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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 2024년 7월 27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 2024년 7월 27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4. 8. 23. 00:00

봉수산 자연휴양림에서 약 30분 정도를 달려 수덕사입구 식당가로 왔다, 많은 먹거리 식당중에서도 골목 안쪽에 있지만 아는 사람들은 찾아간다는 거북이 식당에서 정식(1인분 19,000원)으로 점심을 하고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산문(山門)으로 들어간다. 수덕사가 덕숭총림이 된 것은 1984년이다, 조금은 생소하지만 총림(叢林)이란? 선원(禪元), 강원(승가대학 또는 승가대학원), 율원(율학승가대학원) 및 염불원을 갖추고 본분 종사인 방장의 지도하에 대중이 여법하게 정진하는 종합수행도량을 말한다.

德山鄕土誌(덕산향토지)에 의하면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이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되어 청혼을했으나 여러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했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 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 산문을 지나 들어가면 수덕사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은 여기에서부터 사찰의 경내가 시작됨을 알려주는 문으로 사찰내에 진입하면서 만날 문(門)중에서 가장 첫 번째 문이다 일주문이란 부처님을 향한 모든 진리는 하나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있는 문이다, 德崇山修德寺 (덕숭산수덕사 )라고 쓴 일주문 현판은 소전 손대영 선생이 썻다,

일주문 안에는 또 하나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東方第一線原 (동방제일선원 )이라는 현판이다, 덕숭산 남쪽에 자리잡은 수덕사는 현존하는 백제 고찰의 하나로 백제 위덕왕(554-597) 제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는 사찰로 창건이후 백제의 고승 혜헌 스님이 법화경 강론을 폇으며 고려충열왕 34년(1308)에 대웅전(국보 49호)이 건립되여 현재에 이른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만공스님 대에 대웅전 전체를 해체보수했고 이때 포벽에서는 고려, 조선 양 시대에 걸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조선시대에 그려진 벽화의 안쪽에서 발견된 고려벽화는 奏樂飛天圖(주악비천도) 供養花圖(공양화도) 樹花圖(수화도) 등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그려진 五佛圖(오불도)등이 있었지만 유실되고 현재는 그 모사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사진 자료가 일부전해 지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덕숭산 수덕사 사적비도 있는데 언제 만들었는지 새 것처름 보인다,

덕숭산 수덕사 사적비에서 조금 올라가면 세번째 문인 금강문이 있다 정면 3칸이고 가운데는 통로로 사용하며 양쪽은 판벽으로 마감하고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놨다, 금강문은 서까래와 부연을 단 겹처마다, 서까래와 부연, 창방과 공포에 머리초와 금문 별지화 등을 빈틈 없이 빼곡하게 단청문양을 그리고 기둥에는 드림을 내린 드림주의 초를 단청하고 있다,

금강문내부 양 쪽에는 홍살을 세운 안쪽으로 금강역사를 모시고 있다, 수덕사의 금강역사는 우락부락하면서도 약간 귀여워 보이는데 사찰마다 사천왕상과 금강역사의 모습이 다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다, 좌우로 나라연금강과 밀적금강이 그려져 있는데 나라연은 그 힘이 코끼리의 백만배나 되는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고 밀적금강은 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 신이다

금강문도 지나 수덕사 경내 울창한 숲을 따라 들어가면

왼쪽으로는 환희대로 들어가고 직진은 대웅전과 정해사, 덕숭산 정상으로 가는길 임을 알리는 이정표도 있다,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 山門 과 일주문, 그리고 금강문을 지나 들어가면 다음문은 四天王門이 있다, 사천왕문은 금강문과 마찬가지로 정면 3칸이며 중앙은 통로로 이용하고 양측면 칸은 사천왕상을 모시고 외벽은 판벽으로 구성해 사천왕상을 그렸다

사천왕문으로 가는 계단에는 장식된 사자상과 석등이 있는데 이는 사청왕문의 위엄을 높여주는 장식물이다. 사천왕문의 처마는 겹처마를 구성하고 있다,

사천왕문 안 양쪽에는 각 방위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2개식 배치되어 있는데 사천왕문(四天王門)은 사찰을 지키는 사천왕을 모시는 문이다. 

즉 천왕문에 모셔져 있는 사천왕상은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 서쪽을 지키는 공목천왕,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이 모셔진 곳으로 줄여서 천왕문(天王門)으로 부르기도 하고, 사천왕이 옹호하는 문이라고 해서 옹호문(擁護門)이라고도 한다

사천왕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만공기념관이 있다, 만공 스님은 수덕사와 定慧寺(정혜사)와 見性庵(견성암)및 서산 안면도의 看月庵(간월암)등을 크게 중창했고,1920년대 초에는 禪學院(선학원)설립운동을 하였으며, 선승들의 結社(결사)인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契(계)모임의 성격을 지닌 禪友共濟會運動(선우공제회 운동)에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만공스님은 덕숭산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했다.

