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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경기옛길 영남길 제6길 은이성지, 마애불길,上(양지면남곡리~신덕고개)2023, 03, 19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영남길

경기옛길 영남길 제6길 은이성지, 마애불길,上(양지면남곡리~신덕고개)2023, 03, 19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3. 4. 10. 00:21

김대건 신부의 은이성지, 문수산의 마애보살 이라는 제목으로 영남길 제6길은 양지면 남곡리에서 시작되여 좌우에 갈미봉과 형제봉을 끼고 칠봉산을 거처 문수산 마애불(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있어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문수산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법륜사, 용인농촌테마파크, 내동 연꽃길, 사암리 선돌, 무궁화 위성 안테나도 이 구간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라는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경기옛길 홈 페이지)

영남길 제6길 양지면 남곡리 출발점에 있는 제6길은 원삼면 독성리 까지로 거리는 15,4km 시간은 5시간 30분이 걸리며 난이도는 매우 어렵다고 안내되여 있다,

제5길과 6길의 분기점에서 양지천 구양지교를 지나 남곡2리입구 사거리로 간다,

구양지교 옆에 있는 모텔 쉬리 와 남곡2리입구 사거리다,

모텔 쉬리 맞은편으로 건너가 글로벌 한산 건물 앞에서

현대자동차 검사장 앞으로 가면

남곡리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2023년 3월 12일 이곳에서 철 수 했어니 오늘(2023, 3,19)은 이곳에서 다시 제6길을 이어 가야한다, 

일주일 후인 2023년 3월 19일 남곡리 현대자동차용인 A/S센터 맞은편으로 왔다

쉬리 모텔 앞 교차로 건너

골목으로 영남길 제 6길을 간다

지나주일에 이어가는 길이기는 하지만 여기가 영남길 제5길의 끝으로 제6길을 출발하는거나 마찮가지다,

남곡중앙교회를 지나서 애경산업 물류센터를 지나간다,

이 길은 공장들이 몰려있는 공장지대 사이 길이다,

차선도 없는 공장지대 사이 길로 가다가 2차선 도로인 은이로로 나간다,

2차선 도로 이기는 하지만 이 도로 도 남곡2리 입구 사거리로 연결되는 도로다,

은이로 변에도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계속해서 은이로와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길, 짧은 거리지만 인도가 만들어져 있는 곳도 지나간다,

인도는 금방 끝이나고 다시 도로만 있는 길을 따라 간다, 인도는 없지만 지나가는 차도 없어니 위험 하지는 않다,

신성상사가 있는곳 맞은편은 지금 공사장이고

남곡3리 마을회관이 있는곳을 지나니 은이성지 가 보인다,

은이성지가 있어 영남길 제6길은 은이성지, 마이애불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은이성지 앞에는 은이성지입구 버스 정류장도 있다, 버스 정류장은 있어나 이 지역에 있는 버스정류장은 하루에 몇번이나 버스가 운행을 하는 지는 알 수없다, 노선도는 있어나 운행 시간은 없는 정류장

지나가는 길이니 잠시 은이성지로 들어가본다, 입구에는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 앞 건물은 숙소인듯 하다,

은이 마을은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모여 살게 되면서 형성된 교우촌으로서 은이 隱里 라는 글자 그대로 숨어있는 마을 이라는 뜻이다, 은이성지는 1836년 1월 13일 프랑스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가 그해 4월경 이곳을 방문하여 당시 15세 소년인 金大建(1821~1846)에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안드레아)은 7월 11일 서울 모방 신부댁에 도착하여 이미 선발된 동료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등과 함께 라틴어를 배우다가, 12월 3일 중국 마카오의 파리의 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성지내 김대건기념관 앞 옛 은이공소지로 전해지는 곳에 소년 김대건이 세례받는 형상의 조형물을 설치 해 놓았다,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이 보인다, 김가항 성당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사제 서품을 받은 상해의 성당을 복원한 건축물이라고 안내판에서 알려준다,

그리고 성당옆 뒤편 제일 끝지점에 있는 한옥형 건물은 김대건기념관이다,

은이성지 일대는 1890년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소년 김대건의 일가도 골배마실에 터를 잡고 살면서 신앙 활동을 했다,

그는 8년뒤인 1845년 12월초에 최양업과 함께 만주의 소팔가자 성당에서 부제품을 받앗어며 이듬해인 1845년 8월 17일에는 상해 인근의 김가항 성당에서 제3대 조선 교규장인 페레을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였다,

