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창덕궁 선정전과 인정전 그리고 규장각 일원 2023년 7월 23일 본문
昌德宮 宣政殿 창덕궁 선정전으로 들어간다, 선정전은 창덕궁의 왕의 공식 집무실인 便殿 편전이다,
인조 25년(1647)에 광해군이 세운 인경궁의 광성전을 헐어다가 지었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로 보물 제814호다
선정문에서 선정전으로 이어지는 복도 건물은 지붕이 있어 비가오거나 눈이 와도 출입이 자유롭도록 만들었다,
선정문에서 선정전 까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선정전은 창덕궁을 창건할 때 건립되었으나 인조반정 때 소실되어 1647년에 중건했다. 장대석을 바른층 쌓기를 한 단의 월대 위에 넓은 장대석 바른층쌓기 기단을 만들고 다듬은 초석들을 놓은 다음에
그 위에 12개의 평주와 2개의 고주를 세웠다.기둥과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은 다포식 구조로 지은 건물이다,
역대 임금이 살며 나라를 다스리던 창덕궁 왕의 집무실이 선정전이다,.
태종 초에 별궁으로 지었던 창덕궁은 계속 궐내에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하여, 선정전, 소덕전 등 여러 전각과 돈화문을 세워 본궁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덕궁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 다른 궁과 함께 거의 불타버렸다, 1608년에 왕이 된 광해군은 1615년에 불타 버린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다시 지어 머물렀다. 이 때부터 1868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창덕궁은 250년 동안이나 조선의 정궁 역활을 했다.
昌德宮 仁政殿(창덕궁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조선 후기의 건물로. 평면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중층 이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한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 기단을 쌓고 다듬은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놓은 다포식 건물이다.
공포는 외 3출목, 내 4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바깥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구름 모양으로 초각되어 기둥 윗몸에 놓은 운공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용마루에 5개의 이화무늬장의 장식을 두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일제가 설치한 것이다.
인정전 후면이다,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축대의 모습이 불안하다, 천막을 덥어놓은 것을 보니 우기가 끝나면 곧 보수를 하겠지만 미리 예산을 반영해서 보수를 하면 좋을 텐데 꼭 허물이지고 나서 보수를 하는지?
인정전에서 인정문 방향 앞 마당은 이렇게 보이고
인정문 방향으로 가서 정면으로 보는 인정전은 이런 모습이다,
이 건물은 이궁의 正殿(정전)으로 국왕의 즉위식 또는 공식적인 大禮(대례)를 거행하던 곳이라고 안내되어있다,
인정전 내부다, 평소에는 선정전에서 왕이 집무를 보지만
이궁의 正殿(정전)인 인정전에서는 大禮(대례)를 거행하던 집무실 이다,
昌德宮(창덕궁) 仁政殿(인정전) 내부를 촬영한 흑백사진이 인쇄된 엽서에. 국왕의 御座(어좌) 부분을 촬영한 사진이 있는데 이 엽서 사진으로 보면, 임금의 龍床(용상)과
日月五峯圖(일월오봉도) 병풍,
그리고 唐家(당가) 등이 있던 자리에 서양식 의자와 테이블, 가리개, 일본식 대형 봉황새 그림이 설치되고 서양식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기둥에는 서양식 등이 걸려 있다.
커튼은 李花紋(이화문)으로 장식되었으며 그 외에 다른 곳에도 이화문이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정전으로 들어오는 인정문은 임진왜란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 이 건물도 1744년(영조 20) 인접한 승정원에 불이 나면서 연소되어 좌우행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에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에서 향실 예문관을 지나
만복문으로 나가면
양지당이 있다, 양지당은 1762년(영조 38) 8월 추석날 영조가 선원전에서 아버지 肅宗(숙종)에 대한 추모의 글을 새긴 현판이다. 8월 8일 꿈에서 아버지를 뵙고 당시 영조가 머무르던 경희궁에서 창덕궁 선원전으로 나아가 14일까지 머물렀는데, 아침에는 대비전인 경복전을 봉심하고 밤에는 재실인 양지당에 묵었다.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 구윤명(具允明, 1711~1797)이 하교를 받고 글씨를 썼으며 현판에 새겨 養志堂(양지당)에 걸었다.
양지당 옆 선원전 일원이다, 선원전은 역대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임금을 祭享(제향)하는 건물로 궁궐 밖에 宗廟(종묘)가 있고 궁안에도 선원전을 지었으며, 선원전은 경복궁에도 있었고 창덕궁에도 있다.
