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북한산성 300주년, 우리는 무었을 생각해야 하나?(2011년 9월 19일) 본문
2011년 9월 북한산 북한산성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달이다,
북한산성은 1711년 4월 3일에 축조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준공했다,
그러니 2011년 9월은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이 된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산성 역사를
관련자료를 인용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북한산성 축조 기록을 담은 <북한지> 연혁부분에 따르면 북한산성은 원래 고구려의 산군이었으며,
남평양(南平壤)이라고도 했다. 백제의 온조왕이 이를 차지하여 온조왕 14년(B.C 5)에 성을 쌓았다. 남평양성은
지금 경도의 북한산성이며, <삼국사기>에는 개루왕(蓋婁王) 5년(132)에 북한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다.
근초고왕 26년(371)에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개로왕(蓋鹵王) 21년 고구려 장수왕이 침입하여
이 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탈출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마침내 성은 폐지되었다 고 돼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거의 비슷하게 나온다. 따라서 고대 삼국시대부터 북한산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들어와서부터 본격 논의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외침을 막기 위해 한양 도성을 더 높이 축조를 할 것이냐? 와
새로운 성인 북한산성을 쌓을 것인가? 를 놓고 신하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갑론을박을 벌인다. 이는 도성을
지킬 것인지 버릴 것인지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쉽게 결론이 나지않았다,
북한산성 축성에 대한 첫 상소는 의외로 일찍 제기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에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왕에게 상소를 올려 북한산성 축성을 권한다.
그 때가 세조 2년(1456)이었다, 그후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 따르면, 숙종 29년(1703) 이조 판서 김구가
상소문에서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이 편리하다고 여겨 다시가서 거듭 살펴보니, 천지만엽이 둘러싸여서 진실로
아주 안전하고 함락되지 아니할 형세가 있었으며, 또 깎아지른 듯한 곳이 많아서 성을 쌓을 즈음에 공역이
크게 줄어들고, 위급할 때에 힘을 얻음이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없었으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만 된다 고 하지만
군부를 받들고 외로운 성을 지키는 것은 진실로 위태로운 일이니, 먼저 북한산성을 쌓아서
도성과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대가(大駕)를 따르는 군병은 북한산성을 지키고
도성 백성과 다른 군사는 도성을 지키면, 설령 도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족히 급함에 임하여
물러가서 지킬수 있습니다 라고 북한산성 축성을 숙종에게 강력하게 건의했다고 한다,
이에 숙종은 도성은 지킬 수 없음을 익히 헤아린 것이다.
북한산성의 축성은 백성과 더불어 함께 지키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 고 밝혀 축성 공사를 강행했다. 이때가 1711년 4월 3일이다.
장기간 축성 논란이 있었던 만큼 숙종은 공사를 신속히 끝내기를 원했다,
전국에서 부역에 동원된 인원과 승군은 총 10만여명이나 되였다,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3군 문으로 구역을 분담해서 성을 쌓도록 했으며, 성곽의
총 길이는 약 12.7km에 달했다. 성이 완공된 뒤에는 승군으로 하여금 성을 수비하도록 했으며, 승군
대장에게는 팔도 도청섭이란 직책이 주어졌다. 초대 승군대장은 성능이라는 스님이였다,
성능이 바로 영조 21년, 1745년에 <北漢誌(북한지)>를 쓴 주인공이다.
<북한지>에 소개된 북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북한산성의 전체 둘레는 12.7km에 이르고,
성곽 시설은 수문 1개소와 북대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대서문 등 6개소의 성문과,
서문, 백운봉문 용암봉문, 가사동문, 부왕동문, 청수동암문 등 6개소의 암문, 그리고 중성문 등 모두 14개의
문으로 이뤄졌다. 성곽공사에 이어 군사지휘소인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등 장대(將臺) 3개소가
마련됐다. 동장대가 북한산성의 총 지휘소 역활을 했다고 기록되여 있다,
또한 성 내의 식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물 99개소와 저수지 26개소를
숙종 38년(1712) 10월까지 만들어 북한산성 축성 공사를 마무리했다. 북한산성 축성 당시 14개의 성문 중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의 5개 문은 높이 11~13척, 너비 13~14척으로 홍예와 초루가 설치되었다,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동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등
9개 문의 높이는 약 7척, 너비 약 7~8척 내외로 높고 낮음이 일정치 않다. 또 수문은 높이 16척, 너비 50척이었다.
소동문은 보국문, 소남문은 대남문, 백운봉 암문은 위문, 청수동암문은 위녕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1711년 성을 쌓어면서 부터 내려온 승군들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강제 해산됐고,
사찰도 점차로 해체 됐다. 이어 1915년 8월 북한산에 내린 집중호우로 돌로 된 성벽만 남겨놓은 채
행궁과 동장대 등 산성 내부의 주요 시설물이 대부분 무너지거나 홍수에 떠내려갔다. 현재의 산성은
1990년부터 서울 정도(定都) 600년 사업 일환으로 복원과 재정비를 거듭, 역사 탐방로와
등산로 로 활용하면서 지금에 이른다
적의 침략을 대비해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북한산성의 300주년 맞이에 대한
북한산국립공원이나 서울시, 고양시등의 행사는 거의 없는것 같다, 궂이 찾아보니 고양시가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문화유산 특강을, 경기문화재단이 북한산성의 축성 300주년 기념 심포지엄 정도,
그것도 단발로 차 한잔 하는 수준으로 한것으로 알려진다. 왜 우리가 북한산성 축성 300년의 역사를
소중히 해야 하는지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두번 다시 이땅에 영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뿐만은 아닐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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