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창덕궁 궐내각사 권역 (2018년 7월 5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창덕궁 궐내각사 권역 (2018년 7월 5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7. 7. 21:12


궐내각사(闕內各司) 궁궐안의 관아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관원들이 궁에 들어와서 일하던 관청을 말한다.

궐내각사 관람 동선 안내다,

내각은 궐내각시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이곳을 통과하면 왼족에 규정걱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관청은 궁궐의 출입문 앞 쪽에 위치한다,(궐외각사) 그러나 대부분의 관청은 궁궐 밖에 있었지만,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업무를 가진 관청은 특별히 궁궐 안에 세워졌다,

내각으로 들어가 왼쪽에 있는 규정각, 어느것이 진짜 규장각일까? 현재 규장각은 3개다,

창덕궁 궐내각사에 있는 규장각과 창덕궁 후원에 있는 규장각,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다,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 원년에

설치한 것으로 창덕궁 후원에 만들어졋다, 2층 건물로 1층이 규장각이고 2층은 주합루로 불렀다, 정조 사후 규장각의 기능이

약화되였고 고종때 궐내각사로 옮겨지게 된다,


서울대학교에 규장각이 생긴 것은 일제 강점기와 관련이 있다, 조선총독부는 규장각의 도서를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 했는데 1946년 서울대학교 개교로 도서의 일부가 서울대학교로 이관되였다, 이를 전시보관하는 곳을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라 부른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왕권겅화를 이루려 했든것으로 보인다, 학문을 연구하는 왕실 도서관이라는 기본적 성격을 벗어나 정사에

관여하고 왕의 정치를 보좌하게 했다, 규장각 출신 관료들은 정조 대 완권 강화의 선봉에 서게 된다,

규정각에서 옆으로 들어가면 검서청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도로 돌아 나와서 내각 출입문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앞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니 검서청이 있다, 검서청은 규장각의 부속건물이다,

규장각에 일하는 사람들을 검서관이라고 불럿는데 이들이 머물며 일하든 공간이 검서청이였다, 정조는 검서관은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선발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이 검서관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금천(錦川)을 따라서 들어간다,

. 궐내각사는 창덕궁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옆에 위치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훼손된 것을 2004년에 일부 복원했다. 주요 관청이 모여 있는 인정전 서쪽의 궐내각사 공간이 이곳이다.

이제부터는 길이 따로 없다 그냥 열려있는 문이 길이다,

운한문이 있다, 그러나 궂게 닫혀 있다, 운한문 옆으로 나 있는길로 들어간다,

이곳은 발자국이 궐내각사 를 관람하는 동선이다,

그렇게 따라 가다가 다시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책고라고 쓰인 건믈이 2개동이 있다, 책을 보관하는 건물인가 보다,

책고, 책을 열람하는 곳이 아니니 도서관은 아니고

서고 쯤 되나보다,

금천 위 다리를 건너간다,

다리 이름은 안내되여 있지 않어니 알길이 없다,

다리를 건너가면 보이는 안내를 따라 첫번째로 선원전으로 간다,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미로 처름 얽혀있는 궐내각사,

어찌되였건 열려 있는 문으로 길은 이어진다, 이제 들어가는 곳은 선원전이다,

유교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육체와 혼백으로 분리 해석해 산릉에서는 육신에게,

종묘에서는 혼백에 대해 제사를 드린다. 왕이 죽으면 육체는 시신이 되어 재궁(梓宮,관)에 담아 산릉에 묻고,

하늘과 땅으로 흩어지는 혼백을 위해 신주(神主,위패)를 만들어 종묘에 모신다. 종묘 제향에서는 향을 살라 하늘로 올라간 혼을 부르고

 술을 땅에 부어 땅으로 흩어진 백을 부른다. 흔히 쓰이는 너무 놀라 죽을 뻔하였다 는 뜻의 혼비백산(魂飛魄散)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선원전 경내다, 선원전(璿源殿)은 생전에 그려둔 초상화인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이라고도 하며,

선원의 의미는 왕실의 족보 를 뜻한다. 선원전은 궁궐 안에 태조와 현왕의 4대조의 어진을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 생신이나 기일 등

수시로 왕의 인격에 대해 차례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며.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일 년에 다섯 차례 제사를

모시는 국가의 사당(祠堂)이다.

