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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세월이 머물러 있는 한양도성 백악구간(2018년 9월 9일) 본문

Trail(둘레길)/한양 도성길

600년 세월이 머물러 있는 한양도성 백악구간(2018년 9월 9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9. 11. 06:00


혜화문이다,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 5)에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웠다. 이 때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소문 가운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위치하였으므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했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가 이어졌다.

당시 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했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 14)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라고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에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그 뒤 한말까지 동북 방면의 성문으로 보존되어오다가

1928년에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헐렸다. 지금은 문이 있던 위치만이 알려져 있고 문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문의 모습은 아래쪽에 하나의 아치형의 출입구를 둔 돌로 쌓은 육축(陸築)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소규모 성문의 형태를 취하였다.

혜화문은 여진족 사신이 조선으로 입국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중국 사신들은 서쪽 무악재에 있는 영은문으로 드나들었고 여진족 즉 오랑캐들은 이곳 혜화문으로 드나들었다,

당시로서는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든 문이다, 사진은 혜화문 2층 누각의 내부 모습이다,

여진족 사신이 드나들든 시절 혜화문 주변에는 북평관이란 숙소도 있었다.

북평관 근처에는 궁궐에 우유를 공급하던 유우소(乳牛所)란 관청도 있었다. 그래서 궁궐에 타락(駝酪: 우유)을

공급하는 산이라고 해서 낙산을 타락산이라고도 불렀다. 사진은 혜화문 2층 누각 외부 전경이다,

혜화문에서 한양도성은 끊어진다, 골목길에 지어진 주택 담에 성곽 돌이 보인다,

더욱이 이곳에 있는 경신고등학교는 한양도성 성곽을 1900년 초 부터 현재까지 학교 담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도에 표시한 붉은선이 주택가와 경신고 등이 점유해서 한양도성이 없어진 구간이다,

이곳이 경신고등학교가 끝나는 지점이다 ,

골목길에 성곽돌↓이 보인다,(서울 왕돈까스 옆 전신주 뒤로 보이는 돌) 이렇게 한양도성은

일제에 의해 허물어지고 정부와 민간에 의해서도 무너저 내렸다,

경신고등학교를 지나 서울과학고등학교 뒤 성북동 산 62번지

성북쉼터에서 부터 한양도성은 완전한 형태로 복원 되였다, 이곳에서부터

한양도성은 백악산을 지나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이 길은 한양도성길이자, 와룡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와룡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으로 보이는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일대 하늘의 구름이 가을임을 알려준다, 

종로구 명륜동 1가 산 1-3 번지 일대

한양도성길은 계속해서 숙정문 방향으로 이어진다,

평지에서 산으로 올라가는길이니 당연히 경사도 는 있다,

그러나 길은 모두 계단을 만들고 잘 정비를 해놓아서 힘들지는 않다,

앞에 보이는 정자가 있는곳, 이곳이 와룡공원이다,

와룡공원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성균관대학교 후문으로 가고 오른쪽으로는 성북동이며

성곽을 따라 산으로 이어져 있는 성길은 백악산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이런 도성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간다,

이곳이 산이기는 해도 엄밀히 따지면 이 길은 한양도성 바깥이다,

그러나 이곳부터 도성내로는 길이 없다, 백악구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성 길을 따라 호젓하고 조용한 길을 걷는다,

마침 불어오는 살랑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준다,

그러다가 나타난 기파른 계단,

이제 이 계단을 올라가서 도성내로 들어가야한다,

가파른 계단 을 올라가 전망대에서 본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푸른 하늘과 뭉계구름이 참 예쁘다, 바로 앞에 보이는 큰 건물은 삼청각이다,

그리고 미아리 방향의 서울북부지역

멀리 수락산도 보이고 불암산도 보인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가을인가보다,

이제부터 백악구간 한양도성 길은 도성 내부를 따라 걸어야 한다,

말바위가 어디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바위 안내소로 왔다, 말바위 안내소에서는 간단하게 본인 인적사항을 기재한후

신분증과 함께 제출해서 출입증을 교부 받아야 한다,신분증이 없어면 출입증을 교부 받을수 없다,

말바위 안내소이니 말바위가 있는것은 맞겠다, 말바위란? 어떤 바위일까,

말바위 유래는 이렇게 안내되여 있다, 조선시대 말을 이용한 문무백관이 시를 읊고 녹음을 만끽하며

가장 많이 쉬던 자리라 말(馬)바위라 불리기도 했고 백악(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끝에 있는 바위라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있는 바위가 말바위다,

밀바위 안내소에는

군사보호구역 출입증교부 안내도 있다, 이곳 백악구간 전면 개방도 벌서 10년이 넘었다,

숙정문(肅靖門) 이다, 숙정문은 한양도성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했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하였다. 1395년(태조 4)에 숙청문(肅淸門)이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여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켰다,(Photo By / chun ho  Hyeon )

다만 한재(旱災: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崇禮門: 南大門)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서 나온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했다. 또한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俗說)도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이 문이 음방(陰方 :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창건당시 숙청문(肅淸門)이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로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523년(중종 18) 중종실록의 기사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여 있어 숙정문이라 했음을

알수 있고. 1531년(중종 26) 북정문(北靖門), 1587년(선조 20) 숙정문(肅靜門)으로 표기된 것을 볼 때, 정숙하고

고요한 기운을 일으킨다 는 의미에서 숙정문(肅靖門)으로 명명하지 않았나 정도로 추측한다.

