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북한산성입구~대남문~구기동(2021년 6월 6일) 본문
2021년 6월 6일, 6월 첫주일이자 현충일이다,
현충원 참배는 5월에 이미 다녀 왔어니 오늘은 북한산 나들이다,
산성계곡 무장애 탐방길로 들어간다,
무장애탐방길은 여기까지? 데크계단을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는길,
북한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잘 만들어 놓기도 했지만
계곡을 흐르는 물은 여전히 맑고 깨끗하다,
사진에 보이는
이곳은 북한산성내 수문터다,
아미타사로 들어가는 입구
북한천을 건너가는 원효교가 있다
원효교 앞으로
북한동역사관 마당으로 올라왔다,
이어서 북한산성입구 갈림길에서 오른쪽 대남문방향으로 올라간다,
사람들이 줄지여가고 있는 왼쪽 방향은 보리사를 지나 백운대로 가는 길이다,
북한천을 따라 올라가는길,
이름은 북한천이지만 오래동안 북한산계곡이라 불리든 천 을따라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있는 국녕사로 올라가는
갈림길을 지나 계속해서 북한산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중성문이 있다,
중성문은 북한산성 12문에 속하지 않는 북한산성 내성 출입문이다,
북한산 노적봉과 증취봉사이 협곡에 쌓은 중성에 설치된 성문으로 북한산성
대서문에서 이곳에 이르는 지형은 비교적 평탄해서 적의 공격에 취약한 구역으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적의 공격을 이중으로 방어할수 있는 차단성인 중성을 쌓았다,
중성 안쪽은 북한산성 내성에 해당되는데, 이 내성에는
행궁, 중흥사, 성창등의 중요 시설이 집중되여 있었다, 중성문의 수비를 담당했든
군 부대는 대서문과 대남문의 수비를 맡았든 어영청 유영이였다, 현재의 중성문은 석축기단인
육축부, 그 위에 올려진 문루, 무지개 모양의 출입구인 홍예문을 갗춘 전형적인 대문의
모습으로 규모는 대서문보다 조금 작은편이지만 문루는 1998년에 복원했다,
1711년 숙종 37년에 마무리한 북한산성 성곽공사는 이듬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숙종 임금이 북한산성으로 행차했다, 이 행차에서 숙종은 북한산성
북서쪽지역이 평탄해 적에게 쉽게 함락될 소지가 있어니 다른 성을 쌓아 더 방비를 튼튼히 하자는
내용의 중성 축성안을 결정했다, 이에따라 1714년 북한산성 내성에 해당하는 중성을
축조했고 이 중성의 계곡부에 설치한 시설물들은 중성문과 수문이다,
중성문 옆 계곡에는 수문(중성문)이 있었는데 북한산성 2곳의
수문중 한곳이다, 수문은 성벽 하단에 문을내여 성 안의 물을 밖으로 흘러내보내는
배수 시설로, 적의 침투에 대비한 철책 시설도 갖추어 놓았다,
이 수문터에는 지금도 축성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수문성벽을 쌓을 지반을 확보하기위해 큰 바위를 계단처름 층층히깍아
놓은게 지금도 보이지만 1745년 영조21에 편찬한 북한지에는 수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면 중성 수문은 30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1907년에 찍은 중성문 사진이다,
중성문 옆을 흐르는 계곡에는 수문이 설치돼 있었어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수문이 있었든 자리다,
중성문옆 암반에는 폭2,1m 높이 1,8m의 작은 암문이 숨겨져 있다,
이 암문은 원래 이름이 없었어나 성안에서 생긴 시신이 중성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이 문을 통해 나간다고 해서 시구문이라 불렸다,
중성문 옆 시구문을 나가면
중성문으로 올라오든 길 중성문 앞으로 연결된다,
중성문을 지나 노적사로 들어가는 입구다,
노적사는 북한산 노적봉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중성문 근처까지는 거의 포장도로 와 같은 길이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대남문으로 가는 코스는 긴 편이지만
경사가 완만하고 난 코스가 없기때문에 거리에 비해 힘들지는 않는다,
사찰과 유적지, 문화재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혼자서라도 넉넉하게 오른 수 있는 산으로
역사를 따라가는 흔지 않는 산이기도 하다,
대남문으로 가는 길은 좌우로 나 있는 길을 무시하고
직진으로만 가면된다, 만일 다른 곳으로 가보고 싶다면 오른쪽으로 가면
의상능선이고 왼쪽으로 가면 북한산성 주 능선이다,
북한산성 내 비석거리다,
비석거리를 지나면 있는 산영루가 있다, 산영루는 북한산성 내에
위치한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 총융청에서 관리를 담당했던
중요한 건물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2015년 고양시의 역사문화복원사업을 통해 복원되였다.
