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철원 모노레일 소이산, 2023, 05, 15, 본문
여기는 철원 노동당사 맞은편에 있는 철원역사문화공원 철원역이다, 이름은 철원역이지만 소이산으로 가는 모노레일이 왕복하는 역이다,
예전 철원역은 철원 평야 한가운데 위치했다, 1912년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의 연천~철원간 개통으로 문을 열었어며 1931년 금강산 전기철도의 개통과 함께 철원지역의 발전을 이끄는 중요한 역활을 했다,
경원선을 통해 사울 용산에서 철원역까지 2시간, 철원역에서 내금강까지 4시간 반이 걸리게 되면서 철원은 강원북부의 교통, 물류, 산업의 중심지가 되어 춘천 원주와 더불어 강원도의 3대 도시의 위상을 갖춘 지역으로 급성장 했어며 1937년 발행된 철원군지에 따르면 승하차 인원 약 28만명, 수하물 약 6만 3천통 가량이 철원역을 통해 운송되였다고 하며 역무원도 80여명이 근무 하였다고 한다,
철원역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소이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공원 입장료는 없고, 모노레일 이용료(어른 5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2000원)는 반 이상을 철원사랑상품권(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으로 돌려준다. 모노레일의 승차 인원은 8명이다,
현재 8인승 차량 4대가 운행 중인 소이산 모노레일은 하루 탑승가능 인원이 512명으로 제한돼 현장 발권은 물론 온라인 사전 예약도 쉽지 않다.
소이산 모노레일의 인기는 최근 강원도관광재단이 발표한 관광동향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난 2월 소이산 모노레일의 내비게이션 검색량은 전월 대비 56% 늘었고, 검색 순위도 355위에서 270위로 상승했다.
모노레일 덕분에 소이산 전체 방문객도 전년 대비 135% 늘었다.
이에 철원군은 예산 4억원을 들여 모노레일 차량 2대를 증편할 계획이다.
이달 중 차량이 입고되면 한 달간 시운전을 거쳐 이르면 5월 말경 투입될 전망이다. 차량이 증편되면 하루 탑승 가능 인원이 760명으로 늘어난다.
또 소이산 정상 부근에 있는 옛 미군 벙커와 막사등도 관광자원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철원군은 모노레일 증편은 물론 편의시설도 대폭 확충해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자원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소이산 모노레일은 역사문화공원에서 소이산 정상 부근까지 왕복 1.8㎞를 운행 중이다. 출발역이 철원역이라면 여기는 소이산역 정도는 되는 소이산 정상부 역이다,
소이산 정상부에서 모노레일을 내려 정상으로 올라간다, 여기서 정상부로 가는 길은 두곳인데 데크로 올라가면 전망대로 가는 길이고 데크길 아래로 보이는 평지길은 오르내림의 경사없이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데크길은 계단없이 경사로 만 이어진다,
소이산전망대를 지나서 야자 매트가 깔린 길을 나가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고
계단을 내려 가면 소이산 정상부에 있는 평화마루공원이라는 안내 입간판이 있다,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안내소도 있고
그 뒤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예전 미군막사가 금방이라도 허물어 질 것처름 서 있다,
계단을 올라 지하 벙커로 간다, 지하 벙커내에 전시되여 있는 625전쟁 작전기록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이기 때문에 최대한 본 문을 그대로 길게 옮겨적었다, PC나 노트북으로 보면 상세히 느낄 수 있겠지만 핸드폰으로 보면 내용이 방대해서 어떤 내용인지? 감이 안 올 수 도 있겠다,
파일드라이버작전 부터 살펴본다, 파일드리이버 작전은 1951년 5월 27일부터 6월 20일까지 전개되였는데 이 작전은 중공군의 2차에 걸친 춘계공세(1951, 4, 5)를 격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철원-김화-양구-간성을 연결하는 선으로 진격했다, 이 작전에서 국군 제3사단과 제9사단은 6월 11일과 12일에 철원을, 미 제25사단은 김화를 점령하고, 13일에는 미 제3사단이 평강에 진입하여 적정을 수집한 후 철 수 했다, 이 전투 이후 쌍방 어느편도 철의 삼각지대 전체를 장악할 수 없게 되였다,
아이스크림 고지↓ 는 삽슬봉의 별명으로 해발 219m의 얕은 산으로 극심한 포격으로 인하여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 듯이 흘러 내렸는데 이를 목격한 UN군들과 외신기자들이 이 곳을 아이스크림고지라는 별명을 붙였다, 일설에는 집중적인 폭격으로 인하여 수 많은 군인들이 아이스크림 처름 녹아 없어 졋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실제 이지역에서만 4~5만명에 육박하는 청춘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현재 아이스크림 고지는 생태계 보존이 아주 잘 되여 있어 자연환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자주 찾는다
