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낙선재와 희정당 일원의 창덕궁, 2023년 7월 23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문화유산투어

낙선재와 희정당 일원의 창덕궁, 2023년 7월 23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3. 8. 9. 00:32

경복궁역에서 지하철로 1정류장 안국역 3번 출구에서 창덕궁으로 가는길 현대건설 사옥을 지나가면서 보니  여기는 계동궁터라는 표석이 있다,

현대건설 일대는 

현대원서 공원이다,

또한 이 일대는 사도시 터로 조선시대 궁중의 미곡과 장 등의 물건을 맡은 관청으로 1392년(태조1) 고려의 제도를 따라 요물고를 설치 하였다, 이후공정고, 도관서로 바뀌였다가 사선서에 흡수 되었어며 시도시라 개칭되였다, 1882년(고종19)에 폐지 되었다,

현대공원이 끝나면

창덕궁 돈화문이 있다,

창덕궁 담장 바깥에는 예전에 안 보이든 창덕궁 매표소가 이렇게 새로 만들어저 있어 여기서 매표를하고

돈화문으로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돈화문으로 들어가면서 왼쪽에 있는 이 나무가

창덕궁 회화나무 군으로 천연기념물이라는 안내도 보인다, 내용은 돈화문 안마당 양쪽에 있는 회화나무 8그루는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높이는 15~16m이고 가슴 높이의 줄기둘레는 0,9~1,8m이다, 나이는 약 300~400년으로 추정된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2층목조 건물이가, 왕이 행차를 하거나 국가행사를 치를 때 드나든 문이고 신하들은 서편의 금호문으로 드나 들었다, 남쪽에 종묘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돈화문은 궁권릐 남서쪽 끝에 세워 졌다,

창덕궁에도 금천이 있다, 금천교 밑을 흐르던 창덕궁 금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한 북영천(北營川)이다.원래는 지금의 청계3가부근에서 청계천으로 바로 합류했다. 그러나 1421년(세종3년)에 원래 종로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회동천의 물길을, 범람을 이유로 동쪽의 옥류천과 만나게끔 바꾸면서 북영천 역시 회동천에 흘러들었다. 지금은 창덕궁 경내와 원서동 빨래터 일부를 제외한 전 구간을 도로로 덮어놓았다.

1411년(태종 11년)에 처음 만들었다, 창덕궁 자체는 1405년에 처음 지었으나 먼저 내부 전각들을 다 건립한 후 궁의 영역을 확정했기 때문에 창건한지 6년 뒤에 세운 것이다, 

이후 그 많은 화재와 전란등을 거치면서도 설아 남아 지금까지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즉 현존하는 궁궐 안, 뿐만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돌다리중 가장 오래되었다,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이 있고

진선문으로 들어가면

숙장문이 있고

숙장문 가기 전 왼쪽에는 인정문이 있는데 

인정문은 창덕궁 정전의 정문이며 그 양쪽에 있는 월랑은 ㄷ자형으로 인정전을 감싸고 있다.

창덕궁은 오랫동안 조선의 법궁(法宮)구실을 하였으며, 조정의 각종 의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이 이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인정전의 전면에 행랑으로 둘러싸인 前庭 전정이 있고 이곳에 品階石 품계석이 마련되었으며, 왕세자나 세자빈의 책봉이 있을 때, 또는 대왕대비의 주갑(周甲 환갑) 등 경사가 있을 때 왕은 인정전에 나아가 축하를 받았다.

1405년(태종 5)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졌으나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1804년(순조 4)에 현재의 건물이 재건되었다. 창건 당초에는 정면 3칸의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세종·단종 때 改營 개영이 있었다.

이때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재건되었으며, 다시 1803년(순조 3)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에 중건되고, 1842년(헌종 8)에 수리가 있었다.

경복궁 근정전이 조선의 법궁(法宮)이지만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 인정전이 근정전 역활을 대신한 정전이다,

인정전을 잠시 들여다 보고 숙장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사랑 카페가 있다,

사랑 카페에서 문화유산여권에 창덕궁 스템프를 찍고 나서

사랑카페 앞으로 직진을 하면

낙선재 일원이다,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있다. 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으며, 이들 뒤편에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해있던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하고 있다. 중희당과 수강재를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건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56년(영조 32)에 화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영조대에도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고종대에 들어와서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종종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였다. 낙선재는 연경당과 함께 궁궐 내에서 단청을 하지 않고 일반적인 주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낙선재의 정문은 長樂門 장락문으로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낙선재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기둥 위 짜임은 간소한 초익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서쪽 끝 한 칸은 앞으로 돌출시켜 2칸 누마루를 두고 제일 뒤는 온돌방을 들였다. 