왕은 朔望(삭망)에 선원전에 나와서 친히 분향, 배례를 하며 탄신일에는 茶禮(차례)를 드렸다. 선원전은 1695년(숙종 21)에 처음 마련되었는데, 본래 春輝殿(춘휘전)이라는 건물로, 都摠府(도총부)가 있던 자리에 1656년(효종 7) 경덕궁의 경화당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 위치는 仁政殿(인정전)의 서쪽으로, 인정전과는 월당, 부속사를 경계로 근접해 있었다.
여기에는 뒤에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御眞(어진)이 봉안되었었다. 그러나 1921년에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어진을 이곳으로 옮긴 뒤로는 구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는 궁내에 소장된 주요 유물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다.
건물은 장대석 세벌대의 높은 기단 위에 초석과 方柱(방주)를 세워 창방을 끼우고 쇠서 두 개를 결구한 2익공집이다. 전면과 측면의 어간과 협간에는 사분합 井자살문을 달고 후면에서는 어간과 좌우로 한 칸씩 건너 사분합문을 달고 나머지는 벽체로 마감하였다.
익공의 쇠서는 仰舌(양서)로서 강직하며 안쪽에서는 초각된 보아지를 놓아 퇴보를 받치고 있다. 퇴칸 안쪽으로는 高柱(고주)를 세우고 초각된 몰익공으로 대들보를 받치며 대들보 윗몸에 붙여 우물 천장을 가설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에는 각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두었다.
선원전은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 필요한 장식이 가미되지 않은 건물로, 조선시대 왕실의 제사용 건물의 유례로 중요하다. 이곳에 봉안되었다가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겨졌던 어진은 1950년 6, 25전쟁 중 불타 없어졌다
선원전에서 규장각 일원으로 왔다,
규장각 서고 옆으로는 창덕궁내 물이 흘러가는 궁궐내 하천이 있다,
이 물길은 북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창덕궁내 모든 물을 합류해 금천으로 흘러간다,
규정각 6칸짜리 서고다,
그리고 6칸 서고 앞쪽에 길게 늘어선 10칸짜리 서고가 또 있다,
서고 현판은 笧庫라고 붙어 있다, 서고 마당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고를 지키고 있는듯 하다,
집현전과 하천 옆으로
검서청으로 왔다, 검서청은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원래 이름은 大猷齋(대유재)다, 규장각 검서관들의 사무실 당직실이였다,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사관을 도와 책을 교정하거나 책 원본을 똑같이 베끼는 일을 하던 관리다,
정조는 즉위 직후인 1777년(정조 1년)에 창덕궁 후원에다 주합루를 짓고 그곳에 규장각을 두었다. 그러나 규장각 규모가 커져서 주합루에 많은 책과 문서를 보관하기 힘들어지자, 1781년(정조 5년)에 옛 오위도총부 자리에 규장각 청사를 새로 지어 이전시켰다. 자연스럽게 규장각 검서관들 또한 새 규장각으로 옮겨 근무했다. 이들이 사무를 보고 당직 설 곳이 필요해서 만든 게 대유재이다. 다만, 건물 자체는 정조시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기존의 건물을 보수, 개조한 것이다. 이름은 검서관 유득공이 짓고 현판>의 글씨는 정지검이 썼다.
검서청 앞 운한문 담 벼락 넘어로 들여다 보니
향나무가 보이는데
이 향나무는 몇년이나 되였을까? 수백년은 기본일 것 같은 향나무다
규장각은 창덕궁 금천 바로 옆에 있어 금천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아마 일과 연구에 지친 관리들을 위해 그렇게 지은 듯 하다. 기존의 규장각 이었던 주합루도 창덕궁 후원에 있어 그곳에서도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비록 주합루 경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관원들에게 좋은 풍광을 보여주려는 배려를 살펴볼 수 있다.
규장각은 1층 목조 건물로 남향이다, 정대석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 상부에는 전돌을 깔았다,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규장각 일원에서 돈화문 방향으로 나간다,
규장각 앞쪽에 있는 고목은 언제 고사할지? 모를 정도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새로 싹을 티운 줄기가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돈화문을 보면서
현대건설 사옥이 있는 방향으로 나간다,
나가는 문 왼쪽 창덕궁매표소가 있다, 오래된 은행나무 보려고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서을시내 창덕궁 매표소를 찾아가면 500여년(486년)이나 된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여기에 올려진 역사적 내용들은 다음 백과사전을 기초로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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