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김포 장릉에서 만나는 조선의 왕릉이야기(2019년 10월 27일) 본문
장릉내 둘레길을 따라 릉으로 들어왔다, 홍살문은 능역의 정자각으로
들어가는 향로(신도)와 어로(어도)가 시작되는 곳에 신성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문이다.
양쪽에 그둥을 세우고 위에 심방과 띠장을 가로질러 가는 살을 약 15~24cm 간격으로 박고 중앙에는 삼지창과 태극문
등을 새긴 형태와 구조로 만들어저 있다, 붉은 창살이라는 이름처럼 홍살문은 좌우 기둥과 인방, 살 등을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한다. 이 문을 들어서면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장릉 상설도 와 해설이 보인다,
장릉에 대한 설명
홍살문에서 릉 정자각으로 들어가는 길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들어 가는 향로 라는 안내가 보인다,
향로 옆에는 제향을 드리려 온 임금이 들어갔든 길인 어로가 있다,
일반인들도 이 길을 따라 들어가라는 안내가 있다, 임금님께서 다니든 길로 들어가라고 하니
오늘 이길를 따라 들어가는 모두가 전생에 임금이 아니였을까? 여기서부터 장릉은 다른 왕릉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조선 왕릉의 향로와 어도는 홍살문에서 부터 정자각까지 평지 직선으로 구성되여 있는데
장릉은 경사가 져있다,
장릉은 문화재청 조선왕릉에 실린 내용을 보면 1619년(광해군 11)에
선조의 왕자 정원군(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 이듬해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했는데.
1623년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원대원군으로 추봉되고, 1626년(인조 4)에 계운궁 연주부부인(인헌왕후)이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에 육경원을 조성했는데. 이때 정원대원군의 원의 이름을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
그리고 1627년에 흥경원을 육경원으로 천장하면서 원의 이름을 흥경원이라 했다가,
1632년(인조 10)에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했다. 이때 릉을 왕릉제도에 맞게 새로 조성하게 된다.
정자각 옆 수라간이 있다, 수라간은 정자각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준비는 홍살문 밖에 있는 재실에서 이루어진다.
정자각이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릉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丁 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다.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 깐 삼도(三途)가 있고 삼도 맨 앞 입구에는 홍살문이 놓인다.
정자각은 산릉 의례를 위한 건물로, 정전(正殿)과, 배위청(拜位廳)이 결합한
丁자형 평면을 이루어 정자각(丁字閣)이라 부른다.
월대와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을 쌓아 구성했고 계단은 월대의 양 측면에 설치되어 있다.
동쪽 계단은 두 곳으로 나뉘며, 두 계단 중에 하나는 향로계(香路階, 운계)로 측면에 구름문양을 새긴
장식이 있는데, (향로 = 신도)라고 부르는 향을 모시고 가는 길과 이어진다. 임금조차도 이 계단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그 옆
간소하게 꾸며진 어로계(御路階, 동계 = 어도)를 이용한다. 서쪽 계단은 신도가 없다, 제사가 있을 때 수라간에서
준비한 음식물을 나르는데 이용되거나 제사가 끝난 후 축문을 태우기 위해 축문을 들고 갈 때 사용한다,
정자각내 제실
배위청에서 바라보이는 장릉은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김포장릉은 다른 곳의 왕릉과 다른 점이 있다, 릉은 제례시 엎드려 재배를해야 릉이 보이는데
김포 장릉은 서 있어도 릉이보인다, 이는 인조가 릉을 조성하면서 백성들의 고생을 덜어주려는 의도로
자연형태를 그대로 살려서 조성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에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들어오는 향로와 어로 그리고 릉까지의 구성이 경사가 진 이유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과, 판위, 향로(신도)와 어로(어도),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 안에는 한 기의 표석이 있는데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영조 29년(1753)에 세운 세운 표석이다,
비석에는 조선국 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
朝鮮國, 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부左, 라고 새겨저 있다,
비각 옆에는 육경원(毓慶園, 인헌왕후의 추존 전 원의 이름)에
있을 때 사용한 비석 받침 돌이 장릉 근처에서 노출되어 발굴된 후 이곳에 전시했다.
