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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 화성 융릉과 건릉, 화성박물관 2023, 07, 16 본문

국내 山行日記/문화유산투어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 화성 융릉과 건릉, 화성박물관 2023, 07, 16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3. 8. 4. 00:38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27세의 나이에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개칭한 뒤, 배봉산 기슭에 있던 무덤을 1789년(정조 13년) 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했다.

 

조선 최고의 명당에 조성된 융릉은 추존왕이라는 사실에 무색할 정도로 장중하고 화려하다. 봉분 아랫 부분에는 연꽃 문양이 조각된 섬세한 병풍석을 둘렀고, 능 앞에는 팔각형과 사각형의 석등 양식을 결합한 장명등을 세웠다. 묘역의 불을 밝히는 장명등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 장명등은 조선 왕릉에 있는 장명등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다.

융릉 서쪽 울창한 숲길 너머에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융릉 동쪽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그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1821년(순조 2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봉분에 난간석만 둘렀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융릉의 분위기와 매우 흡사하다. 매년 4월에는 융릉 제향이, 5월에는 건릉 제향이 있다. 주차장에서 隆융 健陵 건릉으로 들어간다,  

융 건릉입구 안내소에서 입장권 매표를 하고, 안내소에 있는 역사문화탐방여권 스템프를 날인 후

융, 건릉의 종합 안내도 도  둘러보고

융릉과 건릉에 대한 안내문도 살펴보고 나서 융릉과 건릉 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간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은 조선(1392~1897)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의 황제와 황후 73명의 무덤을 통틀어 가르키는 말이다, 능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릉조성과 관리에 효와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 했다,

풍수 사상에 따라 최고 명당에 왕릉 자리를 정하고 주변 지형과 경관을 그대로 살려 능을 만들었다, 왕릉을 짓고 관리하는 일을 상세하게 적은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고 지금도 각 릉에서 해마다 제향을 지내며 전통을 잇고 있어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인정 받고 있다,

사도세자인 장조와 정조의 가계도

현릉원의 조성에 관한 기록과 정조와 효의황후 건릉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곳 화성에는 융릉과 건릉이 나란히 있다,

융릉은 조선 21대 왕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조(사도세자, 1795~1762)와 헌경왕후 홍씨(혜경궁, 1735~1815)의 능이다,

융릉 곁에 있는 건릉은 장조의 아들 조선22대 왕 정조(1752~1800, 재위 1776~1815)와 효의 왕후 김씨의 능이다,

1789년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겨 왔어며, 정조 자신도 이곳에 무덤을 만들고자 했던 뜻을 밝혀 1800년 정조의 건릉을 이곳에 만들면서 융릉과 건릉이 나란히 있게 되였다,

융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소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빼곡히 숲을 이루고 있다,

장조와 헌경황후가 잠들어 있는 융릉, 장조(1735~1762)는 조선21대왕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이자 22대왕 정조의 친 아버지로 사도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735년에 태여나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고, 1749년 15세 때부터 영조를 대신해 나랏일을 돌보는 대리 청정을 했다, 그러나 장조는 아버지 영조와 괸계가 좋지 못했고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 병을 얻었다,

결국 1762년 왕세자 신분을 박탈 당하고 뒤주에 갇혔다가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아들 왕세지 신분을 회복시켜 사도세자라 부르고 양주 배봉산(현 동대문구 휘경동)에 수은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 왕세손이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사도세자의 이복 형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게 하여 훗날 왕위를 잇게했다,

1776년 정조는 22대왕의 자리에 오른 뒤 친아버지의 무덤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을 높였고 1789년 영우원을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로 만들고 이름을 현륭원이라 고쳤다, 이후 대한 제국 1대 황제 고종이 1899년 11월에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장종이라 부르고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

또한 현릉원도 격을 높혀 융릉이라 고처 부르게 했어며 곧이어 12월에 다시 장종을 황제로 추존해 장조라 부르게 했다, 이로서사도세자는 죽은 뒤 아들 정조에 의해 왕릉에 버금가는 무덤을 가지게 되었고 고종대에 이르러 세자에서 왕으로 왕에서 황제로 지위가 바뀐다,