1845년 10월 12일 교구장 高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걍경 황산을 통해 귀국하여 11월경부터 1846년 부활대축일까지 약 6개월 동안 은이 공소에서 기거하면서 서울과 용인일대 교우들을 사목하였다, 그르므로 은이성지는 사실상 김대건 신부의 본당 역활을 한 곳이며 그의 땀과 신앙이 배어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이제 은이성지를 나간다,

은이성지를 나가면서 다시 뒤로 돌아보는 은이성지는 김가항성당과 김대건박물관이 전부일 정도로 그 규모가 소박하다, 

은이성지 앞 청년 김대건길 이라는 이름으로 성 김대건 신부님을 따라 걷는 도보순례 길도 있다는 안내다, 청년 김대건길은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은이마을을 중심으로

박해를 피해 험한 산길을 다니며 교우들을 위해 사목적 열정을 불태우던 사목활동로 이며  1846년 9월 16일 26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민식 빈첸시오가 미리내에 안장하기까지의 시신 이장로다,

유네스코는 계급과 차별이 존재하던 조선시대에 평등 사상을 실천 하기 의해 양반이였음에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였어며

박애정신으로 천연두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국제 사회에 구제를 요청하고 대동여지도 보다 16년 앞선 조선전도를 만들어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한 김대건신부를 2021년 유네스코 기념인물로 선정하였다,

은이성지를 나와서 청년 김대건길을 따라 올라간다,

김대건 신부가 다니던 길 그 시절에는 첩첩 산중이였겠지만 지금은 별장처름 넉넉해 보이는 집들이 들어서 있다,

아랫마을 남곡리일대 공장지대는 문을닫고 철수한 공장들이 많아서 어수선한 분위기 였는데

점점 더 산속으로 들어갈 수록 좁은 땅이지만 멋스럽게 잘 짓기도 했지만 고급 외제 차들이 몇대씩 주차를 해놓은 집들도 보인다,

남곡3리 마을 끝 은이골 가족 캠핑장도 보인다,

계곡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캠핑장이라 캠핑장내 알림표지판도 있고

코팅을 해서 울타리와 나무가지 등 여러 곳에 걸어 놓은 등산객에게 알리는 알림 메모도 있는데

지나는 길에 언제든 매점에 들리면 따듯한 차한잔 대접하겠다는 말과 함께 쓰레기는 개수대 뒤에 버리고 가면 치워 주겠다는 당부의 말까지 적혀있다,

한마디 말에 따듯한 온기를 느끼면서 지나간다, 

은이골 캠핑장에서 신덕고개로 가는길

차량통행도 가능할 것 같은 임도가 이어진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길

무척이나 넉넉한 길이다,

이 길에 있는 말 한마디, 내 열정은 내가 알아서 하게 가만 놔뒀으면 좋겠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라는 말이 짧은 순간 스치듯이 지난 날을 돌아보게도 하는 것 같다,

산 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은 지점에

소년 김대건에 관항 이야기도 있고

청년 김대건의 길을 걷다는 안내판과 갓 쓴 김대건 신부의 케리커츠도 있다,

잠시 본격적인 산행 준비를 하고

청년 김대건길을 따라 올라간다,

건강한 인간관계는 시소를타듯 서로를 배려하며 주고 받을 맺어진다는 말도 적혀있 는길

오름길이라 가파르지는 않아도 땀이 조금씩 배이는 그런 길이다,

길은 계속해서 야자매트가 깔려 있다,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지만 경사도를 낮추기 위해 지그 재그로 안전난간도 만들었고

마지막 구간은 계단도 만들어 놓았다,

고개로 올라 선다,

이 고게에는 비석이 있는데 비명은 신덕信德 고개다, 한자로 풀이하면 큰 믿음 이라는 뜻을 가진 고개

신더고개 비 옆 아리랑 표석도 있는데 아리랑 가사와 리듬으로 순교의길 가신 임이여 

순교 유해 쌓고 쌓여 주춧돌이 되고 순교 선혈 흘러 흘러 밑거름됐네, 등의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고갯길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간다, 골배마실 성지와 문수산길 미리내 성지로 가는 방향이다,

오른쪽 높은 곳으로 올라와서 신덕고개를 돌아보니 이런 모습이다,

경기옛길 영남길 제6길 上편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