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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자화문에서 숙정문 까지의 성곽을 따라,(2009년 10월 24일) 본문

Trail(둘레길)/한양 도성길

자화문에서 숙정문 까지의 성곽을 따라,(2009년 10월 24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09. 10. 24. 16:30

 지하철 5호선으로 광화문에 들어서니 광화문광장에 지난 10월9일 한글날 준공한

세종대왕상이 정부종합청사와 세종문화회관 앞에 설치되였다, 신발이 닳도록 이길을 드나들었든

세종이였겠지만 600년이 지나 후손들이 여기에 자신의 동상을 세울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 동안 세종대왕상은 덕수궁에 있었으나 광화문 광장조성 계획에 따라  올해 이자리로 옮겨 

새로 건립하여 세웠다,  먼 후일에는  이 사실도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정릉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김신조 일당 침투시 청와대 바로 옆 전투로

순직한 고최규식 경무관(당시 종로경찰서장)의 동상이 서 있는 곳, 청와대옆 자화문에서 내렸다, 

바로 이어지는 창의문(彰義門 )또는 자화문이라 불리는 문을 출발해서 건국초기 부터 잠겨있든 서울 성곽구간인

한양도성길 청와대 뒷산을 올라 둘러보려한다, 서울성곽에는 동서남북 사대문과 그 사이에 사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사이의 북소문으로 <올바른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적은 없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화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리워저 왔다

태종 13년(14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여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 한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세종4년(1422년)에 군인들의 출입통로 로  이용할수 있게

했고 광해군9년(1617년)에는 궁궐보수 작업때 석재운반을 위하여 열어 주었다는 조선왕조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든것 같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되는것은 영조 17년(1741년)년

이곳을 수축할때 당시 훈련대장이든 구성임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년)때 의군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것 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저 비로서 세워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1956년 창의문 보수공사때 천장 부제에서 묵서로 기록된것으로 확인되였고,

인조반정때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창의문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중에서 유일하게 옜모습을 간직하고 수백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 이

윤기를 발하고 있는 문이다

서울성곽은 사적 제10호. 둘레 약 17㎞. 조선왕조는 1394년 11월 한양으로 천도하여

궁궐, 종묘, 사직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다음 해인 1395년 9월까지 대체적인 건설을 끝내고 수도를

방어, 수호하기 위해 성곽을 쌓기로 했다. 공사는 1396년(태조 5) 1월부터  시작하여 49일 간 지속되었다. 

이때 각 도로부터 동원된 인부는 11만 8,000여 명으로 세밀한 계획을 세워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의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이중 삼중의 책임자와 감독자를 두어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위한

방법으로 성벽 바깥쪽 돌에 감독자의 출신지와 성명 등을 새기게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사 실명제인 셈이다,


지금도 남산 동쪽의 성벽에는 그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

성곽은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기초석이 장대하고 성벽이 

수직형이며 돌과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메꾸는 등 그 축성방법이 조잡했다.


성의 기초부분이 높고 험한 곳은 석성으로 하여 높이 15척, 총연장 1만 9,200척

이었고, 낮고 평탄한 곳은 토성으로 축조 했는데 아랫단 의 너비가 24척이며 윗단의 너비가

18척이고 높이가 25척으로 총연장 4만 300척이었다. 요컨대 이 공사는 짧은 기간에

17㎞ 이상의 장성을 축조했기 때문에 견고하지는 못했다고 알려진다,

  그 때문에 1396년 8월부터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의 백성 7만 9,400명을 징발하여

2차 공사를 시작했다. 2차 공사는 동대문 부근 등 봄철 공사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곳의 완축과 여름철

장마로 무너진 곳의 개축, 그리고 낮은 성의 보수, 성문의 누각을 짓는 일에 주력했다. 아울러 도성의 8개 성문(四代門 과

四少門)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는 1차 공사에 대한 보수, 완성을 위한 공사였다 고 볼 수 있겠다.  이 공사는

그해 9월 24일 종료되었지만 그 후에도 군인, 승도 등에 의한 부분적인 보수는 계속 되었다.

