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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맑은물) 새벽다리에서 청계광장까지(2018년 4월 10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청계천(맑은물) 새벽다리에서 청계광장까지(2018년 4월 10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4. 10. 23:14


새벽다리다, 종로구 예지동과 중구 주교동 45번지를 이어주는 청계천 다리로

시장천막을 형상화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과 향수를 연출하는 설계로 2004년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새벽시장의 활기와 향수를담은 이름이라 새벽다리로 명명했다,

종로쪽에는 광장시장, 평화직물이 있고,

남쪽은 방산종합시장있다, 배오개 다리와 마전교 사이에 있는다리다,


세운교다,

종로구 장사동 182번지와 중구 산림동 200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다리 옆에 세운상가가 있어 다리 이름을 세운교라 했다.

세운상가에 조명가게가 많아 이를 특성화하여 다리에 빛을 표현한 다리다,

관수교(觀水橋 )다, 다리 이름은 인근의 동 명인 관수동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이곳에 청계천 준설사업을 위한 준천사를 설치하고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으므로

1918년 일제가 지금의 청계천 3가 사거리에 다리를 놓고 관수교라고 했는데 청계천 복개로 다리가 없어졌다가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전통 한옥의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 형태로 새로 건설했다


수표교댜,

나무로 만들어 젓든 수표교를 재현해 놓은 모습이다,




삼일교(三一橋 )다, 종로구 관철동과 중구 장교동 86번지 사이 청계천 삼일로에 있는 다리로.

삼일교는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로 이름을 삼일로 라 했고 다리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삼일교 다리형태는 인근의 인사동과 명동성당 등을 연계한 근대 건축의

이미지를 반영한 설계로 만들어 졋다,

세라믹타일 5120장으로 폭 2m 길이 192m 를 이어붙여 만든 정조반차도(화성행차도)도 있다,

이 그림은 조선 22대 정조가 어머니 경의황후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당대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등이 그린 그림이다, 기록에 따르면 사람이 1505명 말 516필이 그림에 나와 있고

생략된 사람들 모두는 1807명이고 말은 796필로 전체 인원은 5661명과 말이 1417필 이라 되여 있다,

광교와 삼일교 사이에 벽화로 제작된 이 그림은

왕실의 기록화이자 한 폭의 풍속화로 당시 행차의 격식과 복식, 의상, 악대구성 등 을 살필수 있는 귀중한 역사 자료다,

벽에서 흘러 내리는 벽 분수도 있다,

이제 장통교로 간다, 중구 장교동과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다.

이 근방이 조선시대 장통방이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이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고 하여

 長倉橋, 장찻골다리, 줄여서 長橋라고도 불렀다.

1480년 이전에 설치되었고, 다리 서쪽 기둥에 辛未改造 와  己亥改造 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차례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다리는 교각이 없었고, 1929년 홍수로 인해 붕괴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했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중앙과 지방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보던 京主人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또한 19세기 개화파의 선각자적 역할을 수행한 유대치가

장통방,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종로구 관철동 71번지와 중구 수하동 37번지 사이 청계천에

다리를 만들고 옛 이름을 따서 장통교라고 했다.


광교(廣橋)다, 종로네거리에서 을지로사거리 방향으로

나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의 청계천 위에 놓여 있던 다리다.


조선시대 광통방에 위치하고 있어 광통교 혹은 광교라 불렷든 다리다,

조선시대 도성내에서 가장 큰다리로 경복궁 육조거리 종루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대로를 연결하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다, 또한 주변에 시전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든 다리였다,

이 다리에는 조선최초의 왕비 즉 태조이성계의 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에 얽힌 사연이 전해저 온다,

강씨의 능은 본래 경운궁 서쪽 지금의 주한 미대사관 뒤편 근처에 있었든것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그때의 석물 일부가 그곳에 남아있다,

태조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어면 그의 묘를 사대문 안에 두고 그 동쪽에 명복을 빌기위한 원찰 흥천사를 지금의 서울시 의회쯤에 170칸 규모로 지였다,

