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경기옛길 봉화길 제2길 한양삼십리길上(남한산성로터리~회심고개) 24, 05, 19 본문
봉화길 제2길은 남한산성 로터리에서 경기광주역까지 19km다, 지난 5월 5일 봉화길 1코스를 걷다가 비가 와서 광주향교에서 철 수 했던 길을 이어와야 했지만 다음에 시간이 되면 이곳에서 향교로 역순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오늘은 봉화길 제2길 한양삼십리 누리길을 간다,
제 2길 19km의 길 중 남한산성 로터리에서 목현 1동까지 12km의 길은 한양삼십리 누리길로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넘었던 남한산성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자 조성된 숲길이다
경기옛길 봉화길 제2길 한양삼십리길 출발점인 남한산성 ↑ 로터리로 왔다, 이곳으로 오는 길은 서울지역 기준으로 8호선 전철 산성역 2번출구 버스정류장에서 9번이나 9-1번 버스로 남한산성 종점으로 오면 된다, 남한산성 로터리에는 남한산성 행궁이 있다,
출발은 남한산성 로터리에서 남한산성 남문 방향으로 간다,
남문 방향으로 가다가 공군부대 2,5km 간핀이 보이면,
이 길이 한양 삼십리 누리길이다, 이 길은 임도로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이지만 일반차량은 통행할 수 없는 공원관리 도로다,
세멘트포장길을 따라간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 길은 그늘이 있는 숲길이다,
이 길은 남한산성 7암문으로 이어지는데 처음으로 보이는 암문은 도로를 만들면서 차량 통행용으로 새로 만든 암문이고
본래의 암문은 새로 만든 암문 오른쪽에 숨어있다, 이 암문이 남한산성 제7암문(제1남옹성암문)으로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이 쉽게 식별될 수 없는곳, 동서 방향으로 가던 성벽이 남북, 방향으로 바뀌는 지점에 설치했어며, 개구부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 처름 성벽의 방향을 바꾸어 암문을 설치한 것은 이 지점의 지형에 굴곡이 없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성벽이 적 대치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외부에서는 암문이 관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암문은 제1옹성과 신남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남쪽 성벽에 설치된 암문 중에서는 가장 이용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도로를 개설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암문 밖으로 나가면 전면에 한양누리길 12km 종합안내도가 있으며
남한산성(가수 강성실) 노래 말도 있는데 옮겨 보면
볼수록 정겹고 볼수록 아름다운 사적 제 오십칠호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 위치 중부면 산성리 축성 천육백이십사년 선조들의 얼이 깃든 고귀한 유산
모두가 함께 가꿔 모두가 함께 지켜 그 이름 온 누리에 높이 떨치자, 높이 떨치자, ~
사실 처음 보는 노래말이라 와 닿지는 않지만 남한산성 노래까지 있다는게 정겹다,
남한산성 제7암문으로 나가 오른쪽 성곽을 따라간다,
길은 금방 남한산성 성곽이 안보이는 곳으로 이어지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이는 곳에서는
남한산성 남문으로 갈 수 있는 길도 있다,
한양삼십리 길은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 차츰 남한산성을 벗어 나면서
검단산 방향으로 가야한다,
오늘은 한양 삼십리 누리길 12km만 걷는 것으로 하고 가다보니 길옆에 작은 쉼터가 있다,
이렇게 보이는 탁자와 둘레 의자가 전부인 쌈지공원 쉼터에는
원을 그리면서 세워진 안내판들이 있는데 모두 병자호란 이야기다, 388년이나 지난 옛날 쟈료 내용들이라 지금으로서는 낮선 단어들이 많지만 안내판에 적혀있는 내용 그대로 옮긴다,
1637년 1월 12일 남풍이 일었다, 이대로 함략 당할 것인가,
이 성에 들어온지 29일째 건만 구원병은 전혀 없고 식량 부족 또한 심각하여 성 밖의 풀과 나무도 모조리 불타 남음이 없어며 말 들이 서로 꼬리털을 물어 뜯고 군사들도 모두 오래지 않아 함락될 것으로 여겨 성을 넘어 적진으로 달려가는 자 마저 연달아 생겼다,
1637년 1월 28일 척화신의 이별,