육경원 비석 받침돌 안내도 인조의 어머니인 연주부부인 구씨가 1626년 인조4년에 승하하자
이곳 김포에 예장하고 무덤의 이름을 육경원이라 했다, 다음해 인조 5년 아버지 정원대원군의 무덤인 홍경원을 양주 곡촌리
(남양주시 금곡동)에서 김포육경원으로 옮겨와 두 원을 합하여 홍경원이라 했는데 그후 인조 10년 1632년
원종과 인현왕후로 추존하면서 홍경원을 장릉으로 격상시켰다라고 안내되여 있다,
홍경원을 장릉으로 격상 시키면서 종전의 석물들 중 사용하지 않게된
일부를 능 왼쪽 언덕에 묻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육경원 비석 받침돌이 지상으로
노출되여 비각 옆으로 옮겨서 보관(전시)하고 있다,
장릉 정자각뒤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 오른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능침구역은 올라가 볼수없는 신성한 구역이니
문화재청 조선왕릉 페이지에서 이미지 사진을 퍼 와서 구성을 해본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만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 되기 전 흥경원을 조성할 때의 호석이먀. 아래 사진 왼쪽 첫번째 사각석물은 혼유석(魂遊石)으로,
석상(石狀)이라고도 부르며 왕과 왕비의 혼이 노니는 곳이다, 장릉에는 혼유석이 2개가 있다,
위에서 보이는 혼유석과, 칼을 세워 짚은 무석인과 문석인,
아래 사진의 석양과 석호, 하단사진의 장명등과 망주석 등은 원종이 왕으로 추존된 이후에 새로 설치한 석물이다.
여기서 망주석(望柱石)이란 멀리서 보아도 능역임을 알리기 위해 능침 좌우에 세우는 돌기둥이다,
정자각 지붕 용마루 끝에 4개씩의 잡상도 보인다,
잡상(雜像)은 궁궐이나 정자각지붕 추녀마루 끝 위에 설치된 토우(土偶)로 장식기와다,
벽사(길상과 화마를 제압한다는 뜻)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잡상들은 각각의 모양이 다르고, 설치되는 개수도
건물규모에 따라 3,5,7,9,10, 홀수다, 토우는 흙으로 사람, 동물, 또는 명상을 만드는 것을 뜻하는데
고대에는 주술의 의미로 많이 제작 되였다, 지금으로 치면 흙으로 빚어서 가마에 구운
테라코타 인형 또는 형상이라 보면 된다,
잡상은 1,대당사부 2,손행자, 3,저팔계 4,사화상 5,이귀박 6,이구릉 7,마화상
8, 삼살버살 9, 천산갑 10.용두, 등으로10여종이 있는데, 잡상은 아무나 지붕에 올려 놓을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귀하신 토우들이기에 궁궐과 궁궐에 관련되여 있는 건물에만 올릴수 있다,
능에도 왕과 왕비가 주무시는 곳이니 정자각에도 올라간다
문화재청 조선왕릉에서는
찾을수 없는 장릉의 야사는 장릉에 심어진 뽕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정자각을 보고 있는 방향 왼쪽, 수령 400년이 넘었다는 뽕나무가 있다,
이 뽕 나무는 추종된 원종의 아들인 인조가 부모의 릉을 참배하려 왔다가 기념으로 심은 나무다,
그러나 뽕나무는 암, 수, 로 나누어지는데
인조가 심었다는 이 나무는 수, 나무로 열매가 맺히지 않는 나무였다,
그래서 능 관리지기 들이 후일
정자각 지나 맞은편에 열매가 맺히는 암, 나무를 심였다,
암수가 마주보고 있어니 당연히 열매는 맺힐터,
매년 오디가 지천으로 열린다, 열매가 익어가는 시기에 장릉으로 오는
참배객들은 오디 맛을 볼수 있다,
능을 나가서 돌아가는길 연지를 지나간다,
연지는 연꽃을 심어서 자라는 연못이다,
천원지방설에 의한 방지원 도형, 으로 조성했다고 하는 연못이니
그시절 선조들의 지혜를 지금 우리는 헤아릴길이 없다,
재실 앞으로 들어가는길 병꽃나무가 보인다,
5월 초가 되면 병꽃나무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산 아래에서부터 거의 꼭대기까지
햇빛이 잘 드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흔히 만날 수 있는 나무다,
꽃 모양은 길쭉한 깔때기 모양으로 손가락 길이 정도로 아래로 매달려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백자 병이나 청자 병처럼 생겼다고 하여 병꽃나무란 이름이 붙여졌다.