다음은 수덕사의 마지막 5번째 문인 황하정루로 들어간다, 황하정루 왼쪽은 백운당이고 오른쪽은 청운당이며 1층 가운데는 통로다,

사천왕문에서 황하정루 사이에는 

양쪽으로 석등이 있고

왼쪽에는 7층 석탑도 있다, 이 석탑은 1931년 만공 대선사께서 건립한 석탑으로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기단면석 밖으로 두드러지게 우주를 표현하고 면석에는 두께 10cm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탑신부의 옥신은 없는데 옥신 대신에 4개의 정사면체 석재를 주춧돌처름 놓아 1층 지붕돌을 받치고 있다,

각 층의 면석과 지붕돌은 별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면석 마다에는 우주와 창방이 표현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2단의 지붕돌 받침을 가지고 있는데 반전이 매우 심하다, 상층부에는 찰주, 보주, 보륜이 올려져 있다, 대체로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는 탑이다,

절에서 누각은 절 중심영역인 대웅전 마당 들어서는 관문 역할을 하는데, 정면 일곱 칸, 측면 세 칸으로 크기가 어마 어마한 황하정루가 있다,1992년에 지었다는데, 목조건물 같지 않고 콘트리트처럼 보인다. 위쪽 처마 아래 선불교의 본산이라는 뜻의 선지종찰(禪之宗刹)수덕사 와 아래쪽 통로 위 덕숭총림편액은 원담(圜潭) 진성(眞性, 1926~2008) 스님이 직접 쓴 현판이다,

황하정루는 대웅전을 보호하고 사세를 안정시키는 전위누각(前衛樓閣)으로 1985년 불사를 시작하여 1992년에 준공했으며 1994년 법장스님에 의해 이전 개축되었다, 황하정루라는 명칭 황(黃)은 부처님의 정신을 뜻하며 하(河)는 큰 강이 흐르는듯 정진한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정신이 강물처름 흐른다"는 뜻이다, 황하정루 지층은 근역성보관(박물관), 일층은 승방, 이층은 강당으로 쓰는 공간인데 처음엔 대웅전 마당에 있었다,

덕숭 총림 수덕사에 대한 안내도 있고

수덕사 문화재 안내도 있다,

황하정루 1층, 중앙 통로로 대웅전으로 들어간다, 입구 앞에는 2층 높이의 계단이 있어 대웅전이 보이지는 않는다,

황하정루에서 대웅전으로 가는 계단 앞에서 왼쪽으로 보면 낮은 곳에 있는 황하정류와 높은곳에 있는 대웅전 경계에 담을 쌓아 계단식으로 대지를 조성했는데 역사가 오래 되다보니 고풍스럽기만하다,

그래서 일까?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높기만 하다,

대웅전이다,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왼쪽은 백련당이고 오른쪽은 청련당이다, 담을 높게 쌓아서 대웅전 일대는 평지 대지를 만들었지만 대웅전 앞 마당과 삼층석탑이 있는 곳도 다시 또 층을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터를 조성했다,

황하정루와 대웅전 사이 낮은곳 오른쪽에는 법고각이 있다, 대다수의 사찰에는 범종각에 불전 사물을 함께모시는데, 수덕사에는 오른쪽의 법고각(法鼓閣)에 법고와 목어, 운판을 따로 봉안했어며, 건물자체도 단청도 화려하지만, 법고 나 목어가 마치 공예 작품 수준으로 예술적이다,

법고각 위쪽에는 청련당이 있으며

대웅전 옆에는 백련당이 있고 그 뒤 중앙에 보이는 작은 당우는 산령각(山靈閣)이다,

백련당 아랫쪽에는 범종각이 있는데 법고와 목어, 운판을 법고각에 모셧으니 범종각에는 범종만 있다,

범종각에는 1973년에 조성된 무게 6,500근 짜리 청동 종이 봉안되어 있다. 종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특별한 역사적 의미는 없는 종이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禮山 修德寺 大雄殿)은 충남 예산군 수덕사에 있는 고려시대 불전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된 맞배집이며, 공포는 2출목으로 되어 있고 대체적으로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형식이나, 초방(草枋) 위에 주심(柱心)도리를 지탱하는 우미량(樑)이 무량수전의 직선적인 것과는 달리 심한 곡선으로 변했고, 또 내반(內反)된 소슬, 장식적인 대공, 쇠혀처럼 뻗은 두공(頭工)의 끝 등 전반적으로 무량수전에 비해 고려 후기의 성격을 나타낸다.

대웅전앞 삼층 석탑은 높이 4m로. 1983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 기단부는 3단의 기단받침 위에 높은 이중기단으로 처리하였고, 면석에는 상하에 모두 3개씩의 동자주(童子柱 : 세로로 세운 작은 기둥)가 각출되었으며, 갑석 상면 네 모서리에는 각을 주고 면석 받침은 2단으로 몰딩(moulding : 테두리장식)을 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부는 체감률이 정연하며, 탑신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양각하였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게 다듬어져 있고, 네 모서리에는 반전을 약간씩 두었으며 처마선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옥개받침은 4단을 조출(彫出)하였고 옥개석 상부에는 탑신받침을 생략했다. 상륜부는 2개의 보륜과 함께 보개(寶蓋), 앙련(仰蓮), 노반(露盤)이 찰주(擦柱) 없이 포개져 있는데, 노반은 방형(方形)으로 탑신부의 최상층 옥개석과 1매의 석재로 만들었다,