윤집 오달재가 압송당해 성 밖으로 나갈때 두 친구가 울며 작별하니 그는 웃으며 나는 죽은이는 조문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살았는데 조문한다는 소리는 듣지도 못하였네, 바라건데 여러분은 각자 잘 보존하여 우리 임금님 잘 모셔 옛 서울로 들어가세, 왕은 두 신하를 불러 목 놓아 우시었다, 그대들이야 말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충신들이다, 하늘이 종사를 내리지 않으신다면 그대들의 노모와 처자를 보호해 돌 볼 것이니 염려치 마라,
1637년 1월 29일 망월봉의 전투
성첩의 군졸들이 추위와 군주림을 견디며 빙판에 앉고 서기를 이제 오십여일이나 되었건만 한 사람 원망하는 자가 없고 앞서 싸움에서는 사흘동안 탄환이 비 같이 쏟아지고 성가키가 깡그리 무너져 몸을 숨길 곳이 없건만 오히려 두려운 기색없이 끝까지 싸우려 하니 그 뜻은 참으로 가상 하옵니다,
1637년 1월 30일 햇빛이 없었다,
임금님 우리임금님 우리를 버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날씨마저 슬픔에 잠겨 누런 안개가 사방을 내리 덮은날 왕과 세자가 남빛 옷을 입고 서문으로 납시니 백관이 문턱에서 울며 전송을 하였다, 청 에 사로 잡힌 전하의 행렬을 바라보고 목놓아 울며 울부짖는 이가 수만을 헤아리니 성내의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쳣다,
청가 몽고에 우리나라 사녀로 붙잡힌 이는 그 수가 몇 만인지 모르겠는데 왕의 행렬을 보고 울부짖어 날뛰고 뒤뚱거리며 스스로 나는 어느집의 처자라고 외쳐대자 청인이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소파언덕에 이르러 보니 적의 진 복판에 한 단을 쌓았고 단 위에 비단을 깔아 금단을놓고 청제는 그 위에 앉앗다,
우리임금을 시켜 세자와 정승 및 육조 판서를 거느려 예를 행하게 하였다, 이날밤 왕 께서는 창덕궁에 듭시고 백관도 모두 대궐안에서 묵었다,
남한산성에서 몽고군과 대치하고 전쟁을 했던 병자호란의 가슴을 에이는 듯한 이야기를 보면서 앞으로는 두번 다시 이렇게 아픈 역사가 없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즈막 하지만 서서히 높아지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조경이 아주 아름다운 두번째 공원이 보인다,
여기에도 병자호란의 이야기는 이어지는데 1636년 12월 19일 마치 버들 꽃잎처름이다,
청군이 쏜 화살이 우리 군의 등 뒤와 좌우 세 방향으로 메뚜기 떼처름 덮쳐와 우리 병사들은 시위 소리가 날 적마다 언덕에서 마치 버들꽃 날리듯 떨어져 내리니 시체는 구렁을 메꾸고 가졌던 병기는 산등에 널렸다,
실석(失石)을 피하지 않고 몸소 사졸(士卒)의 앞에 서야 모두 죽을 힘을 얻을 수 있겠는데 어떻게 지휘자는 모조라 성 안에 있어면서 군졸들을만 밖에 나아가 죽을 힘을 내라고 할 수 있더란 말인가!
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벼슬아치들이 하는 짓거리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는 것같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이 더 걱정스러운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두번째 쌈지공원에서 다시 도로를 따라 검단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삼거리가 있는데 도로는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삼거리로 보이는 이곳은 사거리다, 직진으로 데크계단을 따라 내려가는길과 오른쪽으로 검단산으로 가는 도로(검단산 정상은 여기서 300m)그리고 왼쪽으로 한양삼십리 누리길인 봉화로가 있다,
한양 삼십리 누리길은 광주시 목현동에서 남한산성남문까지로 12km다, 조선시대 관원들이 군사정보 전달과 지방 선비들의 과거길이며 1636, 12월 13, ~ 1637, 1, 30(47일간) 청군과 결전에 조선 16대 인조임금의 고뇌를 재현하였고 2014년 6월 22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남한산성이 등재, 지정됨에 따라 남한산성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국토교통부에 공모하여 조성된 숲길이다,
이곳 사거리에서는 한양삼십리 누리길 이정표 기둥에 표시되여 있는 방향 표식을 따라 왼쪽능선으로 가야한다,
왼쪽능선으로 가는길은 도로를 따라 서서히 올라왔어니 이제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능선길 정상으로 올라간다,
넓다란 평지가 있는 능선길 정상,
여기는 유일하게 이시백 장군의 눈물 이야기 안내판이 있다, 인조임금 청 황제에 항복머리 조아릴때 얼마나 아팟기에 가슴이 찟어졋나, 통한의 바위야 피 눈물이 보이느나, 이 땅에 이런 역사 다시 오지 말라고 영원토록 맨 가슴 찟어진채 버티노라, 후손들아 이 몸 보며 그 날을 잊지마라, 388년이 지난 1636년의 아프고 한 서러운 이 이야기는 역사책 속에만 있을뿐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는게 현실이 아닐가?
