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경기옛길 봉화길 제9길 설성산길 - 2(설성산 정상 ~ 음죽현 쌈지공원) 2024, 9, 29 본문
경기옛길 봉화길 제9길 설성산길 - 2(설성산 정상 ~ 음죽현 쌈지공원) 2024, 9, 29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4. 10. 11. 00:58
설성산 정상으로 오른 시간이 11시 30분정도인데 마침 바람이 솔솔 불어와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설성산 정상 봉화정에서 돗자리를 펴고 길게 누워서 땀도 식히고 100년산 귀한 산삼주도 한잔씩 했다,
설성산 정상 해발은 그리 높지 않아 내려다보면 바로 아래에 집들이 보인다,
길게 쉬였던 설성산 정상에서 이제는 내려 가야한다, 아직도 갈길은 멀다,
내림길은 미끄려질 정도로 급하다, 그라나 급한 내림길은 그리 길지는 않다,
잠시만 내려가면 일반 산길 내림길이고
이내 앞이 티이면서 절이 보인다, 이 절은 이천 설성산 중턱에 위치한 신흥사로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자
경기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어며. 설성산성이 둥글게 에워싼 중간 지점에 있는 신흥사는 신라 내물왕(재위 356~402)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신흥사는 설성을 쌓은 장군을 위해 세웠다는 전설이 전하나 당시는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이고, 조선 후기까지는 연혁이 전하지 않아 최초 창건연대 및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폐사 된 채 내려오다 1700년대 말에 중창하고 1918년 3창하였으며, 1944년 수해로 유실된 것을 당시의 주지 해송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극락보전과 천불전, 범종각, 산령각과 요사채 등 여러 전각이 있으며 6~7세기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며 쌓은 성인 이천설성산성과 산 아래 선읍리 입상석불이 있다.
설성산 신흥사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사찰로 몸과 마음을 힐링하기 좋고,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탁 트인 풍경은 시원한 맛이 있다. 다만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수풀이 제법 우거져 있으므로 등산하고자 하는 사람은 긴바지 착용을 권한다.
신흥사 표지석을 지나 내려가니 利川 雪城山城(이천 설성산성)이 있다, 설성산성은 이천시 장호원읍에 있는삼국시대 산성으로 1984년 9월 12일 경기도 기념물 제 76호로 지정된 산성이다,
설봉산성은 이천시 장호원읍 설성산 봉우리와 그 아래의 큰 계곡을 포함한 험준한 산의 지형을 이용해 쌓은 산성으로 지금까지 성의 자취가 비교적 분명하게 남아 있어 성 전체의 윤곽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성 城의 둘레는 약 1km, 폭 5m, 높이 4∼5m이다. 성은 바깥을 향해 경사지게 쌓고 안쪽으로 돌을 메우는 방식으로 쌓았는데, 매우 견고하게 발달된 성 쌓기임을 알 수 있다.
성 城 벽은 대부분 돌로 쌓았지만 동쪽 능선에는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곳도 있다.
설성산 정상 바로 밑에 건물터 흔적이 남아있고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성 안에는 도랑을 판 흔적도 있으며, 동, 서, 북쪽에 문터의 흔적이 있다.
이 성城 은 신라 내물왕(재위 356∼402)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해지며, 성을 쌓을 때 성이 쌓여질 자리로만 띠를 두른 듯 흰 눈이 내려있어 그 자취를 따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설성이라 이름 했다고 하는 성이다.
이 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성이었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이 지역을 다스릴 때 계속 보완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는 동문터다, 동문터는 설성산성애 대한 초기 지표조사에서 서문과 함께 확인되였는데 저사당시 서문은 바닥 시설, 측면 배수로, 내옹성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그러나 동문은 1970년대 도로개설을 심하게 붕괴되어 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흔적만 남아있다,
2014년에 설성산성 6차 발굴조사를 시행하여 동문터의 성벽 기단부와 내, 외벽 흙다짐, 기단을 보완한 흔적 등 축성 구조를 확인하였고 기단부는 성벽이 축성된 경사 지형을 고려하여 기반암을 계단 형태로 다듬었고 그 위에 내벽과 외벽을 쌓아 올렸다,
또한 성벽의 안정성을 보강하고자 외벽 기단부에 석재를 쌓아 올리고 외벽과 내벽 뒤쪽에 뒤채움 돌을 쌓고 성 안쪽으로 흙을 채워 내벽을 보강하였다,
동문터의 동쪽 방향 성벽은 2011년 ~ 2013년에 복원 했으며
서쪽 성벽은 2014년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옛 모습을 알 수 있도록 2015년에 복원했다,
설성산성을 지나 내려가면 이천 선읍리 석불입상이 있다, 통일신라 말(統一新羅 末) ~ 고려초기(高麗初期)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되는 불상으로. 신흥사로 오르는 진입로 옆에 있어며 원래는 불상 전체를 1석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대좌(臺座)와 동체(胴體), 두상(頭像), 보개(寶蓋) 등 4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1석으로 조성해 연결시켜 안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다.