철의 삼각지전투, 철의 삼각지대는 철원 김화를 저변으로 평강을 정점으로 한 삼각지대의 군사적인 호칭으로 신고산~평강으로 이어진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과 5번 국도가 이 지대에서 철원-연천-의정부-서울, 김화-포천-의정부-서울과 그 밖의 여러곳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다,
6,25 전쟁 당시에 북한군과 중공군이 나진, 성진, 원산항에 양륙된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투입한 공산군 최대의 중간 책원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철의 삼각(Lron Triangle)이라 부르게 되었어며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작전이 이 지대 일대에서 펼처졌다,
그 중에서도 쌍방의 전체적인 작전과 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중요 전투로는 파일드라이버(Pile Driver)작전 , 백마고지전투, 저격능선 전투 등이 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벌어졋다, 이 전투는 6,25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한 전초거점 쟁탈 작전이 전개되던 1952년 10월에 철원 북방의 고지를 방어하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과 맞서 9일 동안의 혈전을 치른 끝에 철의 삼각지대 일각을 끝까지 확보한 전투였다, 전투기간중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3개사단의 파상적인 공격을 격퇴하느라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1만여 명의 중공군을 격퇴하고 백마고지를 지켜 냄으로서 국군의 용맹을 전 세계에 떨친 전투다,
1952년 10월 6일 중국 인민 지원군은 제38군단의 6개 연대와 지원부대 병력을 합하여 총 병력 4만4,056명을 이끌고 철원 서북방 395고지를 공격했다,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예하의 제28, 29, 30연대 병력 2민명에 국군 제51, 52, 53포병대대,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군 제214자주포병대대, 미군 제955중포병대대. 미군 제73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9일 동안 12번의 공방전 끝에 중국군은 1만여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10월 15일 오전에 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을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로 군사 지정학상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심한 포격으로 고지의 모습이 백마白馬같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국군을 승리로 이끈 요인은 우수한 정보 활동과 보병과 포병 사이의 적절한 협동, 공군의 항공근접지원,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 등이다,
피의능선 전투기간은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3일까지다, 피의능선이란? Star and Stripes지가 지은 이름으로 3개의고지 즉 983고지, 940고지, 773고지와 연결된 산맥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말한다, 피의능선 전투는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양구 북방의 피의능선을 공격하여 북한군 제 12사단과 제24사단을 격퇴하고 목표를 점령한 공격전투다, 피의 능선에 대한 공격은 1951년 8월 17일 아침 한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였다, 8월 25일 10여일에 달하는 공격으로 능선을 점령했어나 다음날에 탈취당하고 말았다, 이 때 한국군 제36연대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그 뒤 미군 제24사단 4개 포병대대, 중형포 2개대대, 1개의 105mm대대, 2개의 중 박격포대대, 2개의 연대전차중대, 그리고 중형 전차대대 1개중대 등을 투입하여 피의능선에 공격을 감행했다, 8월 27일, 940고지에 있던 미 제9연대 제2대대가 983고지를 공격하였고 28일에는 제3대대가 동쪽 능선을 공격했어나 실패했다,
30일에는 제1대대 및 제2대대가 북쪽 940고지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감행하여 능선정상 수백m 전방까지 진출했다가 적의 사격으로 저지당했다, 이후 9월 3일까지 제1대대는 포병 및 공중의 지원을 받으며 이 능선을 수차레 걸쳐 공격하여 결국 견고히 구축된 적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3주일 동안 지속된 한 미 양군의 공격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 전투로 인해 국군과 미군은 1개 연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어며 북한군은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 북한군은 펀치볼 북쪽능선으로 물러갔어며 한, 미 양군은 피의 능선을 장악하여 백석산과 대우산 간의 측방도로를 확보했다, 당시의 격전지에는 1980년 11월 11일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가 세워졌다,
