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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1600년 세월의 강화 전등사(2023, 07, 09) 본문

국내 山行日記/문화유산투어

1600년 세월의 강화 전등사(2023, 07, 09)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3. 7. 27. 00:00

삼랑성 서문에서 전등사로 들어가면서 

처음올 만나는 곳이 강화정족산성 진지다,  江華 鼎足山城陣址 강화 정족산성진지강화군 전등사에 있는 조선시대 정족산 사고를 수호할 목적으로 조선중기 이후 설치된 국방시설로. 2014년 4월 16일 인천과역시의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된 곳이다, 

정족산성진지는 1907년 방화로 전체 소실되어 평탄지로 있던 곳을 2008년 발굴조사하여 11개소의 건물지를 포함 대규모 유구를 발굴했다. 1870년대 이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족산성진 지도에 표현되어 있는 내사, 진사, 포량고 등의 건물지와 담장시설, 문지 등을 대부분 확인했어며. 발굴된 일부 건물지의 경우 정족산성진 설치 이전인 1784년(정조 8년)에 건립된 정족창과 관련된 건물지로 파악된다.

정족산성진지에서 내려다 보는 전등사,

정족진지내 100m 거리에 있는 전등사 팥배나무 이야기도 있고

정족산성진지 앞 방향 표식에서 지금 내려 온 문이 서문이라고 알려준다,

전등사로들어간다, 왼쪽은 적묵당 이고 오른쪽은 요사채 다,

그다음에 있는 왼쪽의 종무소와 오른쪽 무설전 사이로 들어가다가

무설전 앞 마당 장독이 있여 울터리 넘어로 들여다보니

무설전은 이렇게 보이는 건물로 문은 잠겨 있다,

무설전 앞쪽에는 전등사 종루가 있다, 

종루옆 솟대에 걸려 있는각종 깃발과 그 앞으로

수령 400년 느티나무도 있다,

이 느티나무는 광해군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15년에 재건 하면서 풍치목으로 심은 나무로 추정되는 대웅전 앞 뜰에 있는 나무다,

대웅전에서 서 북쪽으로 관음전과 약사전, 그리고 명부전이 있다, 중앙에 있는 약사전은 조선중기의 보물 179호 로 지붕의 막새 기와 중에 1896년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중수했다는 명문이 새겨져있고, 또 건물의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대웅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전등사 종루다, 전등사는 종각과 종루가 있는데 전등사 철종은 보물 제393호. 높이 1.64m, 입지름 1m. 명문을 통하여 제작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철제 종이다. 종의 정상에는 좌우에 雙龍 쌍룡 이 한 몸으로 등을 지고 웅크려서 꼭지를 이룰 뿐 우리나라 동종에서 보이는 용통(혹은 음통)은 없다. 

전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다. 重創記文 중창기문에는 381년(소수림왕 11) 阿道和尙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 보물 제178호다, 1916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樣間錄 양간록 에 따르면 이 건물은 1605년에 일어난 화재로 일부가 불타버린 뒤 1614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 완전히 소실된 것을 당시 寺僧 사승 이었던 지경이 이듬해에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에 완성했다,
 
한편 1855년(철종 6) 화주(化主) 규형(奎瑩)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했다는 傳燈本末寺誌 전등본말사지 의 기록과 지붕을 덮었던 기와의 명문 중에 1876년(고종 13)  孝月化主 효월화주가 대웅전과 약사전의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조선 중기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전등사는 대웅전 기둥의 네 귀퉁이 위에는 추녀를 받들고 있는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한데 이 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광해군 때 이 법당을 지었던 都片手 도편수 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그가 불사에만 전념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버리자 도편수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을 하지 않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법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는데, 기둥 위에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하여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또 머리 위에는 무거운 지붕을 얹어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을 배반한 여인에게 복수를 했다는 내용이다

잠시 전등사 대웅전 법당도 들여다 보고

대웅전에서 종루와 400년 느티나무를 돌아 보면서

대조루 아래 계단으로 대웅전을 나간다,

계단으로 나와서 올려다 보는 대조루에는 전등사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옆 왼쪽에는 종루도 있다,

대조루 앞 비탈면에 피여있는 수국을 보면서

전등사 남문 방향으로 나가다가 다시 돌아보니

흐트러 지게 만개한 수국과 함께 어우려지는 대조루가 멋스럽기만 하다,

남문으로 내려 가는길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은행나무도 있는데 이 은행나무는 수령700년의 고목으로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 이야기가 전해오는 나무로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배불승유의 정책으로 전국 사찰은 조정으로 부터 여러가지 박해를 받게 되는데 승려는 성곽을 쌓거나 다리를 넣는 일에 사역을 나가야 했고 사찰에서는 제각기 특산물을 공물로 받쳐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해에 관아에서 전등사 입구에 잇는 은행나무에서 수확량의 두배를 공물로바치라고 한다고 동자승이 노승에게 전했다, 전등사 노승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풍년이 들어야 열 가마니인데 스무 가마니를 공물로 내라고 하니 고민 끝에 노승은 도술이 뛰여난 백련사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동자승을 추송스님에게 보냈다, 

동자승과 함께 온 추송스님은 은행나무 열매가 더 열리게 하는 3일 기도를 착수 하였어며 마지막 날 늦은 오후에 은행나무 앞에서 3일 기도가 막바지에 다다 르자 축원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축원의 내용은 두 그루 은행나무가 앞으로 천년만년 열매를 맺지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축원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원이 끝나자마자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천둥번개와 함께 돌풍이 몰아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관군들과 모여았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땅바닥에 엎드렸다가 고개를 들었을 땐 기도하던 추송스님과 노승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졋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했다, 이후 이 은행너무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았어며, 긴 세월의 풍상과 역사의 상처를 안은체 오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남문으로 나가는 길 오른쪽 언덕에 浮圖塔 부도탑이 있다, 부도탑이란? 덕이 높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둥근 돌탑으로 승려들의 무덤이다,

남문으로 나간다, 남문은 우마가 다닐 수 있는 유일한 문으로 전등사의 정문 이다, 남문은 다른곳 성문과는 달리 차가다닌다

톱풀 꽃이 곱게 핀 곳 위쪽은 조금전 서문에서 전등사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성곽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 왔다면 남문 오른쪽으로 오게 된다,

남문을 나가서 주차장으로 내려가

전등사 남문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 식당에서 도가니탕으로 점심을 먹고 30여분이나 기다렸다가 탄 버스는 50분만에 강화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3000번 버스로 등촌역까지 장장 1시간 이상 걸려서 돌아 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강화도로 다녀온 버스 이동 시간만 약 5시간 정도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