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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조령관-영남과 충청이 갈라지는 문경새재 조령3관문(2016년 4월 3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충청·경상·전라

조령관-영남과 충청이 갈라지는 문경새재 조령3관문(2016년 4월 3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6. 4. 4. 15:54

문경새재(조령) 조령관이 있는 곳이 인다,

잠시전에 보았든 허물어진 성곽은 이곳으로 이어저 잇었어리라,

조령 3관문인 조령관^^,

영남과 충청이 갈라지는 문경새재 제 3관문인 조령관은?,

문경새재 정상에 세워진 조령관은 문경쪽의 제1관문인 주흘관을 지나 태조왕건드라마 세트장이

있는 곳과  제 2관문인 조곡관을 지나야, 제 3관문인 이곳 조령관으로 들어올수 있다, 

조령관은 영남과 충청의 경계에 서있다,

충청땅 성문 우측에는 이 길이 문경새재 과거길이였다는 표지석과

좌측에는 이길을 따라 나가면 조곡관과 주흘관으로 이어진다는 안내 지도판도 붙어있다,


이곳에서 문경새재 2관문인 조곡관 까지는 3,5km 이며 약 1간이 걸린다고 안내되여 있다,

새재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아주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지게 되였다,

임란전에 왜군에 대비해 산세가 험한 새재에 성을 쌓아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어나

실행되지 않았고 막상 왜군이 처들어오자 신립장군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쳣다, 왜군은 죽령, 추풍령, 새재등

세갈래로 북상했고, 그중에서도 주력 부대는 새재방면으로 길을 잡아 북상하든중 새재에 이르러 그 험준함에 놀랐어나

정작 방비가 전혀 없었어므로 힘들이지 않고 그곳을 통과해, 탄금대에 이르러서야 신립장군과 접전을 벌인다,


결과는 신립장군이 대패했고 왜군은 거침없이 한양으로 진격하게된다, 이때 신립장군이 천혜의 요쇄인 새재에서

왜군을 물리첫다면 한양이 함락당하고 임금이 파천을 하는 치욕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이 없다, 그만큼 새재는 조선을 사수할수 있었든 중요한 관문이였든 곳이다, 

백두대간은 동해안을 타고 내려 오다가 태백산에 이르러서야 서남으로 방향을 튼다,

그 백두대간의 북쪽 한강유역과 남쪽 낙동강 유역을 잇는 고개는 풍기와 단양을 잇는 죽령, 문경과 충주를 잇는

새재(조령), 이화령, 계립령, 등이 있다, 계립령과 죽령은 삼국이 각축하든 시대에 개척된 길이나 새재는 선시대에

가장늦게 개통된 새길이다, 이화령은  일제 강점기에 새재옆으로 딱은 신작로 로 모든길이 그렇지만

새재는 한양으로 통하든 중요한 길목이였다,

조선시대에 한양을 중심으로 온 나라를 잇는 길의 체계를 만들었는데 여섯 대로중

새재는 동래에서 한양을 잇는 가장 빠른길로 개척되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지금의 고속도로로 따라가면 428km인데

새재를 통해 충주로 거처가면 380km다, 그래서 새재는 조선시대 수많은 사람들과 일본등 외지의 사신들,

우마차를 끄는 소들의 발길까지도 묵묵히 받아내며 우리국토의 중 추인 영남대로

 대동맥의 역활을 톡톡히 했든 길이다,

새재는 험하고 높아서 대낮이라도 혼자서는 넘지못하고 반드시 사람들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어며 날이 저물면 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낮에 넘었다고 한다,

그 험준함 때문에 나는 새도 쉬여간다는 뜻에서 이름이 새재(鳥嶺)가 되였다,

또는 새로난 고개의 뜻으로 새재라고 불럿다고도 한다,

새재일대는 낙동강 유역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곳이니만큼 삼국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기위한 싸움이 끊이지 않았어나 조령성은 임진왜란후 1594년 공사가 시작되여 숙종 연간에 완공되였다,

관문자리로는 여러곳이 물망에 올랐어나 가장 험준한곳, 깍아 지른 절벽이 양쪽으로 솟아있고 나무를 걸치고

물을 걷너야 하는곳이 24곳이나 되는 응암이 관문을 설치할 자리로 선정되였다, 그곳이

고개정상에서 동쪽으로 10리 거리에 있는 지금의 제 2관인 조곡관이다,

이어 숙종때 고개정상 가까이에 제3관인 조령관과

문경에서 새재를넘는 초입에 제1관인 주흘관을 두고 성을 쌓았다,

그 뒤부터 이 새재길은 과거보러 가는 뭇 영남선비들, 서울로 향하는 영남의 각종 물산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특히 선비들은 추풍령을 넘어면 추풍낙엽으로 떨어지고 죽령을 넘어면 주르륵 미끄러진다는 속설때문에

 새재길을 가장 많이 애용했다고 한다,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걸어서 새재를 넘지 않는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기차라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게 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충북 수암보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이화령이1925년에 차가 다닐수있는 신작로 로 딱이면서

이 새재길은 길손을 잃고 옛길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