이야기판 뒤로 내려다 보이는 서울은 남한산성에서 무릅까지 온 눈 길을 걸어서 한 민족 최대치욕인 청 황제에게 항복 의식을 했던 삼전도 나루 일대도 보인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롯데타워와 한강, 한강으로 흘러드는 탄천까지도 보인다, 탄천 한강합 수 지점은 삼전도 나루터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함락으로 인조가 청군(淸軍)에게 항복을 한 곳으로,
청나라 전승비(戰勝碑)인 삼전도비(사적. 1963년 지정)가 있다. 서울 삼전도비(서울 三田渡碑)또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는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청나라 의 전승비며 송덕비다. 병자호란때 승리한 숭덕제가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 (인조 17년)에 세워졌다.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아래는 삼전도비에 실린 내용이다)
어리석은 조선 왕은, 위대한 청제국 황제에게 반항했다. 청제국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타이르고, 자신의 대죄를 납득시켰다. 양심에 눈을 뜬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맹성하고, 위대한 청국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맹세했다. 우리조선은 이 청국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 청국에 반항한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 이 석비를 세우기로 한다.
이렇게 치욕적인 비가 왜 지금도 남아 있을까? 구구절절 잊을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역사의 치욕이지만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치욕을 역사에서 깨달음을 배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능선정상에서
불당리로 방향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은 숲이 이어지는 길이라 무척이나 여유로운 길이다,
이 일대는 철죽 군락지라는 안내도 있는데 매년 5월에 연분홍색 꽃이피며 어린 가지와 꽃자루는 끈적끈적하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라 하여 참꽃이라 하지만 철죽은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으므로 개꽃이라 한다,
철죽 군락지에는 산성리 꽃님이 이야기도 있다, 내용은 꽃나무를 심어야지? 어린 꽃님이가 아버지와 함께 산을 올랐다, 산성리 뒷산, 남한산성가는 길에 꽃남이의 콧노래가 울려 퍼졌다, 일제 강점기 당시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산성리 남한산금림조합이 만들어 졌다, 산을 가꾸기 위해서 였다,
산성리 주민들의 노력 덕분에 남한산성 주변이 더욱 푸르르졌다, 심고 키우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 어디 숲 뿐이랴, 이 세상에 저절로 지켜지는 건강, 꿈, 사랑은 없다,
조금 급해 보이면 이렇게 데크로 계단도 만들어 놓은 길이라 안잔하게 내려 가는길
매 바위가 있다, 인조때 남한산성 성안에 거주하던 나무꾼 서흔남이 자주 오르던 바위로 이곳에서 매를 부르던 곳으로
현재는 바위 위에 소나무만 자라고 있으며 서흔남의 묘지는 성안 지수담 부근에 있다,
매 바위의 진실 이라는 詩도 있는데
병자호란 승군님들의 슬픈 넋, 눈물꽃 성벽위로 피고 지고, 죽어서도 죽지못해 역사의 행간을, 푸드득 푸드득 날아 오르 더이다,
죽지 않고 매 바위 전설이 된, 님의 산성사랑 나라 사랑, 낭군따라 강물에 몸을 던진, 매 바위 아녀자 슬픈 사랑, 산성 구름 위로 나는 새만 보아도 그대로 망부석 심정이더이다,
내림길이니 힘들 것도 급할 것도 없지만
가끔은 나무 계단도 있고
능선 평지길도 있는길
서흔남 그 이름 들어 보았는가? 라는 표지판에
" 병자호란 눈이 날리는 서러운밤, 짚신 거꾸로 신고 인조대왕을, 산성으로 피신 시켰다네,
청나라 군사의 포위망을 뚫고, 축지법 쓰듯 산성 넘나든 충정, 천민에서 정 삼품 가의대부 벼슬 받았다,
