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를 모셔놓고 있는 종묘 2023, 07, 24 본문
종로3가역 11번 출구에서 종묘시민광장으로 가서
宗廟 종묘전교로 간다, 종묘전교는 종묘 앞쪽 세운상가 입구 부근에 있던 다리다. 준천사실과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宗廟前橋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고지도에는 다리 모양만 표시되어 있다.
세종길록에 따르면 회동, 제생동천은 지금의 가회동 인근 북촌 가회방에서 시작해 남족으로 흘러 청계천과 합류 했지만 홍수에 따른 민가 피해를 막기위해 세종대에 종묘 앞으로 인공제방을 만들어 동쪽으로 물길을 돌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회동, 제생동천은 도시화 과정에서 매립되어 완전히 사라진 하천이다,
종묘전교를 지나서 종묘 외대문으로 들어간다,
宗廟 종묘 정문인 외대문 오른쪽 매표소에서 매표를하고 입장을 하면
외대문 안에 문화유산여권 스템프함이 있는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여권 87페이지와 96페이지에 2개의 스템프를 찍도록 했다, 무슨 연유로 같은 곳에 있는 같은 도장을 2개나 찍어야 하는지는 모르겟지만 여하튼 그렇다,
외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三道(삼도)가 있다, 돌로 만들어진 3곳의 길중 가운데 길이 신도다,
宗廟(종묘) 배치도가 있는데
종묘의 정문 1번은 외대문, 2번은 정전 남신문, 3번은 정전 등으료 표기되여 있다,
종묘에 대한 안내도 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종묘는 원래 正殿(정전)을 말하며, 太廟(태묘)라고도 한다. 태묘는 태조의 廟(묘)가 있기 때문이다. 역대 왕과 왕후는 사후에 그 신주를 일단 종묘에 봉안했다.
종묘는 역대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조선의 태조가 한양으로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하고 나서 바로 짓기 시작하여 1395년에 경복궁과 함께 완공했다,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고대 중국의 도성 계획 원칙을 따라 경복궁 왼쪽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후 왕조가 이어 지면서 봉안해야 할 신위가 늘어나면서 몇차례 건물의 규모가 커져서 지금의 모습이 되였다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후에그 신주를 종묘로 옮겨모신다,
정전에는 공덕이 뛰여난 임금들을 모셨고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죽은 뒤에 왕으로 추존되었거나 정전에서 싱주를 옮겨온 임금들을 모셨다, 정전의 선실 19실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종묘제례는 국가의 가장 큰 제사로서 정전에서 1년에 5번, 영녕전에서는 1년에 2번 열렸으며 왕이 친히 주관했다,
종묘 제례에는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참여하였어며 음악, 노래, 춤이 일체화한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진행했다, 현재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행하고 있다, 제사 외에도 종묘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일을 알리거나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배제하여 단순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순함 속에서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를, 엄숙함 속에서 왕조의 신성한 권위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축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의 본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여 실현 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 인류 구전 및 무형자산 걸작, 으로 등재 되었다,
들어가는길 오른쪽 연못 옆에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 신당이 있다, 공민왕 신당은 와룡동 종묘 안에도 있다. 이 신당은 조선 태조 4년(1395)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경복궁 및 종묘를 영건할 때 세워졌는데. 전하는 설에 의하면,
종묘를 지을 때 북쪽으로부터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어떤 물건이 廟庭(묘정)에 떨어졋는데 공민왕의 영정이었다. 군신이 놀라 협의한 끝에 그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신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영정은 공민왕과 魯國大長公主(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그림으로 공민왕의 어필이라 전하며, 그밖에 駿馬圖(준마도)가 봉안되어 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望廟樓(망묘루)로 종묘를 살펴보는 관청인 宗廟署(종묘서)로 종묘를 관리하던 곳으로. 전도나 金寶圖式(금보도식) 어제시, 어진 등을 관리하고 의궤를 보관하기도 했다.
향대청은 제례에 바칠 향, 축문, 폐백을 보관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재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또한 제례에 종사하는 집사들의 집사청도 딸려있다,
정면 9,5칸의 긴 건물로 앞에는 행각이 놓여있어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 졋다, 남쪽의 망묘루는 졔례를 지낼때 임금이 잠시 머물며 앞선 임금들의 공덕을 기리던 곳이다, 망묘루 앞쪽에 연못을 만들었고 뒤 쪽에 공민왕 신당을 두었다,
황대청 일원 지도
향대청 앞 연못
香大廳(향대청)안으로 들어가면 향대청에는 신을 모시기 위해 사르는 향과, 제사의 뜻을 고하는 축문, 신에게 올리는 예물인 폐백(幣)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 서쪽에 제사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 대기하는 집사청이 있었다.
유리창 안으로 향을 사르는 집기가 전열되어 있는게 보인다,
향대청을 나와서 재궁으로 간다,
齋宮(재궁)은 제사 지내기 전 국왕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는 곳이었다. 재계는 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 의례로 제사를 올리기 전에 심신을 깨끗이 하고 금기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행위였다.
재궁 일원 약사도
뜰을 중심으로 북쪽에 御齋室(어재실), 서쪽에 御沐浴廳(어목욕청) 과
동쪽에는 세자재실이 있었다.