이들 각 부분이 선읍리 마을 앞 시냇가와 그 옆 논바닥에 흩어져 묻혀 있었는데 1978년 여름에 장마로 흙이 씻겨 내려가면서 밖으로 드러나게 되자 마을 앞 광장에 두었다가 신흥사 주지 월선 스님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봉안했다. 그러나, 불두 부분이 발견되지 않아 1983년 새로운 돌로 만들어 복원했다.
대좌는 자연석 윗부분을 다듬어 5관(관)의 연잎을 두른 복련으로 새겨 넣었으며, 그 위로 회호(回護)를 이룬 1단의 족좌(足座)가 있고, 그 위를 딛고 선 두 발과 양 옆으로 떨어진 법의(法衣)의 자락을 표현했다. 대좌 윗면 한가운데 홈을 파고 촉을 넣어 불신과 연결시켰다. 대좌의 크기는 높이 20cm, 폭 97cm 정도이다, 보개는 긴 쪽이 103cm, 짧은 쪽이 86cm인 타원형 판석을 불두 위에 얹은 형태이다.
둥근 보개를 얹은 채로 조성된 두상과 동체 부분은 신광(身光)을 갖춘 불신(佛身)을 둥글게 다듬은 바위 편에 돋을 새김으로 표현했다. 수인(手印)은 왼팔을 들어 손바닥을 내향(內向)해 가슴에 대고 오른손 역시 손바닥을 내향하여 복부(腹部)를 감쌌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으로 양팔에 걸쳐 의문(衣文)을 흘렸으며, 소매는 넓고 길게 족좌(足座) 부분에까지 흘려 내려져 있다. 가슴의 의문은 원호를 그리다가 밑으로 내려오면서 타원을 이루었는데, 그 선이 뚜렷하고 유려하다.
법의(法衣)의 형태나 몸에 아무런 장신구의 표현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여래(如來)의 상(像)임을 알 수 있다. 전체높이 257cm, 신광의 폭은 113sm, 두께는 15~16cm이며 불상의 높이는 234cm, 어깨폭은 59cm이다, 석불입상앞 마당에 봉화길 제 9길 첫번째 스템프함이 있다,
여기서 설성산성이라고 새겨진 스템프를 찍고
제9길 설성산성길 이야기를 읽어보니 음죽군 읍치 선읍리 이야기다, 삼한시대의 노람국을 노음죽현에 비정되는데 이는 노람이 노음과 비숫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라고 시작하는데 그 내용은
옛 음죽군의 중심인 장호원은 본래 장해원이라는 역원에서 유래되는데 일제시대에 갑자기 장호원으로 바뀌였고 이 경위가 석연치 않다고 한다,
장호원을 흐르는 청미천은 원래 천민천(天民川)인데 대동여지도 작성 과정에서 천미천으로 오기 되었고 나중에 지금의 청미천이 된 것이라 한다,
장호원읍과 설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설성산에는 설성이라는 성이 있는데 신라시대에 눈이 띠를 이루어 내려 쌓인 흔적을 따라 성을 축조했기 때문에 지은 이름 이라고 하고
선읍리는 봉화로 노선상에 위치한 3번 국도(경충대로)에 약간 빗겨 있으나 실제 옛길 노선상에는
지금과 같은 곧은 형태가 아니라 행려자가 머물기 위해 선읍리로 약간 우회하는 노선으로 표기되여 있다,
다리를 건너 가다보면 전신주에 사각판 이정표가 있는데 청미교 사거리는 아직도 10,1km나 남았다,
그러고 보면 설성산 정상에서 너무 오래동안 쉬여서 거리 감각이 무너졌나 보다
지난주에는 20여 km를 5시간도 채 안되여 끝을 냇는데
오늘은 그 보다도 짧은 16,5 km 정도인데도 아직 10,1 km나 남았으니 아직도 갈길은 다,
선읍2리 마을이 보인다, 초행길이지만 이지역은 넓은 농지가 뒷받침해 주는 넉넉한 마을이라는 점이다,
계속해서 선읍2리 마을앞 천변 둑으로 내려가다 보니 붓을 세워 놓은 공원이 보인다,
여기는 음죽현 쌈지 공원이다, 설성산 자락에 위치한 선읍리는 옛 음죽현(陰竹縣) (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설성면, 율면, 및 충북 음성군 감극면, 생극면, 일대 관할)의 도읍지로 雪城은 음죽의 옛 이름이다,
음죽현(현 장호원읍 선음2리)은 예로부터 풍수지리가 뛰여나고 마을이 아늑하여 명당 자리로 알익히 알려져 있으며 현재까지 옛 지형을 잫 보존하고 있어 백로가 집단으로 서식하는 것을 보려는 사진 애호가들이 자주 찾는 여행지로도 유명하다,
능호관 이인상(1710년 4월 26일 ~ 1760년 8월 15일)은 3년간 음죽현감을 지내고 여생을 설성산 남쪽자락에서 보낸 것으로 알려진 이인상은 글과 그림에서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른 서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전주 이씨로 세종대왕의 열셋째 아들인 밀성군 이침의 후손으로 현재의 장호원과 깊은 인연이 있는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서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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