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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창덕궁후원 연경당 일원(2018년 7월 5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창덕궁후원 연경당 일원(2018년 7월 5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7. 7. 19:11


폄우사와 존덕정을 지나서 나가는길, 작은 능선을 지나면 골짜기에 보물 제1770호,

창덕궁 연경당 (昌德宮 演慶堂)이 있다, 오늘은 연경당 정문으로 들어간게 아니고 뒷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니

제일 먼저 언덕에 자리한 농수정부터 만난다,

이곳은 연경(演慶)당

제일 뒤에 있는 후문 방향이니 전체 건물의 후원격이라 볼수 있는곳이다,

사랑채로 가는길 길게 지어저 있는 건물이 연경당 서재 구실을 하는 선향재 다,

선향재 뒤편의 경사진 언덕에는 화계를 설치하고 제일 높은 곳에 농수정 을 배치하였다.

이 건물이 선향재 다,

전체의 건물구성이 단청이 없는 당시의 사대부 집 구성이다,

선향재의 모든 창문은 들쇠로 걸을수 있게 만들어 저 있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를 베풀고자 1827~8년(순조 27~8)경 지은 효심이 담긴 집이다.

창건 직후 연경당에서는 효명세자가 신하를 접견하거나 진작례를 거행하였다.

헌종 대 이후에는 익종(효명세자)의 어진과 모훈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다가 1857년(철종 8)에 터가 서늘하고 습하다는 이유로 익종의 초상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 한 동안 빈 집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고종 대에 이르러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중요한 정치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사랑채 평면은 정면6칸, 측면2칸으로서 맨 우측에 누마루가 있고 가운데 4칸은 툇간을 개방하였는데, 4칸 중 우측2칸이

대청이고  좌측2칸이 방이다. 그리고 안채에서 뻗어 나온 온돌방 2칸은 이 마루 뒤로해서 사랑방에 1칸이 연결되어 있다. 안방의 서쪽과

뒤편으로는 사랑채까지 쪽마루가 연결되어 있어 사랑채에서 안채로 갈 수 있게 되어 있고, 이 경계부분에는 판문을 달아서

개폐할 수 있게 하였다. 평면구성에 있어서는 왼쪽 끝에 누1칸이 있으며 전면에 반 칸의 툇마루가 대청에 나 있다.

벌서 가을이?

그래서 연경당은 가을철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라 알려지기도 한 곳이다,

사랑채 건물은 장대석기단 위로 사다리꼴의 초석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평주 위에는 장여가 도리를 받고 있는 굴도리집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안채는 납도리로 되어 있으나 사랑채는 굴도리로 되어 있다는 점과 안채, 사랑채 모두 각기둥을 사용했다는 점으로

조선시대의 남녀유별과 가옥 규제에 대한 법령을 충실히 따랐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진 우측에 보이는 담장 가운데 문은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출입하는 정추문이다

연경당은 건물배치와 공간구성 등에서 당시의 유교적 철학이 적용된 궁궐 내 사대부 집으로 당시의 주택과

비교해 볼 수 있는 한국주택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다. 또한 궁전의 조영법식과 기술력으로 건축되어 세련되면서

단아한 세부양식이 궁궐건축 고유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연경당은 조선시대 궁궐 내 사대부

건축으로서 그 가치가 뛰어나다

연경당 출입문,

우측의 솟을 대문인 장양문은 사랑채로 통하고, 이 문을 지나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좌측에는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경계 짓는 담장이 꺾여 있으며 담장 가운데에 문인 정추문이 있다.

그리고 좌측의 평대문은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이다.



연경(演慶)’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궁궐지에는 순조 28년에 총 120칸으로 건립하였다고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에는 순조 27년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연경당을 지나서 돈화문으로 나가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계단길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이렇게 돌계단으로 만들어 저 있다, 이런 길을 임금이 희정당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나녔을리는 없겠다, 그래서 살펴보니 후원의 두번째 공간인 애련지와 의두합이 있는 불로문 평지길로

이곳으로 다닐수도 있겠다, 말이나 가마가 충분히 다닐만한 공간이 있다,

가는길 왼쪽으로는 서향각과 주합루가 보인다, 

저 곳은 부용지와 부용정, 그리고 영화당이 있는 후원의 첫번째 공간이다,

언덕을 올라 왔어니 내려가야 한다, 궁궐이니 길은 편안 하지만 거리는 조금 된다,

가는길 우물도 있다,

내려온 언덕 길을 돌아다 보고

이 길은 의효전, 몽답정, 괘궁전, 신선원전으로 가는 길이다, 의효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초익공 팔작지붕

집으로 본래 덕수궁에 있든 건물로 황태자 시절 순종비였든 순명비의 혼전으로 쓰였든 곳이다, 의효는 순명비의 殿號(전호)다,

그 이전에 의효전은 1904년 경복궁 문정전을 옮겨온 것이므로 현재의 의효전은 경복궁 문경정, 덕수궁 의효전, 그리고 창덕궁 의효전으로

이전되는 단계를 거치며 오늘날 이 자리에 있게 되였다, 물론 이곳은 비공개 구역이니 더이상 갈수는 없다,

이어지는 길은 창덕궁 돈화문으로 가는길을 따라간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조선의 모든 궁궐에는 금천이 흘렀고 이를 건너기 위해 금천교가 세워져 있으며, 신하들은 이 금천교를 건넘으로써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을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고 깨끗한 마음으로 정치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창덕궁 향나무 천연기념물 194호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나이가 약 750살 정도로 추정되며,

2010년 태풍의 피해로 인해 손상은 되었지만, 뿌리부분 둘레 5.9m이다. 가지는 동서남북으로 1개씩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잘라졌고,

북쪽 가지는 죽었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한 기형으로 자랐다. 나무의 모양은 마치 용(龍)이 하늘을 오르는 모습처럼 생겼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위에서 비공개 구역으로 언급한

신선원전 제례공간과도 무괸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 문화재청 자료를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