특히 꽃이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는 영락없는 병모양이다. 꽃은 전체적으로 보드라운 털로 덮여 있다. 그래서 물명고에 실린
옛 이름은 비단을 두른 것처럼 아름다운 꽃이란 뜻의 금대화(錦帶花)이며 중국 이름도 같다. 일제 초기 학명을 붙이고
식물 이름을 정비하면서 병꽃나무란 새로운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재실도 지나간다,
재실 앞에도 수백년은 된 것 같은 나무도 보인다,
519년 동안 조선 왕조를 이끌었던 왕족의 무덤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수 있다.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곳이 왕릉이며.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묻혀 있는 곳은 원 이라 부르는데, 13기가 있다,
그리고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이 묻힌 장소는 묘 라고 하는데, 64기로 조선왕릉은 모두 119기다,
왕이라고 해서 모두 왕릉에 묻힌 것은 아니다.
종묘에 신주를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는 왕릉에 들어가지 않는다.
제10대 왕 연산군과 제15대 왕 광해군은 종묘에 신주가
없기때문에 왕릉이 아닌 묘에 잠들어 있다.
조선 왕릉은 대부분 도읍지였던 한양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왕릉은 도읍지의 4대 문, 10리 밖 8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인데
궁궐에서 출발한 임금의 참배 행렬이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80리는 오늘 날의 100리로, 당시 10리는 4km가 아니고 5.2km였다,
조선 왕릉은 궁궐을 중심으로 한양 외곽의 동남쪽과
서북쪽에 주로 모여있는데 예외도 있어서 영월의 장릉 과 여주의 영릉,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은 80리 밖에 있는 릉이다,
아래 사진 2장은 개성에 있는 후릉과 제릉, 전경이다,
(1) 조선의 2대왕 정종은 태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412년 정안왕후가 죽고 난 뒤 1420년 사망해 그곳에 묻혔다. 정종과 정비인 정안왕후의 무덤임인 후릉전경이다,
지금 후릉은 정자각은 사라졋지만 혼유석, 장명등, 석수 등이 거의 원형 형태로 보존되여 있다,
황해남도 개풍군 백마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2) 고려공양왕 3년인 1391년에 이성계의 정실부인인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해풍군(海豐郡) 치속촌(治粟村)에 일반묘로 조성되였어나, 이후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면서
절비(節妃)로 추존되고 능의 이름을 제릉(齊陵)이라 하고 개풍군 풍덕 북율촌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1398년(태조 7)
정종이 즉위하자 11월에 절비 한씨를 신의왕후라 추존하고, 1408년(태종8)에 승인순성신의왕태후
(承仁順聖神懿王太后)라고 시호를 높였다, - photo by 평화경제연구소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 韓(한)씨는 1351년에 이성계와 혼인하여 1391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1398년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신의고왕후로 추존되면서,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의 첫 왕후가 된다,
소생으로는 정종과 태종을 비롯하여, 방우(芳雨), 방의(芳毅), 방간(芳幹), 방연(芳衍) 등의 6남과
경신(慶愼), 경선(慶善) 등 두 공주가 있어니 6남 2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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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고려 왕릉은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찾아본 고려왕릉 위치다, 이북 개풍군에 소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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