백제시대 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0년에 수리했을 당시 나온 묵서명(墨書銘)에 의하여 건물의 건축 년대가 1308년임이 확인되었다,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정면의 각 칸에는 셈세한 빗살 3분 합문이 있고, 측면에는 맨 앞쪽에 출입문을 설치 했다, 뒷면에는 각 칸에 문을 장식하고 있지만 중앙 칸에만 문을 달았다, 

외부에 노출된 가구는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며 측면의 맞배 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의 구도는 아름다움의 극치다, 건축된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여난 점으로 한국 목조 건축사에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의 하나다. 앞면 3칸, 옆면 4칸 크기로, 지붕은 옆 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1928년 단청을 새로이 할 때 본래 있던 벽화 뒤에서 나온 묵서 지대원년 무심 4월 17일에 의하면 충렬왕 34년(1308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덕사 대웅전은 사찰 경내에서 가장 높은 대지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다.

건축양식을 살펴보면 전면 기단은 장방형의 화강석을 바른층 쌓기로 6단을 쌓아 10척 높이를 이루었으며, 후면은 2단쌓기로 하고, 전면의 양측에는 계단을 설치하였고, 건물은 전면이 3칸, 측면이 4칸인데, 평면으로 보아 전면과 측면의 비가 1 : 1,315가 되어 전면이 긴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주심포계의 맞배지붕을 한 불전이다.

축대를 겸한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배흘림 기둥을 세워 창방으로 기둥 윗몸을 결구하고 공포를 기둥 위에만 짜놓으며, 공포는 외 2출 목공포로 기둥 윗몸에서 헛참차가 나와 외출목을 구성하고, 출목 소로 위에 끝이 앙서된 살미첨차를 놓았다. 이 첨차의 기둥 안쪽은 보아지를 이루고 있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 전면 왼쪽에는 청련당이 있다,

대웅전옆 청련단위 쪽에는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에는 머리에 초록색 두건을 쓴채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지옥중생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상(十王像)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은 지옥에 빠진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법당으로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유명계(幽明界)의 판관들인 시왕을 봉안했다. 명부전옆 산기슬에는 고목 느티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으며 축대를 쌓기는 했지만 자연과 잘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축대를 만들었다,

대웅전 지나 반대편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5년 전에는 관음전이었던 것 같은 자리에 지금은 산령각(山靈閣)이 자리잡고 있다 산령각이란 여느 사찰의 삼성각 아니면 산신각과 같은 의미의 전각이다

산령각 오른편 축대 아래 쪽에 작은 돌기둥이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다. 대덕 지명법사지비 라고 쓰여 진 이 비석은. 지명(智明) 법사가 수덕사를 창건했다는 의미의 비석인 듯 하다,

산령긱 앞 눈부실 정도로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한 관세음보살 입상이 있다. 관세음보살입상 뒤에는 엄청나게 큰 수덕사관음바위가 자리잡고 있으며 관세음보살 입상 좌우에는 두개의 석등이 있다,

대웅전에서 대웅전 앞 마당을 내려다 보면 오른쪽에는 백련당과 종각이 있고

반대편인 왼쪽에는 천련당과 법고각이 있는 넓은 마당은 매우크다, 예전에는 이 마당에 급강보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아닌가? 기억이 가물 거린다,

무이당과 백련당 전각 사이로 나간다, 아랫쪽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 정혜사 980m와 덕숭산 정상 1,91km 이정표도 있다,

백련당 뒤로 앞에 보이는 심우당을 지나 벽초스님의 1080 돌계단을 따라 정혜사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약 40분 정도 걸린다,

백련당과 무이당 사이 무이당 뒤 계단으로 내려 와

입구 쪽으로 내려 가다보면 개천 건너에 작은 한옥건물 하나가 보인다, 이 건물은 화장실이다, 변소간 이라는 간판을 붙여 놓았다, 순 우리말인데도 왜 생소한지?

코끼리석등을 지나서 일주문 방향으로 내려가면

수덕사 미술관이 보인다,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날씨가 너무 더우니 땀도 식힐겸 미술관으로 들어 갔다,

수덕사 신 미술관은 양쪽으로 미술관이고 중앙홀은 기념품 판매소다,

양쪽 미술 전시관은 이런 모습이다, 미술은 이 정도로만 보고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니 시원해서 좋다, 나가면 더울 테니까 조금이라도 더 버티다가 나가야 겠다, 

미술관을 나와 잠시 미술관 입구 다리에 걸터 앉았다, 그늘이 있고 바람도 불었기 때문에, 에어컨 만큼은 시원하지는 않지만 자연바람은 또 다른 시원함을 준다,

오늘 수덕사 구경은 여기까지다, 너무 더워서 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다음에는 정혜사까지 1080  계단을 따라 사면석불에 참배를 하면서 모두 다녀와야 겠다, 끝으로 수덕사 경내 배치도를 참고로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