헌경황후 홍씨(1735~1815)는 1744년 왕세자빈에 책봉되어 1752년 원손(훗날 정조)을 낳았다, 1762년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혜빈이라 불리다가 1776년 정조가 왕이 되면서 궁호를 혜경궁이라 하여 혜경궁 홍씨로 알려졋다, 1815년(순조 15년)세상을 떠나 사도세자 현릉원에 함께 모셨는데 1899년 사도세자가 왕으로 또 황제로 신분이 높아짐에 따라 혜경궁도 헌경왕후, 그리고 헌걍황후로 신분이 바뀌였다,

현륭원은 정조가 1789년 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영우원을 풍수좋은 곳을 찾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오면서 새로 지어 올린 이름이다, 사도세자의 신분을 왕으로 높이고자 했어나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현륭원을 왕릉에 버금 가도록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대 황제가 된 고종은 직계 선왕들의 신분을 황제로 높이기 시작했다, 이때 사도세자를 왕으로 높혀 장종으로 현릉원은 융릉으로 높혔고 곧이어 장종을 다시 황제로 높혀 장조라했다,

 

장종과 헌강황후의 현륭원 표석이 있는 오른쪽 비각으로 간다, 현릉원 표석은 1789년(정조 13)양주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원의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꾸고 세운 표석이다,

비문은 "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릉원" 이라 는 음각 비문이 적혀 있다,

현릉원 비문 역문은 사도 수덕돈경 흥인경지 장헌세자는 승정기원후 108년(1735)1월 21일에 탄생했다, 처음 원자에 봉해지고 병진년(1736)에 왕세자로 책봉 되었어며 기사년(1749)에 대리청정의 명을 받았다, 임오년(1762) 윤 5월 21일에 홍서하였다, 나이는 28세이다, 

 

시호를 추증하여 사도세자라 하였고 같은해 7월 23일에 양주 남중랑포 배봉산(현 동대문구 휘경동 매봉산)언덕에 장사 지냈다, 소자(정조)가 왕위에 오른 해(1776)에 추존하여 시호를 장헌세자, 원호를 영우원이라 올렸고 계묘년091783)에 존호를 수덕돈경이라 올렸어며 갑진년(1784)에 존호를 흥인경지라 올렷다, 기유년(1789) 10월 7일에 수원 화산의 계좌(북북동) 언덕으로 무덤을 옮기고 원호를 현릉원으로 고쳤다,(안내문에서 옮김)

홍살문으로 나간다, 홍설문 옆 안내판에는

사적 융릉은 추존 장조와 헌경황후의 릉이다, 라는 설명이 있고 잘 보이지는 않지만 융릉 상설도에 관힌 기록도 있다, 

1 곡장, 2 석호, 3능상, 4 석암, 5 망주석, 등등 번호를 매겨 안내를 해 놓았어나 지금으로서는 얼른 이해 가 안되는 난해한 설명들 이여서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는다, 

융릉을 나가면서 한번 더 돌아보고

들어 온 길로 건릉으로 간다,

유독 소나무가 많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소나무에 대한 설명도 있어 소개하면 소나무는 우리와 가장 친숙하고 가장 흔한 바늘잎 나무로 옛 사람들은 흉년이 들어 먹을거리가 모자라면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꽃가루를 털어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좋은 소나무는 임금님의 나무널로도 쓰였어며 오랫동안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면서 쓰임이 많았던 나무지만 숲이 우거지면서 다른 나무와도 경쟁에 밀리고 

재선충을 비롯한 병충해가 많아 이 땅의 소나무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곳에는 소나무와 함께 가장 많이 보이는게 상수리 나무인데 상수리 나무에 대한 설명도 있다, 상수리 나무는 참나무과로 도토리가 매달리는 가장 흔한 참나무 종류다, 

지금은 도토리로 묵을 만들어 먹을뿐이지만 옛날 흉년이 들 때는 배고픔을 달래는 중요한 먹거리였다,

나라에서는 도토리를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는데 나무는 재질이 굳어 기둥이나 농기구등에 두루 쓰인다,