산영루를 지나면 중흥사(重興寺)다, 중흥사는 북한산성 내
승영사찰로, 승병 350여 명을 관리하고 지휘하던 승군 사령부가 있던 사찰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 1103년(숙종 8)에 주조된 금고(金鼓)와
1344년(충혜왕 복원 5)에 만들어진 향로(보물 제321호)에 삼각산 중흥사 라는
명문이 있어, 12세기 초 이전 사찰이라 유추하는 사찰이다,
또한 북한산성의 축성 경위와 시설물을 기록한 北漢誌(1745)에
따르면 중흥사는 30여칸 규모의 사찰에 불과했지만 1711년(숙종 37)북한산성
축성시기에 대규모로 증축해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5년 대 홍수로
인해 무너진 후 폐허가 되였다가 2012년 대웅전과 요사채를 복원했다
북한산성 승군 사령부였든
중흥사도 지나서 북한산 계곡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간다,
대남문으로 올라가는 길과, 청수동암문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있다,
여기서 잠시 청수동암문 방향으로 들어간다,
청수동암문 이정표를 따라 한적한 곳으로 이동해
잠시 간식을 하고 쉬여간다, 산행중에는 잠시 간식을 하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길은 대남문으로 가는 길이다,
날씨가 조금 덥기는 하지만 우거진 숲이 그늘을 주어 땀도나지 않는 북한산길
북한산 계곡을 따라 대남문으로 가는 길은
북한산길 중에서는 널널한 편이다,
대남문으로 올라가다 보니 보국사지가 있다, 보국사는 북한산성내
승영사찰 가운데 하나로 산성 축성당시 승병이 머물든 11곳의 사찰과 암자 2곳을
새로 짓거나 고쳐지었는데 승영사찰은 법당과 같은 신앙공간도 있었지만
무기고와 군량창고 같은 군사시설을 더 중요시 했다,
승병은 산성이 완성된 후에는 삼군문(훈련도감) 여영청(금위영)의
군사 시설을 보조하여 산성수비를 맡았다, 보국사는 금위영 아래에 있었는데
승영 사찰가운데 최대의 사찰로 금위영 통제를 받아 보국문 일대의 수비와 관리를
담당했든 사찰이지만 사찰은 없어지고 터만 남이있다,
중흥문을 들어선 이후
대남문까지는 온통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지다,
북한산성 금위영이건기비 도 있다,
삼군문(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유영 중에서 금위영유영만이
높은 곳에 위치하여 비 바람에 무너질 위험이 있어 대동문 근처에서 1715년
이곳으로 옮겼다, 이를 알리기 위해 세운비가 금위영이건비 다,
화강암 비석에 乙未卽 大明崇楨 甲申後 七十二年也 都提調李餌命 識라는
명문으로 보아 숙종 41년에 도 제조 이이명이 세운비다,
비문 내용으로 본 금위영은 능암 동남쪽에서 보현봉 아래까지
2,821보(步)를 쌓았으며, 1,065개의 살밭이와 2개의 성문(대성문, 소동문)이 있었고,
성문 위에 누각을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장대(將臺), 방실(房室),성곽등을 축조하였다,
라는 내용으로 현재 뒷면은 땅에 묻혀 있고, 비문도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다.
