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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경복궁 신무문~광화문 광장(2022, 8, 14)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경복궁 신무문~광화문 광장(2022, 8, 14)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2. 9. 21. 00:02

경복궁 북문 신무문을 들어와서

아치형 문으로 보이는 청와대 본관 과 정문,

신무문에서 매표를 해서 경복궁내 집옥재 일원으로 들어간다,

매표소입구 검표원 여직원은 아직도 전형적인 관료 기질을 가진듯 조금

강압적인 태도로 손님을 맞는다, 날씨가 더우니 그려려니 했다,

집옥재 일원으로

들어가는 궐내 광림문으로 들어간다,

가운데 큰 건물이 집옥재, 왼쪽 팔우정, 오른쪽은 협길당,이다,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겻다가 1888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들어와 집옥재옆 건청궁에서 주로 기거했다, 창덕궁에 지어졋던 집옥재,

협길당, 등을 1891년에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와 자신의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하던 장소다

집옥재는 양쪽벽을 벽돌로 쌓고 내부를 2층으로 만들었어며

팔우정은 팔각형의 2층 정자다, 이 건물들은 중국풍의 요소들이 많이 썩여있어

궐내에서 이국적인 지역을 형성하며 복도를 통해 하나의 내부로 연결된다,

집옥재에서 건청궁으로 가는길 오른쪽

향원정이 보인다,

건청궁이다, 경복궁 중건 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은 경복궁 북쪽 동산 정원인 녹산과 향원정 사이에

건청궁을 건립케 하고 명성황후 와 기거했다,

건청궁 건축 양식은 궁궐의 침전 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합),

부속건물(복수당), 행각 등으로 구성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 선인 99칸의 2배도 넘는  250칸이다,

건청궁을 건립한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 공간을 옮겼어며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할때까지 10여년간 이곳에서 지냈다, 한편

건청궁에는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곤녕합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에 들어와 경복궁 건물들이 차레로 파괴되면서

건청궁은 1909년에 철거되고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졋어며, 그 후

한동안 국립현대 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되였다,

문화재청은 건청궁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건청궁 앞 향원정이다,

후궁 영역의 뒤 정원으로 만들어진 연못 안에는

원래 취로정이 있었는데 건청궁을 창건 하면서 그 자리에

향원정을 새로지어 건청궁 앞 정원이 되였다,

건청궁과 향원정 약도다, 

건청궁은 장안당과 곤녕합, 복수당으로 구성 되여 있어며

건청궁 앞 연못에는 향원정이다,

건청궁 일원을 나간다,

나가면서 보이는

높은 건물은 극립민속박물관이다,

이어서

자경전 일원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부터는 경복궁의

중심인 

자경전,과 교태전,

강녕전, 사정전 일원으로 이어진다,

경복궁은 조선왕조가 수립되자 390여 칸으로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재원마련과 부역동원은 대원군의 독려에 힘입어 사람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1866년 뜻하지 않은 화재가 발생하여 그동안 마련해 놓았던 재목들이 전부 불타버렸다. 사람들은 일이 중지될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대원군은 일을 강행하여 이후 재원마련과 부역동원에서 많은 원성을 샀다. 목재마련을 위해서는 양반들의 선산이나 마을 성황당의 나무까지도 베어내었으며, 원납전을 강제로 거두고 백성에게 되도록 부담을 주지 않으려던 초기의 방침과는 달리 결두전이라는 토지 부가세를 거두었으며, 도성문을 출입하는 사람에게는 문세를 징수했다.

그렇게 하고도 재원이 부족하여 당백전을 발행했다. 당백전은 종래 엽전에 비해 100배에 해당한다는 뜻이나 실은 20배에도 못미치는 악화였다. 이에 따라 물가가 폭등하는 등 엄청난 경제혼란이 벌어졌다. 백성들의 원성 가운데 1867년 마침내 경복궁은 완공되었다. 규모는 7,225칸 반이며 궁성의 담장 길이는 1,767칸이었다. 1868년에는 고종이 경복궁으로 옮겨와 정궁으로 사용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일본인들이 궁안의 전·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다시 궁의 일부를 헐어 그 재목을 창덕궁 재건에 사용했다. 그 결과 궁전 안에는 근정전·사정전·수정전·천추전·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동십자각만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일제는 근정전의 정면에다 근정전을 완전히 가리는 커다란 석조건물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의 면모와 위엄을 훼손했다. 해방 후 중앙청청사로, 이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12월 완전 철거되었다

경복궁 내전은

어디 한 곳이라도 허술하게 보이는 장소가 없다,

선조를 비롯하여 여러 왕이 경복궁을 중건하려는

뜻을 가졌으나, 공사가 방대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소실된지

약 270년 후인 1867년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총 7,225칸의

대규모 궁전으로 중건되었다.

대원군은 그의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중세 말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그의 개혁안은

주로 조선조 체제를 다시 굳건히 세우려는 것으로서 경복궁

중건은 그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대원군은 1865년(고종 2)에 경복궁 중건 계획을 발표하고

영건도감을 설치했다. 이 사업을 두고 조두순, 김병학은 대체로 찬성했으나

김좌근, 정원용 등은 신중론을 펼치는 등 찬성과 신중론이 엇갈렸으나

대원군의 강력한 의지 앞에 감히 반대하지는 못했다.

영건사업을 위한 재원마련과 부역 동원의 원칙이 마련되었다.