융릉과 건릉은 입구에서 들어오면 오른쪽에는 융릉이 왼쪽에는 건릉이 있다, 사도세자의 융릉을 먼저 돌아보고 정조와 효의 황후 가 잠들어 있는 건릉으로 왔다, 건릉은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와 효의황후 김씨(1753~1821)의 능이다,

1800년에 세상을 떠난 뒤 정조는 정종이라 불리며 능은 펑소 아버지 가까이 묻히길 원했던 뜻에 따라 현륭원 동쪽에 만들고 건릉이라 불렸다, 그러나 1821년 순조 21년에 왕비 효의황후의 능을 만들때 건릉을 현륭원의 서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효의황후 김씨는 1762년(영조38) 정조가 왕세손일 때 왕세손빈에 책봉되었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어며, 1821년 세상을 떠나 효의황후로 불렸다, 정조의 건릉에 함께 모시려 했어나 능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해서 건릉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함께 모셨다, 1899년 정조가 황제로 추존되면서 효의왕후도 효의 황후로 불리게 되었다,

건릉 초장지와 부장품 건릉초장지는 정조가 처음 묻혔던 왕릉 터를 말한다, 1800년 6월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릉원 곁에 묻히고자 했던 정조의 뜻에 따라 현릉원 주변에서 능 자리를 살폈다, 정조는 평소 수원 향교 자리를 능자리로 염두에 두었어나 1800년 1월 마지막 현릉원 원행길에서 강무당(무예 강습소)이 있던 자리 위쪽을 능자리로 점 찍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현릉원의 동쪽 두 번째 산줄기인 강무당 뒤 언덕에 정조를 모신후 건릉이라 불렸다, 1821년 효의 황후가 세상을 떠나 건릉에 함께 모시려 했는데 대신들이 강무당 뒷산은 땅의 기세가 약하고 지대가 낮고 습하여 사철내내 마르지 않고 무기 창고가 있던 자리였기에 좋은 곳이 아니라고 했다, 

또 정조가 이곳을 점 찍을때 산림이 빼곡해 현장을 직접 가보지 못했어며 실제로 보았어면 능 자리로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정조가 원래 능 자리로 염두에 두었던 수원 향교 터로 능을 옮겨 효의 황후와 함께 모시기로 했다,

새 건릉자리와 옛 건릉 자리가 서로 가까워 석물과 건물은 그대로 옮겨와 사용했어나 명기를 비롯한 부장품은 물에 잠겨 새로 만들어야 했다, 건릉을 옮길때 능을 열자 관과 구덩이 사이에 다져 넣었던 석회가 모두 물을 머금고 있었어며 함이 물에 잠겨 대부분의 부장품에 물이 스며들어 젖어 있었다고 한다,

물에 잠겼던 부장품들은 그 자리에 다시 묻고, 옮겨 간 새 능에는 부장품을 새로 만들어 넣었다, 2011년 옛 건릉 자리를 발굴했을때 그릇 루를 포함하여 일부 부장품을 거두었는데 1800년에 펴낸 정조의 "국장도감의궤" 와 비교 해 보면 발굴 유물과 기록이 거의 일치했다

정자각으로 들어간다,

정자각은 제향를 올리는 건물이다,

정자각 내에는 제향를 올릴때 사용하는 제향상이 있어며 제향 상차림과 제향를 올렸을때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자각 뒤에서 건릉을 올려다 보니 언덕이 높아서 봉분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은 정자각 오른쪽 비각이 있는 곳으로 간다,

비각에는 1기의 건릉 표석이 있다 이 표석은 1900년(광무 4)정조가 황제로 추존된 후 기존에 세운 표석을 갈아서 다시 만든 표석으로 楗陵 건릉 碑文 비문에는 "대한 정조 황제"로 시작한다,

건릉 비문 역문은 정조 경천명도홍덕현모 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는 개국361년(1752) 9월 22일에 탄생하여 기묘년(1759)에 왕 세손에 책봉되었고 을미년(1775)에 대리 청정을 하였다, 재위는 24년이고 나이는 49세다,