숙정문 근처는 소나무가 워낙 많다, 숙정문을 통행금지 시켰을때부터

내려오는 소나무는 아니지만 그런 연유로 소나무가 많이 자라는 모양이다, 숙정문에서 460m 지점에

백악 촛대바위 쉼터도 있다, 이곳 촛대바위 쉼터에서는 경복궁도 조망된다, 

숙정문 북서쪽 약 460m 지점이다, 아곳 옆에 있는 둥근 바위에 일제 때 이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었고, 광복 후 이 바위의 쇠말뚝을 제거하고 우리 민족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우면서

이름을 촛대바위 라 정했다. 현재는 쇠말뚝을 제거한 부분이 콘크리트 로 마감되어 있다

촛대바위쉼터에서 보이는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

풍수지리를 중시 여겼든 13세기말 이곳은 경복궁의 진산인 셈이다,

촛대바위를 지나 한양도성 백악구간 곡성(曲城)으로 올라간다,

이제 부터는 계단길이기는 하지만 서서히 경사도가 높아 진다,

백악산 곡성(曲城)은 주 성곽 옆으로 돌출되여있다, 이제 곡성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계단길이다, 

곡성은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을 말한다, 한양도성의

곡성은 인왕산과 백악산에 하나씩 있다, 인왕산 곡성은 출입금지 구간이지만 백악산 곡성은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어 있다, 백악 곡성은 도성을 둘러싼 서울의 산세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꼽힌다.

백악 곡성에서 보이는 멀리 일산지역 일대 와

쪽두리봉, 향로봉, 비봉 일대의 북한산 과

그리고 비봉과 사모바위,

승가봉과 보현봉까지의 비봉능선이 그림처름 펼처저 보인다,

.높이 342m의 백악산(白岳山), 정상이 보인다,

한양도성은 백악산 정상으로 용트림을 하듯이 이어저 흘러 내린다,

백악구간 곡성을 내려간다,

그리고 잠시 도성 바깥으로 나가면,

서울 한양도성 역사와 축성시기에 따른 형태별 구분 법도 자세히 안내되여 있다,





위 안내에 따라 분석을 해보면 아래와같은 성곽 공법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한 성돌로 보아 1396년 태조때의 도성 축조 구간이다,

성 바같 구간에서 다시 성내로 들어가면 넓은공터가 있는데

이곳이 해발 293m의 청운대다,

청운대에서 보이는 경복궁, 촛대바위에서 보이든

전경보다 더 넓고 더 많은 곳이 보인다, 근정전을 비롯해 후원까지 선명하게 내려다 보인다,

청운대도 지나서 백악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백악산 바로 아래 있는 1, 21 사태 소나무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아있다고 했는데

급히 세여보니 11발이다, 나머지 4발은 어디에 있을까?

1, 21 사태 총탄 자국 소나무를 지나서 마지막 언덕을 올라서서 백악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길에서 보이는 서울 북부지역이다, 불암산과 수락산이 건너다 보인다, 사실 서울북부지역의

전경이 궁금한건 아니고 가을 하늘에 펼처진 구름이 더 아름답기 때문에 한참을 바라본다,,

백악산 정상이다,

북악산은 높이 342m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의 낙산(駱山, 125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남산에 대칭하여

북악이라 명명했다. 조선시대까지 백악산(白岳山), 면악산(面岳山), 공극산(拱極山), 북악산(北岳山) 등으로 불리였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주로 백악 또는 백악산으로 불렸으며 일부 북악이라고 불렸다.(Photo By /chun ho  Hyeon )

북악산은 북한산의 남쪽 지맥의 한 봉우리에 해당한다. 산경의 흐름을 보면 한북정맥(漢北正脈)의

끝자락인 북한산 보현봉에서 서남 방향으로 형제봉을 거쳐 북악터널 위의 보토현(補土峴)으로 이어진다. 이어

팔각정 휴게소 앞 능선을 따라 북악 뒤편에 구준봉으로 이어지고. 서울의 부주산(副主山)인 응봉(鷹峰)으로 이어져 경복궁의

배산인 북악에 다 다른다, 정상석에는 조선시데에 불럿든 백악산이라 표기되여 있다,(Photo By /chun ho  Hyeon )

백악산(북악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 가는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이 길은 돌로 만든 계단이 아니라 데크계단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야 별문제가 없지만

창의문에서 올라올때는 숨이 가빠지는 길이기도 하다, 성곽 바깥 철책에 밤나무 군락이 있다,

벌서 밤은 영글어서 입을벌리고 있는데 저 밤을 수확을 할 사람은 어무도 없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북소문인 창의문은 자하문이라 불리었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되여 있어 이 문이 숙정문 역할까지 했다. 사람들은 창의문을 늘상 북문이라 불렀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였다. 서울 내기들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문밖 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자하문은 4소문 중에서

그 원형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문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이후 선조 뒤를 이은 광해군 15년 1623년 5월 8일 광해군이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인조반정이다,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광해군의 먼 조카 이종(李倧)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했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했다.

이에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해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했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몫이다,

한양도성 백악구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일반인 출입이 자유스럽지도 못하지만

많은 구간이 사진 찰영 금지구간 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진보다는 설명으로 때워야 하는 곳이많다,

그동안 60여년을 금지구간으로 묶어 있다가 개방한지 11년이니 이만해도 충분하다,

 

지도 상세보기

https://www.tranggle.com/profile/track_view/@F952427428153617/CERT/ALL/2018/802786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