큰건물이 선원전이다, 그리고 사진 왼쪽 짤린 건물이 진설청이고 맞은편에 보이는 작은 건물이 내찰당이다,

선원전 건물에는 현판이없다,선원전은 역대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산사람이 아니라 죽은자의 공간이다,

 현판이 없어도 찾아올수 있다, 그래서 종묘의 여러 건물에도 현판이 없다,

왼쪽의 진설청,

오른쪽 내찰당,

창덕궁에는 1920년 이후로 신선원전과 구선원전 두 개의 선원전이 있다.

구 선원전이 원래의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조선 초 경복궁에 왕과 왕비의 진영과 선원록을 동시에 봉안하도록 지은

건물에서부터 시작됐다. 경복궁 내의 선원전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의 선원전은 숙종때 창덕궁의 경화당을 옮겨 지은

춘휘전 건물을 선원전으로 개명하고 숙종의 어진을 봉안한 후로 이곳에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모셨었다.

고종 5년 1867년에는 경복궁에 선원전이 새롭게 중건됐고 광무 1년 1897년에는 경운궁에 감실 7실 규모의

선원전이 창건됐다. 광무 1년경에는 창덕, 경복, 경운 3궁궐에 선원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창덕궁 후원

대보단 자리에 신선원전을 짓고 어진들을 옮겨 원래의 선원전은 빈 건물만 남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신선원전에 보관하던 왕의 어진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옮겨 창고에 보관했어니 불이나서 대부분 타버려서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선원전에 관련된 안내



산원전에서 보춘문으로 옆 건물로 들어가면

양지당이 있다, 양지당은 임금이 선원전에 갈때 머물든 건물이다,

왕들은 이곳에서 마을과 몸을 가다듬고 조상들을 만날 준비를 했을 것이다, 

양지당을 나간다,


이어지는 건물들은 어디가 어딘지 알수도 없을만큼 옹기종기 붙어 있다,

더욱이 건물에는 현판도 없어니 무었을 하든 곳인지 알수도 없다,

영의사다, 선원전 앞에 위치하지만 이 영의사 건물에도 현판이 걸려 있지 않다,

영의사는 의원이 집무를 보든 건물이다,

약방이다 이 건물이 내의원이다, 왕과 왕실의 건강을 책임졋든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새로 지어진 것이다, 1917년 화재 이후 창덕궁 복원 과정에서 약방 건물중 일부가

헐려 성정각으로 옮겨 졋다, 현재 성정각에 약방의 흔적이 남았다,

궐내각사를 나간다, 앞에 보이는 다리가 궁궐 대전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금천교다,

금천교와 진선문 사이로 나간다, 진선문에는 억울한 사람들이 칠수 있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왕이 북소리를 듯고 억울함을 풀어 준다는 뜻으로 설치 했겠지만 왕조시대에 임금이 사는 궁궐에 감히 어느백성이 돈화문을 들어가

금천교를 건너서 북을 칠수 있었겠는가? 백성의 억울함에 귀 기울리겠다는 왕의 상징일뿐이리라, 태종대에 설치되였어나

유명무실 해진 것을 영조대에 다시 설치 했다고 한다, 이 북이 신문고, 또는 등문고라 불렀다,


금천교 옆 느티나무, 세월을 알길이 없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다,

창덕궁 주차장으로 나가는 금호문 앞 또 한 그루의 세월을 알길이 없는 나무가 있다,

창덕궁 고목만 찾아서 역사를 캐 보는 일도 만만치는 않을것 같은 느낌이다,

이 기록은 창덕궁 대궐을 제외하고 후원의 관람동선을 기록 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