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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해안국토종주 10-10(군산비응항-군산역)동백대교-군산내항-진포해양공원(2018년 5월 23일) 본문

서해안 일주(해남 땅끝-김포)/전북·고창,부안,김제,군산,

서해안국토종주 10-10(군산비응항-군산역)동백대교-군산내항-진포해양공원(2018년 5월 23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6. 29. 06:00


동백대교 아래에서 서천을 바라본다, 올해말(2018년) 개통이되면 군산시와
서천군은 해야 할일이 밚을것 같다, 올년말 동백대교 개통은 양 시군에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올것이다,
다리 하나로 뭐가 달리지겠느냐고 한다면 더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회를 轉禍爲福(전화위복)으로 삼아 주민과 함께 지역강점을

최대한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적극 대응해 나가면 분명히 상상도 못했든 그 이상의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런생각을 하면서 조금위로 올라가니 물때가 바뀌는지 물살이 소용돌이치면서 빠저나간다,

처음보는 광경에 어리둥절 해 지지만 지금이 썰물때인 모양이다,

 동백대교? 이 다리 이름이 왜, 동백대교인지는 모르겠어나

부디 이곳 동백대교가 군산시 와 서천군 을 한단계 더 도약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래본다,

동백대교 교각사이로 바라보는 서천 장항읍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

군산은 전북이고 서천은 충남이지만 지역 이름이야 뭐 대단할까? 이제 두 도시는 한지붕에서 살아가는 두 가족일텐데,

그런생각을 하면서

올라가는데 물살이 점점더 빨라지는게 보인다,

그러다가보니 물위에

뜨 있든 배들이 서서히 갯벌위로 올라 앉는게 보인다,

이 마을이 끝나면 군산 내항이다,

군산내항은 100년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가는길 옆에 바다를 바라볼수있게 만들어 놓은 곳이 보인다,

망서림없이 이곳으로 올라섯다,

그리고 하류 동백대교 방향으로 보고

싱류인 금강하구언 방향도 올려다 본다,

그리고 바다건너 서천군 장항 방향까지

물살은 이제 잠시 전보다 더욱  빠른속도로 빠저 나가는게 보인다,

옥도면사무소다, 옥도면사무소는 군산내항, 그러니까 예전 군산항인 이곳에 있다,

새만금방조제를 걸어서 건너오면서 고군산군도 부터 오늘 내가 지나온 곳 까지 이틀 동안이나 옥도면사무소

관할 땅을 밟고왔다, 그러나 군산내항에 대한 역사자료를 부탁했더니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이유는 한마디로 모른다였다,

면사무소앞에 걸려있는 50만 국제관광기업도시 군산이라는 말은 보기좋으라고 붙여놓은 모양이다,

옥도면 사무소 일대가 군산항이다, 지금은 群山內港(군산내항)으로 불리는 군산시 장미동에 위치한 항구다,
군산 내항, 또는 군산항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고려 초기에는 전국 60개 포구에 설치된 조창 중 한 곳인 조종포가 있었다. 고려후기에는

전국 12개 조창 가운에 한 곳인 진성창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칠읍 해창이 운영되던 물류 중심지였다.

군산 내항은 개항기 대한제국 1899년(고종 36)에 부산(1876년) 원산(1880년), 목포(1897년),

진남포(1897년)에 이어 개항했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미곡 수출을 위해 1907년 전군 도로(全群道路)의

개통을 포함하여 부두 설비와 해안 매측을 통해 항만 기능을 강화하고 정비했다.

군산 내항은 1899년 개항 이후 1905년 대한 제국 정부에 의해 근대적 항구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인 1909~1915년에는 부잔교 3기를 축조했고, 화물전용 철도를 금강 기슭까지 연장했어며 1918~1921년에는

부잔교 1기와 철도 인입선 연장, 강안매축 등을 추진하여 대형 부잔교 3기와 창고, 도로, 철도, 기타 해상 연락 시설 및 육상의

제반시설을 완공하였고, 기선(汽船) 접안이 가능하게 되었다. 1979년 군산 외항 부두가 신축되자 군산 내항은

수입과 수출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1974년부터 군산 외항이 신축되기 시작하여 1979년 군산 외항 1부두가 2만 톤급 1선석,

1만 톤급 2선석 규모로 완성됨에 따라 군산 내항은 수입과 수출입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연안 여객

터미널도 군산 내항(장미동)에 있었으나, 계속되는 토사 유입으로 여객선 운항에 어려움을 겪다가

2005년 4월 군산 외항 3부두 인근 군산시 소룡동 1668 군산신항으로 이전했다.

2007년 해양 수산부의 전국 항만 개발 기본 계획안에 따라 항만시설,·주거시설,·숙박시설,·

상업시설,·업무시설 등 공유 수면 포함하여 군산 내항 중심 총 47만 4,300㎡에 대해 개발이 진행 중이다.