같은해 11월 6일에 화성 융릉 동쪽 두번째 산등성이 해좌(북북서)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신사년(1821) 9월 13일에 융릉 오른쪽 산등성이 자좌(북) 언덕으로 능을 옮겼다, 

광무3년에 존호를 경천명도흥덕현모라 올렸고 같은해 11월에 추존하여 공손히 시호를 선황제, 묘호를 정조라 올렸다, 

황후 장휘 예경자수 효의산 황후 김씨는 개국 362년(1752) 12월 13일에 탄생하여 임오년(1762)에 세손빈에 책봉되었고 병신년(1776)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대비가 되었어며 신사년(1821)3월 9에 승하 하였다, 나이는 69세이다,

건릉을 뒤돌아 보고 나서

건릉을 나가면서 왼쪽으로 보면 제향을 올릴때 준비한 제수용품을 일시 보관하는 곳도 보인다,

건릉 홍살문을 나간다,

이제는 융릉과 건릉 사이에 있는 중앙 광장으로 간다, 이곳에도 무슨 이름은 있는데 나는 그냥 편하게 중앙광장이라 부른다, 

융건릉 약도를 보면 왼쪽이 건릉이고 오른쪽은 융릉이다, 그리고 약도상에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은 융 건릉 산책로이며 가운데 구릉지가 중앙광장이다,

중앙광장으로 가는 길은 융 건릉 입구에서 들어와 첫 갈림길에서 직진이다, 오른쪽은 융릉이고 왼쪽이 건릉이다,

중앙광장으로 가는 길에도 소나무와 잣나무가 무성하게 있는데 여기는 잣나무에 대한 안내가 있다, 잣나무는 소나무과로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 만주, 연해주에 걸쳐 자라는 바늘 잎 나무다, 잣나무에는 잣나무 열매인 잣이 달린다,

잣은 영양가 가 높은 고급 보양식품이지만 일본이나 중국 대륙에는 잣 나무가 없다, 옛날 당나라로 유학가는 신라 유학생들은 잣을 한 짐 메고가 학비에 보탰다고 한다, 나무는 붉은 빛을 띠어 흔히 홍송이라 부르며 재질이 좋아 기둥이나 고급상자의 재료로도 두루 쓰인다,

이렇게 평평한 길을 잠시 따라가면

너른 평지가 보이는데 여기가 중앙광장이다,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는 안내가 없어니 알 수 없다,

이렇게 보이는 앞쪽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으로 연결이 되고 직진으로 들어가는 길은 융 건릉 산책로다,

여기서는 뭐 특별히 보아야 할 장소는 아닌듯 하다, 

이렇게 소나무와 잣나무가 있는 길을 따라 나가면

융 건릉 박물관이 있고 박물관을 나가면 정문이다,

정문으로 나가다가 박물관 맞은편에 한옥 건물이 있어 들어가 보니 융 건릉 재실 이었다,

재실로 들어 가 본다, 약도를 참고하면 

중앙에 있는 이 건물이 재실이다, 재실은  평상시에는 능역을 관리하며 수호하는 능참봉과 직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로 지금으로 말하면 능역 관리소다, 또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재실 앞에 길게 보이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행랑청으로 대문과 하인방, 마구간, 창고, 집사방, 등이 있는 건물이다,

또한 재실은 제례에 앞서 재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參奉참봉(종9품)등 관리가 이곳에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보았다, 주요 재실 외에 香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 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祭器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등이 있어며 재실은 단청을 하지 않는다

마당 가운데는 오래된 향나무도 있으며 천연 기념물이 있다는 안내도 있다, 천연기념물은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華城 隆陵 개비자나무)다, 비자나무와 비숫하게 생겨서 개비자란 이름이 붙었다,

남해안의 따뜻한 곳에 자라는 비자나무보다 훨신 추운 중부지방까지도 올라온 나무다, 잎 넓은 활엽수 숲의 그늘 밑에서 흔히 만나는 키 작은 바늘 잎 나무다, 

