇게 유추할뿐이다,
우뚝선 빌딩 사이로 숭례문이 보인다,
국보 1호 숭례문, 한양도성의 남대문이자 정문이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 완공하였고 1448년년과 1479년 2차례에
걸처 개축했다, 숭례문은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좌, 우,
성벽이 철거되였고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숭례문이 2008년 2월 화재로
목재인 2층 문류가 전소된다, 2013년 5월 다시 복구되면서 숭례문
좌우 83m구간에 성벽을 연결했다,
1904년 초 숭례문주변 사진이다,
1900년대 초 까지만해도 성곽이 온전하게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있지만, 이 성벽들은 1920년대 모두 헐렸다,
남산에서 내려와 소의문, 돈의문, 을 지나
인왕, 북악으로 이어지는 성곽,
남대문의 또다른 이야기는,
조선초에는 남대문안에는 상평창이 있었다,(지금의 남대문 시장자리) 17세기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선혜청 창고로 바뀌였다가 1894년 조세금 납화조치에 따라 현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자 이 창고를 상인들에게 내주어 시장으로 삼았다,
종루(종로 4거리), 흥인지문안(동대문시장)과 더불어 조선후기
3대 시장중 하나로 꼽혔다, 남대문 시장은 1987년 1월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시장이다,
아래 사진은 서대문역 4번 출구 앞이다, 인도에 표식 하나 가 보였다,
(서대문 적십자 병원 앞)
경기 감영터 라는 표식이다, 이곳은 돈의문(서대문)터 앞이다,
한양바깥 경기도를 관장하는 감영이 서대문 앞 마당에 있었다는 것이다,
태조2년1393년에 설치되여 1896년에 수원으로 이전 할때까지 500년 동안 이자리에
있었다니 몰랐을 때는 관심도 없지만 알고보면 역사란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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