금위영이건기비를 지나면 이번에는 보광사지가 있다,
보광사지도 승영사찰이다, 북한지에 따르면 대성문 아래에 있으며
71칸으로 승려 설휘가 창건했다고 한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지은 기유북한에서 보광사 언급이 있는데
승려들은 모두 군사와 무기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며 벽실에는 창, 칼, 활, 화살,등을
저장하고 있엇다는 기록이 보인다, 승영사찰은 갑오개혁때 승병이 강제 해산되여 쇠락해
졋어며 한국전쟁당시 대부분 파괴되여 지금은 석축만 남아있다,
보광사지도 지나서 잠시 더 올라가면서 보면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푸르른 숲이 눈이 부실 정도다,
대남문으로 거의 올라가니 어영청유영지가 있다, 조선 숙종37년인
1711년 북한산성이 축조된 뒤에 성곽수비와 관리를 맡았든 중앙 군영인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삼군문의 주관 아래 각 군문이 전체 성벽을 3분하여 축조하고, 축성후에도
해당구간을 그대로 맡아서 수비를 했는데, 어영청의 북한산성 축성과
수비구간은 보현봉에서 수문까지였다,
어영청유영지 내에는 중심 건물인 대청을 비롯하여 안채 건물인 내아,
군량창고, 무기고 등의 건물이 있었다, 건물은 모두 101칸이 였는데 그 중에서 창고가
48칸으로 가장 큰 건물이였다, 현재 어영청유영지 에는 대성암 이라는 암자가 들어서 있고
암자 주변에는 석축과 초석이 남아있다, 대성암은 유적지에 슬그머니 무임승차를
했지만 그 또한 오랜 세월이니 강제로 퇴거 할수도 없는 곳이 되였다,
어영청유영지를 지나서 대남문으로 올라간다,
어영청유영지에서 대남문까지는 지근 거리다,
이렇게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가면
북한산성 대남문이다, 대남문은 원래 산성 4대문이 아닌 대문이다,
산성 축성 당시에는 소남문으로 암문이였다, 북한산성의 정문은 대성문이다,
지형상으로 우마가 다닐수 없는 높은 산악지대에 있는 문이라서 숙종은 대서문으로 행차
했지만 영조는 내시에게 업혀서 대성문으로 성내로 들어왔다, 북한산성
행궁을 돌아 본 영조는 나갈 때 당시 소남문으로 나갔다.
임금이 지나간 문을 암문으로 둘 수 없어 1760년(영조36)에
소남문에 문루를 올렸고 1765년(영조41)에 소남문을 대남문으로 이름을 바궛다,
그래서 북한산성 4대문이 5대문이 되는 계기가 된다,
대남문을 나가는길
우람한 보현봉이 눈에 들어온다,
대남문에서 문수사로 들어가는길 뒤로 돌아보면 대남문이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보현봉 줄기에 있는 잠룡봉이다,
문수사로 들어왔다,
첫번째로 보이는 전각은 응진전이다,
응진전 내부
그리고 문수사의 태동인 문수굴 법당이다,
문수동굴 법당내부
문수사 대웅전 과
대웅전 법당내부 다,
문수사에서 마주 보이는 보현봉이다,
보현봉은 북한산 내에서는 가장 기가 쎈 봉이라 알려져있다,
그래서 한때는 무속신앙의 터전이기도 했든 곳이기도 했지만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하기 전 수하들과 천문지리를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보현봉에 올라
단종 페위 반정을 논의하기도 했다는 전설의 봉이기도 하다,
오늘 궂이 보현봉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보현봉은 오랫동안 비탐
구역이다, 연유야 어쨋건 비탐구간으로 지정 되였어면 보현봉으로 오르면 안된다,
그러나 오늘 문수사에서 건너다 본 보현봉은 족히 20여명의 산꾼들이 올라가 있었다, 공단에서는
일손이 부족해 단속도 못한다고 하는데 단속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스스로 규정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다만 공공의 목적으로 보현봉 탐방 허가를 받은 사람들이기를
기대해 본다,
문수사에서 내려가면
대남문에서 내려 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가 있다,
구기계곡을 따라 올라올때 이 고개로 올라서면 깔닥고개라 부르는 고개다,
올라올때는 깔닥고개 지만 내려갈때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깔닥고개에서 보이는 문수봉 앞 뚜꺼비 바위다,
사실 문수봉은 가운데 봉이고 오른쪽에 사람들이 보이는 봉은 문수봉
표지목은 있어도 문수봉은 아니다, 문수봉이 암릉으로 위험해 작은 문수봉에
문수봉 표지목을 세워 문수봉 행세를 시킨 것 뿐이다,
이제는 구기동까지 내려가는 길이다, 문수사에서 구기분소 까지는
약 2,3km정도 된다, 내림길이니 2km 남짖이면 1시간 정도 걸린다, 그러나 구기동
내림길은 보통 걸음으로 약 2시간 정도는 걸리는 지루한 산길이다,
지루한 하산길 북한산성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려한다,
북한산성은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 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 우물터 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구기계곡을 따라 지루하게 내려 간다,
그러다가 마지막 데크길을 내려가면
구기동이다,
북한산 국립공원 구기분소가
구기동 마을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산울림은
두부 요리를 주로하는 집인데 오랜 세월 다니는 집이다,
자주 가지는 않지만 구기동으로 하산을 하면 그저 고향마실 찾아가듯
가는 집으로, 이 집에서는 음식맛은 개의치 않는다, 두부찌게 한 냄비지만
뒷풀이로 소주 몇잔하기에는 좋은 안주거리다,
오늘은 북한산성 행궁지를 다녀왔다,
한꺼번에 모두 올리기는 자료가 많아서 행궁지 일기는
목요일 정도에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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