여러 포기가 한꺼번에 모여 자라기를 좋아하며 머리 빗 모양의 잎이 非자 모양으로 뻗고 주홍빛 열매가 아름다워 정원수로 잘 심는 나무다,

행랑채 가운데로 있는 대문으로 나간다, 오른쪽에 하인방이 있고 왼쪽에는 창고도 있는게 보인다,

대문을 나와서 돌아보니 대문 일직선 상에 재실이 있는게 보인다,

재실 대문에서 나가면서 보면 융 건릉 박물관 왼쪽이 융건릉 출입구다, 

화성 융 건릉 기록은 여기까지다, 릉앞 사거리 융건릉, 용주사입구 버스정류장에서 35번 버스로 송산동입구 정류장으로 가서, 화성박물관이 있는 팔당구청으로 가는 25번 버스를 1시간이나 기다렸다가 화성행궁 광장으로 도착 했다,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 행궁은 전국에 조성한 행궁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경복궁 만큼이나 아름다운 華城行宮은 1796년 정조 20년에 창건했어며 2002년에 복원했다,

정조 13년(1789)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 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했다.

행궁광장 앞 종로사거리 여민각이 있는 곳에서 행궁 직선으로 창룡대로를 따라 가다가 

100m 앞에 있는 수원천 매향교를 건너간다,

매향교를 건너 가면서 보이는 수원천 상류, 수원천 양쪽에는 수원천 산책길도 있다,

매향교 건너에 수원 화성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으로 들아가는 입구 공원에 10여개의 선정비가 있다,

善政碑 선정비는 좋은 정치를 베풀었던 지방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송덕비 또는 불망비라고도 부른다, 중동사거리를 비롯한 수원 곳곳에 훝어져 있던 비석을 모아서 박물관 야외에 전시하였다, 라는 안내가 있어며 입구에 전시되여 있는 10기의 선정비는 아래와 같다,

화성박물관인 이곳에 10기의 선정비가 있고 수원박물관 야외에도 27기의 선정비가 있다는데 선정비는 휼륭한 정치를 베푼 관리의 공덕을 기려 백성들이 스스로 세워주는 비다, 

그러나 우리나라 곳곳에 수도 없이 많은 선정비가 모두 백성들이 스스로 세운 것은 아닐게다, 그때나 지금이나 탐관오리들 비석은 관리들이 백성들을 동원해 억지로 세운 경우도 많았을 것이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화성을 쌓을때 사용했다는 기중기도 있다,

유물만이 아니라 지금 사용해도 좋을 것만 같은 도르래를 이용해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 성곽을 쌓은 토목 기술은 400년 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셧는지? 상상을 뛰어 넘는다,

수원 화성박물관 규모로만 보면 초대형 박물관이다,

박물관 입구 로비에서 문화유산탐방 여권 스템프를 찍고 나서 2000원의 관람료를 내고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오늘 융건릉 입장료 1,000원과 이곳 박물관 입장료 2,000원을 지불했는데 물론 무료이용이 가능하지만 매표를 하고 둘러보았다, 그게 마음이 편해서 늘 그렇게 이용한다,

지금부터 보이는 사진 자료들은 화성박물관에 전시되여 있는 기록물 들이다,

1793년 1월 정조는 시도세자의 묘소인 현릉원 참배를 위해 수원으로 행차하였고 이때 수원 도호부를 특별히 유수부로 승격 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수원유수는 장용외사와 행궁정리사를 겸하게 하고 판관을두어 유수를 보좌하게 하는직제 개편도 단행하였어며 수원유수는 다른 유수들 보다 한 품계 높은 정2품의 관직이 되였다,

정조는 초대 수원 유수로 좌의정을 지낸 채제공을 임명해 신설된 수원유수의 기틀을 다지게 하였고 수원화성 축성 등 큰 과업을 앞 두고는 어영대장을 지낸 조심태를 제3대 수원 유수로 삼아 그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여 수원 유수부의 성장과 발전의 토대를 딱았다,

화성 박물관에 전시되여 있는 각종 자료들을 설명없이 아래에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