첫째는 백성을 부리는 일을 신중하게 할 것, 둘째는 조정의 고관에서부터

지방의 수령 이하 모두 실력에 따라 재원을 보탤 것, 셋째는 양반들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자진 원납하는 자가 있으면 관작을 내리고 포상을 하며

억지로 내게 하지 말 것,

넷째는 전국의 종친들도 재원에 보탤 것이었다.

재정 마련을 위해 왕실과 종친, 정부관리, 양반들이 앞장서도록 한 것이었다.

일이 시작되자 자진하여 부역하는 백성들도 많이 나왔다. 부역하는 사람들을 위문하기

위해 남사당패들을 불러다 농악을 울리고 춤을 추는 등 사기를 돋우었다.

강년전과 교태전 일원은 왕과 왕비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이다,

사랑채에 해당하는 강녕전은 왕이 독서와 휴식, 신하들과 면담을 하던 곳이고

안채에 해당하는 교태전은 왕비가 거주하면서 궁 안생활을

총 지휘하던 곳이다,

1917년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으로 옮겨 사라진 것을

1995년 다시 지었다, 교태전 뒤편에 계단식 화단을 쌓아 아미산을 조성하고

4기의 장식적인 굴둑과 관상용 수석들을 배열해 정원을 만들었다,

아미산 정원은 경복궁 뒷 산인 백악의 정기를 침전까지 이어주며,

왕비의 후원답게 은밀 하면서도 기품있게 꾸며 졋다,

긍궐에도 온돌방이 있다,

궁궐 굴둑은 보는 것 만으로도 멋스럽게 만들었다,

강년전과 교태전 일원 약사도

사정전 일원이다,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이

사정전이다, 아침 조정회의와, 업무보고, 국가정책 토론 등 각종 회의가

매일 같이 열렸던 곳이다,

1867년 다시 지어진 사정전은 공식 업무 공간으로 마루만 깔려 있지만,

좌우의 만춘전과 천추전은 비공식 업무 공간으로서 온돌방을 두어 왕과 신하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사정전 앞 행각에 천지현황 등 천자문 순서로 이름을 붙인

창고가 있는데 이곳에는 왕실의 물품들을 저장했다,

사정문을 나가면 경복궁 근정전으로 조선의 법궁이다,

보이는 방향은 근정전 뒤편이다,

근정전 옆

융무루 문으로 근정전 밖으로 나간다,

경복궁 경회지 경회루가 보인다,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 연회를 하거나,

외국의 사신(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신하)을

접견하던 곳으로,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에 해당된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 국보.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경회루에서

다시 융무루 문으로 들어간다,

근정전 옆으로 좌우에 이런 공간의 건물이 있는데

근정전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융무루 이고 왼쪽은 용문루 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공간이다,

오른쪽에서 본 근정전

그리고 근정문,

근정문은

근정전 출입 문이다,

경복궁의 법궁인 근정전 앞 뜰에는

좌 우로 문신과 무신의 위치를 지정한 표석이

양쪽에 일렬로 세워저 있다,

근정문을 나가면 승례문이 있다 근정문과 숭례문 사이에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는 景福宮 永濟橋(경복궁 영제교)로 경복궁 안 경회루

연못에서 흘러나와 근정문과 홍례문 사이를 통과해 동십자각 옆의

수구(水口)로 나가 삼청동천과 합류하는 물줄기 다리다

궁궐 안에 있는 어구(御溝)를 금천(禁川)이라고 하고

그 위에 놓인 다리는 일반적으로 금천교(禁川橋)라 부른다. 그러나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를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금천교를 옥천교(玉川橋)라고, 별도의 이름을 붙였다.

이다리는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건설할 때 만들어진 다리로,

세종 8년(1426) 영제교라고 이름지었다.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건립하면서

해체되였고, 석재 일부가 수정전(修政殿) 앞에 있던 것을 1965년 근정전 동행각과 건춘문

사이로 옮겨 복원했다가 2001년 경복궁 홍례문 일곽을 중건하면서 원래

자리에 이전 복원했다.景福宮 永濟橋는 경복궁의 금천교 다.

숭례문을 나가면 광화문이다,

광화문으로 나가면서 돌아 본 흥례문

광화문 성곽이 경복궁 1차 방위선이라면 흥례문운 2차 방어선 격이다,

광화문을 나가서 광화문 광장으로 간다,

성 추문으로 떠난

박 시장이 시작한 광화문 광장은 이렇게 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도 않은데 무었 때문에

그 많은 돈을 들여서 광장까지 고처야 했을까?

달리진 것은 양쪽에 있던 도로를 한 쪽으로 합치고

사진에 보이는 이거 하나 세운 것 같다,

아무리 돌아 보아도 달라진게 없는 것 같은데

무었을 만들려고 했을까? 손에 권력을 지어주니 하는 짓들이란,

애써 부정을 해보지만 제발 그넘이 그넘이 아니길 바란다,

광화문애서 지하철을 타고 온 종각 골목

2대를 이어서 한다는 종로삼계탕 집,

내일 15일이 말복이라니 14일인 오늘 미리 삼계당

맛을 봐야 할 것 같아서 여기로 왔다,

일반 삼계탕 17,000원, 한방 삼계탕 18,000원

주문해서 나온 한방 삼계탕이다, 정말 어디로 가나 물가가 만만치 않다,

오른 물가는 재료값이 내려도 같이 내려가지 않는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