그 옆으로 2칸 대청이 있고 다시 2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가장 동쪽 칸은 마루방이다. 가운데 4칸은 전퇴 부분을 개방해서 통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우물도 있어며

정원도 있다, 예전부터 이 구조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어나, 지금은 건물 앞쪽이 정원이다,

낙선재의 각종 창호 무늬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이중에서도 얼음이 갈라진 모양을 하고 있는 氷裂 빙렬 문양을 하고 있는 창호도 있는데 이는 장식 효과와 함께 화재를 경계하는 의미도 지닌다고 한다,

화계 뒤로는 上凉亭 상량전 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상량정의 원래 이름은 平遠樓 평원루인데 일제강점기동안 상량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후원에서 창으로 낙선재 안으로 들여다 볼 수도 있다,

상량정의 뒤에는 긴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서고가 있다. 정면은 나무판을 세로로 세워 만든 판벽이고 좌우벽은 궁장을 쌓는 것처럼 돌과 벽돌로 장식했다. 여기에 많은 양의 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낙선재 후원에서 소주합루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만월문을 지나도록 되어 있다. 

만월문은 벽돌로 쌓은 것으로 개구부가 원형이다. 조선 후기부터 궁궐에 등장하는 중국풍 요소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은 지금의 시각으로도 매우아름다운 모습이다,

낙선재 후원에는 괴석을 전시해 놓기도 했는데 별다른 설명이 없어니 무슨 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괴석과 함께 어우려 지는 굴뚝은 자주 보이는 그림은 아니다,

후원에서 안쪽으로 들어가 아궁이를 찾아본다, 후원에 굴뚝이 있어니 아궁이는 어디에 있는지?

누마루 아래에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를 가리기 위해서 일까? 칸막이를 설치한듯이 잘 보이지 않는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다닥 다닥 붙어 있어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키 어려운 구조로 이루어진 낙성대

일일이 다 찾아 볼 수도 없지만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차단되여 있는 건물들도 있다, 보이는 건물은 승화루인것 같다,

낙선재를 나와서 창덕궁 일원으로 돌아왔다,

회정당 일원의 건물들이 실타레 처름 얽히고 설켜 있어 어디가 어디인지? 가는조차 잘 안되지만

확실 한 것 하나는

새벽부터 내리는 비가 아직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리는데도

궁궐내 어디라도

물이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수가 잘 된다는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비 피해 대비를 잘 하도록 행안부 문자도 계속해서 들어오는날 인데도

제법 많이 내린 비에도 한 줌 빗물도 고이지 않는 것을 보면

먼 옛날 선조들께서는 지금의 과학적인 방법 보다 더 높은 기술력이 있어셧든 것 같다,

낙선재에서 성정각 관물헌 일원을 지나

昌德宮 熙政堂 희정당으로 왔다, 보물 제815호. 정면 11칸, 측면 4칸의 2익공식 팔작지붕건물. 창덕궁의 편전(便殿)은 본래 선정전이었는데, 이 건물은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 건물을 편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던 건물이다,

희정당에서 옆 건물인 선정전으로 가려면 희정당 대문을 나가서 선정문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옆 건물 아래로  선정전으로 갈 수도 있도록 지어졌다, 

이런 구조는 선정전 만이 아니라 그 반대 편에도 옆 으로 연결되는 구조로 설계해서

뒤 편으로 나갈 수 있도록 했어며, 그 다음에는 밖으로 이어지는 쪽문이 있다,

수없이 많은 건물들이 있지만 이 건물들이 별개로 떨어저 있는게 아니라 마치 한채의 건물처름 서로 이어지도록 설계가 되여 있다,

그래서 후원으로 갈 수도 있고 옆 건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구조다,

여기에 올려진 역사적 내용들은 다음백과사전을 기초로 작성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