저격능선은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 남족에 있는 590고지로 능선의 규모가 작아 능선위에서는 소대단위의 기동이 가능할 뿐이다, 저격능선전투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벌어졌다, 이 전투는 1952년 가을철로 접어들면서부터 공산군이 대대적인 전초거점을 전개한 것에 대응하여 김화 부근을 방어허던 국군 제3사단이 저격능선을 목표로 감행한 공격작전이었다,
국군 제3사단은 오성산 남단의 저격능선 일대에 배치된 중공군 제15군의 방어진지를 공격하여 초전에 목표를 점령하고 이후 42일 동안이나 인해전술에 의한 끈질긴 역습을 반복하는 중공군을 물리치면서 저격능선 진지를 사수 했어며, 2대연대 병력을 잃은 중공군은 오성산 북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 전투의 특징은 쌍방 모두 목표를 탈취하기 위해 혈전에 혈전으로 이어진 소모전을 감행함에 있어 이로 인해 국군 제2사단은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손실되였고 중공군은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살상되였다, 이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와 함께 625전쟁사상 2대 격전으로 불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금화~금성간의 도로망 확보와 군사 분계선 설정시 유리한 지형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소이산 북쪽 산자락은 모두 지뢰지대다, 노동당사에서 국도 87호선을 따라 대마리로 향하는 길 양쪽은 옛 철원의 시가지 였지만 지난 60여년 동안 지뢰통제 구역으로 묶였다, 그동안 묵 논은 습지로 묵 밭과 집터는 숲으로 바뀌였다, 소이산 자락에서 출입 영농을 하는 현응기(71)씨는 지뢰지대 안에 고사리와 고라니가 많지만 폭발 사고가 나 사람들이 들어가길 꺼린다 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대한 생태조사도 이뤄진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소이산의 생태적 가치는 훼손이 심한 산 위보다 산자락의 지뢰지대가 높을 것으로 본다, 도로를 따라 지뢰지대를 보면 아까시아나무, 버드나무, 신나무와 함께 마을에서 심어 기르던 호도나무, 뽕나무 등도 눈에 띈다, 소이산 건너편의 지뢰지대는 넓은 초지를 키 큰 포플러와 졸업생을 냈던 철원공립보통학교 터다, 운동장은 초원이됐고 귀퉁이는 고랭이 부들 등이 자라는 습지가 됐다,
온대지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의 간섭이 중단된채 생태계의 전이와 복원이 이뤄진 곳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그러나 이곳이 어떤 가치를 지녓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소규모 지뢰지대여서 인접한 도로와 군 부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쟁의 유물인 지뢰밭이 지킨 숲의 가치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김명진 국립환경과학원 자연평가연구팀장은 최근 민통선 지역인 백암산에서 희귀한 사향노루 서식지가 발견된 것처름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민통선 인근 지역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생태적 가치가 발견될 잠재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지하벙커를 나와 지상 벙커로 들어가 보려고 했어나 문이 잠겨있다
지하벙커와 지상벙커가 있는 곳 위는 소이산 정상(해발 362m)이다, 소이산은 철원평야에 우뚝 솟은 작은 산으로 동경127도12분 북위 38도15분 지점인 철원읍 사요리에 위치한다, 산정에는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출현을 알리던 제1로 봉수대가 위치했던 곳이며 한국전쟁 이전 화려했던 구 철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철원역사의 중심지로 소이산 정상에서는 백마고지와 김일성고지(고암산), 철원역, 제2땅굴, 노동당사는 물론 최대의 철새도래지 와 철원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 안내판 내용을 그대로 옮김 -
철원평야 각 방향의 지명도 적혀있어나 글자가 바래서 일아볼 수도 없다,
그래서 감으로 각 방향으로 보면 제일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은 멀리 금강산 방향으로 강원도 김화군, 금강군, 창도군 방향일 것 같고
정 중앙으로 보이는 방향은 철원군(이북) 평강군, 일대로 추정되며
왼쪽으로는 백마고지 와 김일성 고지가 있는 방향일 것 같다,
그리고 남쪽으로 돌아보면 철원의 진산인 금학산과 고대산 일대가 보인다,
