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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경기옛길 영남길 제5길 수여선옛길下(용인시종합운동장~양지면남곡리)2023,03,12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영남길

경기옛길 영남길 제5길 수여선옛길下(용인시종합운동장~양지면남곡리)2023,03,12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3. 4. 6. 00:00

용인종합운동장 옆 양지천변에서 고진로 로 올라와서 마평1교 앞에서

대각선 상에 있는 럭키마트 앞으로 건너간다,

용인서울병원을 보면서

파리바케트 앞 길인 고림로74번길로 들어가면

덕영고등학교가 있는데

덕영고등학교 끝에서 마을길을 따라

고림중학교 뒤 산 방향으로 들어간다,

신길 입구 햇골의 유래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원연(1543~1597)은 용인의 김량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햇골에 의병을 매복 시켰다가 좌우 협곡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럿다, 햇골은 처인구 김장량동과 유방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이 전투 이후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화약골이라고 불렸는데 혹자는 적의 해골이 지천으로 깔렸다고해서 햇골이라 불린 것이라 주장 하지만 

원주 원씨 묘비명에 나타나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화약골로 불리다 오늘날 줄임말로 햇골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원연은 햇골 전투의 공으로 연기군수를 제수 받아 선정을 베풀었어나 훗날 정유재란 때 순국했다고 한다,

고림중학교 뒤 울타리를 따라 가다가 고림중학교운동장을 내려다 보면 이런 모습이다, 앞에 보이는 공원은 지금 조성하고 있고

영남길 시그널이 없어저서 길을 찾아 헤메다가 지도만보고 택지개발 공사장으로 들어간다,

공사장 입구에서 오른쪽 산 위 능선으로 올라가서 내려다 보면

택지공사장이 내려다 보이고 올라 오는 길은 공사장 옆 언덕이다,

공사장을 모두 올라가면 산 숲 길이다, 택지공사를 하기 전에는 마을분들의 산책로였던 것같은 산길

빼곡히 들어선 나무가 숯을 이루는 곳

산책길이 이어진다,

이정표도 있고 이정표 기둥에는 영남길 안내 스티커도 붙어있다, 

한적한 숲길을 걸어면서 산길로 들어오던 입구 고림중악교 뒤에 안내되여 있던 원주원씨 의병장 원연에 대한 이야기를 평택시민신문 기사를 인용해서 해 보면 원연(元埏)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원릉군 원균(元均)의 동생이자 임진왜란 시기 평택 유일의 의병장이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의병부대는 삼남대로의 길목이었던 진위면 마산리 누산(태봉산)에 진을 치고 대백치와 소백치를 가로막아 일본군의 이동과 군량 보급을 차단했다. 

1592년 11월 무렵에는 용인 금령역 부근에 주둔한 일본군이 분탕질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출전하여 용인 햇골(용인시 봉두산 서남쪽 골짜기)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이것이 유명한 햇골전투 다.

그의 의병 활동은 조경남의 <난중잡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에 전해오고 조선왕조가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내렸으며 순조 29년(1829)에는 이조참의에 추증되는 등 크게 선양되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평택 적성공파 종중은 평택지역에서 활동하는 역사학자 김해규선생에게 의뢰하여 흩어진 사료를 모아 원연을 비롯하여 임진왜란에 종군했던 13공신의 충절을 기리는 <의병장 원연> 이 출판되기도 했다

한적한 숲길이라 특색이 있는 볼거리는 없지만 언덕위에 이런 곳이 있는데 여기가 봉두산 정상인 모양이다,

피렌제와 송문리 이정표도 닜다, 송문리는 마을이름이라고 알겠지만 피렌제는 무었을 하는 곳인지?

이곳 봉두산은 해발 200m 정도인 아주 낮은 산이지만 제법 큰 소나무와 참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봉두산 정상 100m지점 갈림길에서는 처인교와 천영교로 나누어 지는데 영남길은 여기서도 직진이다,

봉두산 숲길은 비교적 완만한 길로 느릿 느릿 걷기에는 아주 좋은 길이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길을 걷다보니 용인땅에 구전되여 오는 이야기가 떠 오른다,

진천과 용인에는 生居鎭川 생거진천 死居龍仁 사거용인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살아서는 진천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땅이 좋다 는 뜻이다.

진천땅에 살고 있는 농부 추천석은 비록 가난했지만 가족들과 단란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승사자가 용인땅의 추천석을 데려가야 하는데 이름과 생년월일이 같다는 이유로 그만 진천땅의 추천석을 데려갔다.

그 바람에 잘못 저승으로 간 진천 땅 농부 추천석은 이승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진천 땅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고 땅에 묻은 뒤였기 때문에 육신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한편, 저승사자는 용인땅의 선비인 추천석을 데려가면서 그 시신에 진천땅의 농부 추천석 원령이 들어갔다. 그 바람에 진천땅의 추천석은 용인땅 추천석 육신을 빌어 회생하고 곧바로 진천땅의 가족들을 만나려 했으나 용인땅 추천석의 가족들이 막았고, 아울러 진천땅의 추천석 가족들도 믿지 않았다. 

결국 모두 관아로 갔는데 사또 역시 안타깝게도 추천석을 용인땅의 추천석으로 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추천석은 쓸쓸하게 용인땅에서 용인땅의 추천석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까지만 보면 생거용인 사거진천이 된다,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추천석이 살아있는 동안은 진천에 살다가 죽은 후에는 경기도 용인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진천과 용인을 바꿔서 기록한 듯 하다고 하는데 즉, 용인의 추천석이 진천의 추천석 몸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원님의 판결도 살아서는 육체의 주인이 살던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원래 고향인 용인으로 가라는 의미에서 生居鎭川 생거진천 死居龍仁 사거용인 이라는 말이 나온거라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옛날 충북 진천군에 사는 허생원이라는 사람의 딸이 경기도 용인시로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았으나 불행히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남편의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자 딸은 다시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아들을 낳았다. 