종묘 공신당 건물이 길게 보인다, 정전은 지금 보수공사 중이다,
정전 동문과 수복방이 나란히 보이는 정전 동쪽 그 앞으로는 전사청이 있다,
典祀廳(전사청)은 神廚(신주)라고 하여 종묘 제사에 사용하는 제수를 준비하는 곳이었다. 춘관통고에는 소, 양, 돼지 등을 잡는 殺家(살가)와 宰殺廳(재살청)이 전사청 안에 있었다.
동문앞 마당에 정전 신위봉안도 와
종묘대제 사진도 있다,
종묘 정전으로 간다, 여기도 삼도가 있다, 일반인들은 흙길로 가면 된다,
정전 담장을 따라 가다가 보니
빗물 배수구가 여러 곳에 보인다, 오늘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지나 종묘로 왔는데 하루 종일 내리는 비 에도 물이 고인 곳은 보지 못했다, 이 처름 완벽한 하수 시설이 조선시대부터 라는게 놀랍다,
정전일원 약사도
정전 일원 안내가 있다, 정전은 종묘의 중심 부분으로 긴 정전 앞에는 넓은 월대(月臺 : 중요한 건물 앞의 넓은 대)를 두었고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다, 남쪽 신문으로는 혼령이, 동무으로는 임금을 비롯한 제관들이, 서문으로는 재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종묘 제례때 여러줄로 서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 출입했다, 1395년에 신실 7칸의 규모로 처음 만들어 졌고 여려차레 늘려 지어 현재는 19칸에 이르는 매우 긴 목조 건물이 되었다,
거친 월대 바닥과 그 위로 육중한 지붕이 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남쪽 담장 안에는 功臣堂(공신당)과 七祀堂(칠사당)을 각각 동쪽과 서쪽에 세웠어며 서문 밖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樂工廳(악공청)을 두었다,(선실은 신주를 모시는 방이고신주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조각(패)다)
종묘 중심 건물로 정전이다. 국보 제227호인 정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 이다,
정전에는 옆으로 길게 늘어진 19개의 방에 임금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단순한 구조이지만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갖추었다
종묘 정전은 지금 보수정비 공사중이다, 2024년 9월 21일이 준공으로 기와교체와 이완된 부재 해체후 재설치 등의 공사를 하는 중이다,
종묘 정전 옆 樂工廳(악공청)이 있다,
악공청은 종묘제례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과 무원들이 대기하는 장소다
악공청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종묘 정전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영녕전있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시지 않은 임금의 신주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길게 이어지는 정전 담장을 보면서
종묘 외대문으로 나간다,
들어오면서 보았던 향대청 앞 연못도 지나고
외대문 앞에 있는 연못도 지나서 종묘 외대문을 나와서
배롱나무 꽃이 곱게 피여 있는 종묘시민광장을 지나 지하철 11번 출구에서 충무로역 2번 출구로 가서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집터가 있는 중구 퇴계로 206 으로 왔다, 朴彭年은 세종대의 집현전 학사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에 한 사람이다.
박팽년 집터 옆에 한국의집이 있다, 한국의 집은 한식당과 예식 그리고 각종 문화행사를 하는곳으로 한국의 영빈관 'KOREA HOUSE' (1957~1978 한국의집 1기)으로도 사용했던 전통 문화관이다&
이곳에 문화유산탐방 여권 90페이지 + 한국의집 스템프가이 있어 찾아왔다, 여권에,
아침부터 줄기차게 내리든 비가 가량비로 바뀌였다, 오늘은 서울 시내 고궁을 돌아보는 날 이지만 조금 더 걸어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간다, 역사문화공원 내부는 디자인플라자라는 이름으로 거창하기는 하지만 안보는게 좋을 것? 같아서 외곽만 돌아본다,
디자인프라자 건물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후면에 있는데
경사진 길이기는 하지만 동대문 일대를 조망하는 곳으로 는 좋은 곳이라서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건물들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 동대문역사공원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디자인 프라자 건물 복도로 해서 지층으로 내려간다, 이곳은 예전 동대문 운동장이 있었던 곳이였지만 디자인프라자로 개발하면서 동대문 운동장 유구를 그대로 보존하려고 했다,
이곳은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분영중 하나인 下 도감이 있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훈련원공원이 조성되었어며 1925년에 경성운동장으로 광복이후 에는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으로 축구장과 야구장이 있었다, 축구장이 있었던 자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한양도성의 성곽, 이간수문과 함께 관청건물터가 발견되었고 야구장 아래 에서는 下도감터가 확인되었다
발굴된 유구는 동대문 역사문화공원내 유구전시장 세곳에 이전 복원 되어있다, 이곳 DDP어울림 광장 유구는 야구장 아래에서 발견된 하도감터로 조선 전기 건물로 추측된다, 발굴 조사된 유구 중 구조와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건물 4기와 부속시설등을 이전 복원했다,
오늘 궂이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까지 온 이유는 2호선 신당역 4번 출구에 옷 오리탕을 잘하는 집이 있다고 해서 1시간 전에 예약을 하고 예약시간을 맞추어 오느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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