그러나 서울성곽이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422년(세종 4)에 와서야 가능했다. 서울성곽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성을 모두 돌로 완벽하게 쌓았다.

   둘째, 성가퀴(女墻)를 높게 하여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셋째, 수문(水門)을 증설했다.

   넷째, 성문을 개수하거나 옮겨서 설치하여 도성 출입문으로서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다섯째, 성 주위 안팎에 큰 길을 내었는데, 이는 순찰과 유사시의 대비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였다.

   여섯째, 성 주위를 확장했다. 

 

  건너다 보이는 곳은 인왕산으로 서울성곽이 계속해서 이어져 있다, 

저 성곽은 서대문으로 이어진다,

도성문으로는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숙청문(북대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덕문의 이른바 8대 문이 있었다. 도성을 보수하는 책임관청으로는

성문도감(城門都監)을 설치하고. 그리고 도성의 수호와 경비를 위한 기구로 병조예하에

  도성위(都城衛), 도성경수소(都城警守所) 등이 있었다.

청와대뒤 백악산은 성곽구간에서는 제일 높은곳이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민심을 일신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고자 천도를 결심했다.

처음에는 계룡산이 수도로 거론되었으나 하륜(河崙)과 정도전(鄭道傳),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건의를

받아들여 1394년(태조 3년)한양으로 천도했다. 한양을 새 왕조의 수도로 정하는 데는 한양이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한강과 같은 큰 강을 끼고있어  교통상 편리한 곳이라는 점이 고려되었다,

↑ 김신조일당의 청와대 습격당시 교전으로 이 소나무에 탄흔이 남아 있다,

그때부터 이소나무는 1, 21, 사태 소나무 로 불리여진다

백악산 정상에서 얼마되지 않는곳에 있는 청운대다,

백악산에서는 두번째 봉우리인 셈이다, 청운대는 그리 넓지는 않으나 군사적으로는

유용하게 이용되는 장소인것 같았다, 여기서도 시내는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곳은 곡성이다, 이곳에서는 북악스카이웨이에 있는 팔각정도 보이고

바로 건너 삼각산 보현봉이 가장 큰봉우리로 보이는 곳으로 서울성곽의 치(雉)다, 

(치(雉) : 성곽중 일부분을 돌출시켜 (반원형이나 각형으로)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쏘거나 공격하기 위한 방어시설을 치 라고 한다,)

촛대바위로 불리워지는곳이다, 왜 촛대바위라고 불리워 졌는지 알수없고 기록도 없다, 

내게 친근한 촛대바위는 동해추암에 있는데,..

백악마루 라는 곳이다, 백악산 조망이 좋은곳에 큰 마루를 만든후 그렇게 부르는것 같다,

이곳에서는 경복궁과 광화문통이 다 내려다 보인다,

백악 마루에서 내려다본 세종로와 경복궁, 날씨가 맑지않아  뿌였기는해도

여기서는 경복궁 근정전과 광화문, 그리고 아침에 세종대왕상을 보았든 광화문 광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이 천도를 할때 풍수설(風水說)이 큰 몫을 했다고 알려지는데. 백악(白岳)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낙산(駱山:左靑龍)과, 인왕산(仁王山:右白虎)이 좌우로 둘러 에워싸고, 남산(南山:또는 木覓山, 案山)이 알맞게 앞에

놓여 있으며, 굽이쳐 흐르는 한강 너머로 멀리 관악산(冠岳山:朝山)이 조아리는 한양이야말로 능히 왕도가 자리잡을

한 명당이 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도성, 궁궐, 종묘, 문묘, 사직단, 조정청사, 주거지 및 시전의 배치와

가로의 건설 등 도시 내부 구조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역사는 기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