결국은 아들이 두 명이 되었는데 각각 충청북도 진천군의 아들과 경기도 용인시의 아들이었다. 이후 허생원의 딸은 개가를 했는데, 용인에 사는 큰 아들이 진천으로 개가한 어머니를 모시고자 했으나 진천의 작은 아들이 극구 반대했다.

그래서 큰 아들은 하는 수 없이 관아에 소송을 냈다. 관아에서 이렇게 판결했다. 너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진천에 의부가 있으니 거기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 모시도록 하라고 판결을 했다,

이 말은 농업이 으뜸이었던 시절에 진천은 들이 넓고 기름지며 가뭄과 큰 물이 들지 않아 농사가 잘되여서 生居鎭川 생거진천(살려거든 진천 땅에 살고) 이라 했고, 

용인은 사대부들의 유택이 많은 산세가 준수한 땅이어서 死居龍仁 사거용인(죽은 후 용인 땅에 묻히라)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혼령으로 남의 육신으로 살아가야 했던 추천석을 바탕으로 옛말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그 사자성어의 의미는 충청북도 진천군은 물이좋고(풍수적) 살기 좋다는 뜻으로 生居鎭川 생거진천 

경기도 용인시는 죽어서 묻힐때(지리적) 명당으로 더 좋다는 말로 死居龍仁사거용인 이라 하지 않았을까?

용인땅을 걸어면서 신도시 일대에서는 새로운 도시 규모에 놀라서 정신이 없다가

한적하고 여유로운 봉두산 숲길을 걸어면서는 살아서는 진천땅 죽어서는 용인땅 이라는 전설을 길게 열공을 했다, 그래서 일까, 보이는 모두가 명당일 것 같은 묘지들이 보인다,

능선길은 계속해서 직진으로 이어 지지만 영남길은 아래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보이면

묘지 옆으로 해서 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 

산을 내려가니 이곳은 청주한씨 淸主韓氏 문중묘지라는 표석이 보인다, 여기는 한씨문중 선산 인가 보다,

묘지는 죽은사람의 유택이지만 묘지를 정성스럽게 꾸미는 일은 살아있는 사람의 몫이다, 묘터이던 집터이던 명당이라는 말은 과학적 접근으로는 설명이 안되지만 유학으로 살았던 시기 풍수지리설은 보편적인 믿음이였어니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묘지문화는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봉두산을 내려가면  용인시 처인구 마평동 400번지 일대다, 양지녁에 피여난 생강나무 꽃이 봄을 알려 주는 것 같다,

그리고 아너스빌이라는 새로 지은 집들도 있다,

마을앞 일직선으로 길게 이어지는 길은 신송로다  이 길로는 마을버스도 다닌다, 하루에 몇번을 다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길은 마을내 유일한 도로다,

마을버스 정류장이 마주보고 있는 이곳은 신평마을회관과 편의점도 있다,

이곳에 물류센터가 들어서는 것 같은데 주민들의 반대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다,

신평돌솥밥 집을 지나면 송학빌라가 이어지고 

송학빌라 앞은 마평14통 송학마을 이라는 표지석과 송학빌라 버스정류장도 있다,

송학빌라 106동을 지나가면

집들이 끝이나는 지점에

들녁이 이어지고

그 다음 마을은 송문제일교회가 있다,

여기는 송문2리인 모양이다, 

송문2리에서 양지천 송문교로 가는 방향으로는 고속도로공사를 하고 있다,

고속국도 제29호선 세종 포천간 건설공사 안성~용인 구간으로 SM경남기업 시공 현장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수도권 고속도로망 계획 중 남북 2축 지선으로 경부고속도로 및 중부고속도로의 기능을 보완하여 

수도권 주요 신도시 와 세종특별자치시를 연계하는 고속도로로 2024년에 완공 한다는 도로이며 왕복 6차로(30,6m)의 도로다,

공사가 진행중인 교각 아래 왼쪽으로 신 코다리집이 영업중인 곳에서

양지천 송문2교 앞에서 왼쪽 뚝으로 들어간다,

양지천변 길이기는 하지만

자전거 도로다, 인도는 없지만 자전거 길을 따라 간다,

양지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앞에 마을이 보인다

이곳이 양지면 남곡리다,

양지천 뚝길 끝 구양지교 앞이 영남길 제5길의 종점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영남길 제6길인 은이성지 마애불길이 어어진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맞어며 영남길 제5길을 마쳣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영남길 제5길은 11,6km인데 gps로 찍힌 거리는 11km이다, 

5길 종점에서 이어서 가는길은 6길이다, 구양지교를 건너 쉬리 모텔 건너 맞은편 오른쪽으로

최가네 밥집 앞으로 해서

용인현대차 A/S센터 앞

남곡2리버스정류장에서

10번 버스로 양지사거리로 와서 서울 남부터미널로 가는 1329 시외버스를 기다리는데 안내 전광판에는 곧 도착한다는 표시가 나오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버스는 내내 소식이 없다, 주민에게 물어 보았더니 버스 정류장을 큰 도로로 이전을 했다고 한다, 

버스 정류장을 이전한 곳으로 찾아와 30여분을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 남부터미널로 왔다, 구, 정류장에 버스정류장을 이전했다는 종이 한장만 붙여 놓았어도 기다리는 고생은 안했을텐데, 정말 어이가 없다, 이제부터 영남길 도보 여행자는 교통편과 전쟁을 치루어야 하나보다,

남부터미널에서 사당역으로 이동해 두부전골에 저녁을 먹었다, 오늘(2023, 03, 12) 영남길 제5길은 이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