 2010년 군산시의 근대 역사 경관조성 사업에 따라 개발 중이기도 하다. 현재 군산 내항은 수심이 낮아 소형 선박이나

 어선이 주로 이용하고 있으며, 친수(親水) 문화 공간인 진포 해양 테마 공원으로 조성되어

군산 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 위 사진의 다리가 뜬다리(浮棧橋 부잔교)다, 뜬다리의 역사는 아래와 같다, 

위 사진의 뜬다리는 3번째 다리로 아래 사진들에는 2번째와 1번째 뜬다리도 있다, 뜬다리(부잔교)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의 특징을 살려 물에 뜰수있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정박시설을 건설한 다음 부두에서 정박시설까지 다리를 만들어

밀물과 썰물시 상하로 움직이도록 한 선착장 시설물이다, 일제가 전라도 곡창지역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송출하기 위하여

뜬다리를 제3차축항공사기간(1926~1933)에 3기를 설치하여 3턴톤급 기선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했어며

이후 3기가 추가되여 총 6기가 사용돠였다, 그러나 현재는 3기만 남아있다,

군산항은 한반도 서해안의 중심부인 금강하구에 위치하며, 호남 평야의 양곡을 수송하기 위해 1899년(광무 3)

개항된 이래, 물동량의 증가와 함께 시설 확충과 장비의 현대화가 추진되었으며, 1990년대부터 군장 신항만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서해 중부권 관문항이자 환황해 경제 시대 주역으로서 1999년 개항 100년을 거쳐 2018년 개항 119년을 맞게 되었다.

군산항은 천혜의 입지 조건과 그 배후에 국내 유수의 곡창 지대라 불리는 호남평야가 광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는 서남해안에 배가 드나들거나 머물기에 좋은 항구가 없고, 중국 대륙과의 교역에서 전초기지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1899년(광무 3) 5월 1일 일본에 의해 개항되었다. 개항 당시 군산은 당시 5, 6개의 언덕 기슭에 약 150여 채의 한옥이

산재하여 일본 문헌기록)있었고, 저 지대에는 조수가 드나 들며 갈대가 무성한 습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군산항 축항 공사는 1905년(광무 9)부터 시작되었는데 제 1차 축항 공사는

세관 용지의 일부로 사용할 강변 매립공사와 고정 잔교(桟橋) 1기의 설치, 육상 설비, 강변 석축 사업이 이루어졌다.

 군산항의 제 2차 축항 공사는 1909년(융희 3)~1915년까지 진행되는데,

1911년에 발족한 군산항 축항 기성회가 담당한다. 그 내용은 군산 부두의 자동 전화소 설치,

군산항역까지의 철도 연장, 고정 잔교(桟橋) 3기의 건설 등이었다.

군산항의 제3차 축항 공사는 1916년~1933년까지 진행되었는데, 세관 인근 수덕사의 토석 채취와

해안 매립 및 하치장 건설, 3천 톤 기선 3척이 정박할 만한 고정 잔교(桟橋) 3기의 설치, 육상창고, 철도선 증설 등이 이루어졌다.

군산항의 제4차 축항 공사는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이루어졌는데, 대형 고정 잔교(桟橋)의 설치와 상옥 창고 등이 신축되었다.

진포해양테마공원은 2008년 처음 개장한 이래, 2010년 8월에 완공되었으며, 사업비 50억 원,

총면적 16,300㎡의 광장에 해군 장비 두 대(L.S.T.(위봉함), 상륙 장갑차), 육군 장비 여섯 대(M-548 두 대, M-48 두 대, 자주포 두 대),

공군 장비 일곱 대(F-86, UH-1B, O-2A, F-5F, C-123K, F-4D, T-41B), 해양 경비정(마니산 273함)이 전시되어있다.

특히 바닷가에는 4,200톤급, 3,288㎡[지하 2층, 지상 4층]의 위봉함이 정박되어, 체험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위봉함은 세 가지 테마로 나뉘어져 해양 및 해군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에게 유용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최무선의 진포 대첩을 중심으로 군산의 역사를 관람하는 것이다.(과거에서 만난 최무선 장군, 승리의 진포 대첩,

세계의 명해전, 진포대첩 역사속으로-4D 영상관), 1000년의 역사 진포, “Dream Hub”, 군산, 이라는 소주제로 각각 나누어져 있다.

 1380년(우왕 6) 8월 진포에 왜구가 500척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곡식을 노략질하기 위해 군산 방면으로 침입해왔다,

군사의 규모는 대체로 10,000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였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잡아매고, 일부 병력을 남겨둔 채 육지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비롯한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한편 왜구의

대함대가 침입했다는 급보를 받은 고려 정부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의 지휘하에 화약무기를 적재한 함선 100척을 출동시켜

왜선을 소탕하도록 했다.

고려 함선들은 진포에 이르러 밧줄로 서로 묶여있는 적함을 향해 일제히 화전과 화통, 화포를 사용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화공을 통해 고려 함대는 적선 500척을 모조리 파괴·소각시키고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했다, 진포대첩은 1350년

왜구들이 고려에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이래 30년 만에 고려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또 대 왜구 투쟁에서 고려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기도 했다. 더욱이 함선에서 화포를 사용한 세계해전사 최초의 전투로 역사적인 해상전투다, 이것이 진포대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