오늘도 산성 찾는 길손들 보소, 임금님 곤룡포 하사받고, 무덤에 가지고 갔네"
이런길에서는 함께한 사람들과 남한산성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여유로운 길을 풍성하게 가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데크 계단길을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검복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이렇게 마을로 내려 가는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마을길 입구에 검복리 버스정류장이 470m거리에 있다는 이정표도 보인다,
마을 안쪽길이지만 동네길이니 차가 다닌 흔적도 보이는 길을 내려가면
개인 사유지라 울타리를 치고 천막도 쳐 놓았지만 농사는 안 짓는지 잡초만 무성한 땅도 있다,
이런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그늘이 있는 넓은 공터에서
간식 보따리를 풀었다, 김밥 한줄에 조촐한 차림이지만 간식을 하고 나서 자릴펴고 길게 누워서 하늘을 처다보니 오늘따라 구름도 없고 깨끗한 날이라 초록빛 나무 잎이 빛이 나는듯 했다,
간식후 내려가면서 보이는 마을은 집집마다 잘 꾸며놓은 조경이 멋 스럽기만 하다,
한양 삼십리누리길이 12km의 길이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산길로만 이어진 길이라 속도가 나지는 않았다,
이제 마을로 내려간다,
안듯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집들이 보인다,
검복리 앞으로 흐르는 개천까지 왔다, 여기서 봉화길 제 2길이 끝나는 광주역은 14,4km가 남았고 한양삼십리 누리길은 8km가 남았어니 남한산성 로터리에서 여기까지는 4,6km정도를 온 셈이다,
남한산성에서 출발해 이 정도만 둘러보고 가도 충분히 좋은길을 다녀가는게 되지만 일단은 오전리 직거래장터까지 가보려고 한다, 이곳 버스정류장에서도 남한산성과 광주시내로 갈 수도 있다, 보이는 숲은 묵상의집(교회 연수원)뜰로
한양 삼십리누리길은 묵상의 집 울타리와 검복리 개천 사이 길이다,
가는길 왼쪽 개천변으로 촘촘이 깃발이 걸려있는데 이 깃발은 한양삼십리 누리길 깃발이다,
개천을 따라 꽤나 먼거리?에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깃발이 바람에 날리는 개천둑길은 계속해 이어지지만 신발 흙먼지 털이개가 있는 곳에서
아치 숲 조성을 해놓은 데크길로 들어가야한다,
등나무가 무성해진 숲길 데크길이 끝나면
산길 입구에 우람한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는 족두리 바위라고 하는데
천년 만년 살고 싶소, 함께 이곳에서 보고가소, 님과 언제든지 나를 이 길 지나시는 기다리오리다,
나는 족두리 바위되어 흰머리가 되었네, 기다림에 청춘은 님은 언제올까,
내 마음 가져가신 뒤척임에 꿈이로세, 어사화와 나팔소리 오늘도 소식없네,
찬 이슬 내리는데 기다림에 석양지고 이제올까, 저제올까, 낭군님 그리워 잠 못이루네
위에 적힌 詩는 옛날 이곳에 한 처녀가 과거길에 오른 도령을 깊이 사모하면서 과거 급제를 애타게 기원하던 곳으로서 그 뜻을 전하고자 바위로 태여났다, 하여 족두리 바위라 한다,
남한산성에서 출발해 오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돌아가려면 제일 가까운 곳은 검복리 버스정류장이고 두번째는 불당리 버스정류장, 세번째는 오전리직거래장터 정류장, 네번째는 목현1동 마을회관 등이다,
이번에도 이어가는 길은 평온한 길이다,
전구간 그늘은 기본이고
길의 오름도 별로 없다,
쩍바위 1637년 1, 30, 인저임금이 청나라 황제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던 삼배구 고두래 시 남한산성의 이곳 바위가 두개로 쩍 갈라졋다 하여 쩍바위라 칭한다,
숲에 가려져 선명하게는 안 보이지만 이 바위가 쩍 바위다,
계속해서 이어가는 길도 숲길이고
고도 도 그리 올라가지 않는 길을따라
천천히 가다가 보면
돌 탑이 보이는데 여기가 불당리 고개로 산적의 회심고개라 불리던 곳이다, 다음이야기는 경기옛길 봉화길 제2길 한양삼십리길 中 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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