그러나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 이방원이 신덕왕후의 소생들과 정도전등 개국공신들을 모두 참살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분묘는 정릉으로 이장

시키고 정자각은 헐어버린 후 그 목재와 석재를 가까이에 있는 중국 사신이 머무는 북평관의 북루를 짓는데 썻고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진 병풍석(屛風石)은 홍수로 떠 내려간 이곳 광통교를 돌 다리를 다시 놓는데 쓰게 했다,

600년이나 된 그 병풍석이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지하에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이곳 광통교 밑에 ↑ 있다, 오른쪽 벽에 있는 무늬가 새겨진 돌판이 신덕왕후의 병풍석이다,

이제 모전교(毛廛橋)로 간다,

모전교는청계천 광장에서 시작되는 청계천의 첫번째 다리다,

옛 교량명칭으로 길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과일을 파는 과전(果廛)을 모전[隅廛]이라고 불렀는데,

이 다리가 바로 그 모전 부근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종로구 서린동과 중구 무교동 사이의 네거리에 있던

청계천의 옛 다리다. 부근에 토산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이 있어서 모전다리 즉 모전교, 모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원래는 태종 12년(1412)

종묘입구 서쪽의 개천을 석축(石築)으로 방축하고 동쪽을 목작방축(木作防築)할 때 석교로 조성하였다. 당시는 신화방동구교라

불렀으나  영조 연간(年間)에 작성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分界之圖)에는 모전교로 기록되어 전한다.

일명 무교동과 관련되어 武橋라고도 했다.

일제강점기 사진자료를 보면 돌로 만든 석교이며, 난간은 장통교와 비슷하고 길이는 4칸이었다

모전교 아래로 청계광장이 있는 곳 4m 아래로 떨어지는 2단 폭포가 보인다,

2단 폭포 앞에 는 8도에서 가져온 화강석으로 팔석담을 만들었다,

이곳 팔석담에서 간절히 소망을 빌면 그 소망이 이루어 지도록 천지간의 모든 것들이 뜻을 모아 준다고 한다,

청계천은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부터 자연상태의 하천이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 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여 있었다,


서울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봄·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하다. 따라서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

가을은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 (乾川)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했다.더구나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해 있어.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조선초기 도성건설사업과 함께 배수를 위한 물길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큰 사업이었다.

개천에 대한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태종때 부터였다. 태종은 즉위 초인 1406년부터 1407년까지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는 등 몇 차례에 걸친 정비로 하천의 모습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것은 아니였기

때문에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고, 다음해인

1412년(태종12)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모두 52,800명의 인부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했다. 주요 하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 다리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 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태종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다. 이것은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1441년(세종 23)에는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 표석을
세웠다. 이 표석에 척(尺)·촌(寸)·분(分) 등 눈금을 기둥 위에 새겨,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수표(水標)다.
수표는 개천의 수위를 계수화하여 측정함으로써 사전에 홍수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세종때 주목할 만한 사항은 청계천의 성격을 도심의 생활하천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서울을 조선의 수도로 정할 때

풍수학상으로 서울 둘러싸고 있는 외수(外水)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에 대응하여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수(內水) 청계천이

한강과는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고려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성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 청계천에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논쟁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청계광장으로 왔다, 청계광장에는 스프링(Spring)이라는 높이 20m인 조형물이 있다, 이 작품의 외부는 상승하는

나선령의 다슬기모양을 하고 있고  내부는 DNA 나선령 구조를 연상하는 적(赤), 청(靑)의 리본형태로 되여 있다, 청계천이 지닌

생명복원 을 상징하고 샘(泉)솟는 청계천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작품 하단부는 원형터널 모양으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물이흐른다,

삼색조명이 어우려 지는 캔들 분수다, 지금의 청계천은 사실상 이곳부터 시작이 된다,

오늘은 하류에서 이곳 상류로 거슬러 올라왔기 때문에 조금은 헷갈리기도 하지만 청계천 관광은 대부분

이곳 청계광장에서 부터 동대문 오간수교 정도에서 끝이난다,

청계광장과 맞다아 있는 동아일보 사옥

동아일보 사옥을 지나 광화문역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