소이산 정상부는 모두 데크를 깔아 놓았는데 데크 아래는 지하벙커가 있다, 그리고 전면에 보이는 산 들 중에서 제일 높은 산이 철원의 진산인 금학산이다, 금학산은 2018년 11월 11일 11시 11분 11초, 11이란 숫자가 10개나 들어간 날에 올랐던 산으로 그날이 11월 초순임에도 정상에서 첫눈을 맞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산이다,
소이산 정상에서 내려간다, 보이는 큰 건물은 미군 주둔시 막사로 사용하던 건믈이다,
내려가면서 보이는 숲에는 등나무 꽃이 만개해 있다,
막사 앞으로 해서
입구로 내려가다보면 오른쪽에는 녹슨 철모와 낡은 군화, 등도 전시되여 있다,
소이산 전망대로 가는길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 봉수대 오름길이라는 안내도 있는 곳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면
소이산 전망대로 가는길이다, 전망대는 정상 출입이 통제되였던 시절, 철원 일대를 돌아보던 곳이지만
지금은 정상이 개방되여 있어니 정상보다 더 많은 곳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망대 앞에 한탄강지질명소 철원용암대지에 대한 설명도 있다, 그대로 인용하면 펄펄 끓는 용암은 어디서 왔을까요? 철원용암대지는 신생대 제4기 현무암의 용암류가 열아분출 방식으로 형성된 화산지형이다,
철원용암대지를 구성하는 현무암의 형성시기는 약 54만년전에서 12만년 전 사이로 추정한다, 이 용암류는 서울과 원산을 잇는 추가령구조선 하부의 연약한 지점인 오리산과 608m고지를 잇는 선을 따라 솟아올라 물처름 넓게 퍼저 흐르면서 철원일대의 계곡과 낮은 부분들을 메우면서 현재와 같은 용암대지를 형성 시켰다,
철원용암대지 내부에는 야트막한 독립 구릉이 여러개 존재한다, 이는 용암이 지표를 메워 평탄한 용암대지를 형성할때 기존의 산지가 용암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고 용암대지위로 섬처름 돌출한 채로 남겨진 것이다, 이러한 지형을 스텝토(steptoe)라고 부른다, 이 스텝토들은 입지적 이점이 많아서 군사적으로 매유 중요하며 625전쟁 당시 격전이 벌어졋던 장소기도 하다,
전망대를 내려가면 모노레일 소이산 역이다, 여기서 철원역으로 다시 내려가야한다,
내려가려는 사람들은 많은데 모노레일은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기다가 모노레일 한 대에 탈 수 있는 인원은 8명으로 제한되여 있어 많이 기다려야 하는게 불편하기는 하다,
모노레일을 기다리는 동안에 돌아 본 소이산 전망대로 가는 데크길은 갈 지之 자 길이다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 가면서 보이는 철원 노동당사(국가등록문화재) 맞은편, 2021년에 새로 조성한, 철원역사문화공원이 내려다보인다, 이 모노레일도 철원역사문화공원 활성화 계획의 일부다,
1930년대 철원읍 사진으로 보면 노동당사가 있는 이 일대가 철원의 중심지였다,
철원이 번성하던 근대의 시가지 풍경을 재현한 이곳에는 철원역을 중심으로 학교, 우편국, 극장, 의원, 여관, 기와집, 초가집 등이 들어섰다.
철원 금융조합도 있다, 철원금융조합은 철원의 근대 금융기관으로 1906년 농공은행조례가 발표되면서 강원도에서 근대적 의미의 금융기관이 설립되였다,
농공은행은 농업, 공업,의 개량을 목적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한 지방은행으로 강원도에서는 1906년 춘천에 설립되였어며 철원에는 1912년 한호농공은행 철원지점이 설립되면서 철원지역에 근대적 금융기관이 등장했다,
1914년 경원선 부설이후 철원군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1936년에는 식산은행 철원지점, 동주금융조합, 철원금융조합, 철원제2금융조합 등 4개의 금융기관이 설립되어 운영 되였다,
이들 은행들은 형식상 서민들을 위한 은행 이었어나 일본 국채로 운영되였기에 식민성, 수탈성을 가진 금융기관이 었다
당시 갈대나 새, 볏집등으로 지붕은 인 집인 초가집은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우리민족의 전통주택 이다 초가집은 지붕의 재료가 가벼워 구조체가 굵지 않아도 되고 단열도 잘 되기 때문에 여름에는 더운기운을 차단해서 시원하고 겨울에는 차거운 기운을 막아 온기를 유지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서 초가집의 형태도 약간씩은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강원도 지역의 초가집은 "ㄱ" 자 모양을 갖춘형태다,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마루를 둔 형태인 강원지역 초가집은 북부지방보다는 따뜻하고 남부지방보다는 춥기 때문에 마루가 좁고 창문이 작다는 특징이 있다,
근대의 기와집은 전통적인 기와 집과는 달리 서양식 응접실이나 주방등이 내부에서 연결되어 불편함이 줄어진 형태로 만들어 졋다, 철원에는 일본인과 함께 조선인 자본가 들이 많이살고 있었기에 일본인들은 일본식 건물에서 조선인 자본가 들은 오래된 기와집을 서양식으로 고쳐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인 자본가들이 살았던 근대 기와집은 사랑채와 건너방이 복도로 연결되기도 하였고 욕실이나 변소등이 내분에 설치되는등 전통적인 기와집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현관과 함께 유리문이 사용되어 이전 시기의 기와집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철원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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