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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역사를 따라가는 돈의문터에서 보신각까지(2021년 12월 19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서울·북한·도봉

역사를 따라가는 돈의문터에서 보신각까지(2021년 12월 19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2. 1. 4. 00:19

서울지역에 첫눈(2021년 12월 18일)이 내린

다음날인 12월 19일 기록이지만 2022년 1월 4일에야 공개 합니다,

새해 福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걷는 길은 조선의 역사가 살아 있는 길,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종각역 까지다,

서울시 교육청과 경희궁 자이 3단지 아파트 사이길은 송월길이다,

松月길(Songwol-gil)은 서울종로구 9-2에서 행촌동 1-69까지를 잇는 도로로.

도로명은 법정동인 송월동에서 유래했다.

송월길 경희궁 아파트 끝에는

강북 삼성병원이 있다,

강북 삼성병원 안에는 1938년에 지어진 경교장이 있는데

경교장은 이화장(梨花莊) 삼청장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 3대 명소로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든 곳이다,

강북삼성병원과 경향신문 앞 정동사거리는 돈의문터다,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의 대문인 서대문(西大門)이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도로를 내면서 철거되었다. 철거가 결정되자 총독부는

돈의문 육축의 석재(石材)를 도로 공사에 사용하기로 하고 문루의

목재와 기와는 경매에 부쳤다.

1915년 3월 6일 오전 10시 열린 경매에서 돈의문의 목재는

경성에 사는 廉德基(염덕기)에게 205원 50전(현재 약596만원)에 낙찰되어

팔려나갔다. 이렇게 사라진 돈의문 흔적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돈의문 현판만이 유일하다.

돈의문터에서 광화문으로 가는길 흥화문이 보인다,

흥화문은 경희궁 정문이다,

이 지역은 경희궁 일대로

경희궁 공원과 서울역사 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시되여 있는 전차 381호다,

1930년부터 1868년 11월 까지 38년간 서울시내를 운행하든 전차다,

서울에서 전차운행이 처음 시작된 날은 대한제국 광무 3년인 1899년 5월 17일이

였어며 운행구간은 청량리에서 서대문까지 였다,

이 전차는 1968년 11월 전차 운행을 전면 중단 했을때

서울에 마지막으로 남은 2대의 전차 가운데 1대로 2007년 12월에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겨온 후 1년간의 보존처리 과정을 거처

서울역사박물관 도로변에 전시하고 있다,

서울역사 박물관에서 광화문으로 가는길 건너편

S타워, 오피스아빌딩, 광화문 빌딩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서울역사박물관과 인접한 생명의 말씀사 건물 앞에

흥화문터 표지석이 있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조금 전 지나오면서

보았든 흥화문은 원래 이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보이는 건물이 있는 곳에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이 있든 자리다, 현재의 흥화문은 이곳에서 서대문방향으로

약 250m정도 떨어진 곳에 만들어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멋스러운 건물도 보이는데 이 건물은 새문안교회다,

새문안교회는 한국 최초로 설립된 장로교회로 1887년 9월 27일 선교사 H.G.언드우드가

설립한 교회로. 광화문 서편의 돈의문 즉 새문 안에 있어 새문안이라 불리게 되였다.

새문안 교회와

세종대로 사거리 사이 빌딩들은

마치 타국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다, 

서울 제일의 중심 지역이라서 그런 것일까?

세종대로 사거리 한 모퉁이에 고풍스러운 건물과 함께 산듯한

현대식 건물도 보이는데 저 빌딩은 동아일보사며 그 뒤로는 광화문 우체국이다,

지금의 광화문우체국 자리는 조선시대 우 포도청 터다,

그리고 동아일보사 맞은 편에는 동화면세점이 있는

광화문 빌딩이 있고 남대문방향으로 보이는 빌딩은 조선일보사다,

또 한 모퉁에는 교보빌딩이 있다, 교보빌딩에는 교보문구와

주한호주대사관, 싱가포르관광청, 호주뉴질랜드은행 등이 있는 빌딩이다, 

광화문 사거리 동북쪽모퉁이(교보빌딩 옆)에 비각이 있다,

이 비각의 원래 이름은 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로 상당히 긴 이름을 지닌 비석이다,

일반적으로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라 부른다.

조선의 끝에서 두 번째 임금인 고종이 즉위 40주년이 된 것과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 51세가 된 것, 그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1902년에 세운 것이다.

비각 전면 현판은 紀念碑殿(기념비전)이라고 쓰여있다.

紀念碑殿이란, 비각(碑閣)이라는 말보다 높은 단계로

건축사적 의미도 있는데 조선왕실에서 관장한 마지막 전통 양식 건축물이다,

고종은 44년(1863~1907년)간 임금 노릇을 했다, 조선 역대 3위다,(영조 52년, 숙종 46년)

44년 동안이나 통치를 했어나 결과는 국가의 운명이 몰락으로 이어졋다,

그리고 이 비각에는 도로 기점이 있다, 원래 조선시대 도로 기점은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돈화문 앞이였다. 당시는 이곳이 나라의 중심이었기 때문이였다.

1914년 4월 세종로 네거리(충무공 이순신 동상 자리)로 기점을 바꾸어 가로 90cm, 세로 30cm

높이 70cm의 원표를 설치했다. 이후 세종로 도로를 확장함에 따라 1935년에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 앞에 있는 고종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 옆으로 옮겼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도로원표에는 앞쪽에 道路元標라 음각되여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는 大邱 三二0米千, 大田 一八三米千, 釜山 四七七米千, 木浦 四三二 米千,

이라는 글자가 세로 쓰기로 음각 되어있다. 광화문 네거리를 중심으로 전국 주요 18개 도시와 거리를

일본식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粁(천)은 km를 뜻하는 일본식 조어로, 1米(미 m)가

1,000개 모여서 1粁(km)이 되는 단위다,

칭경기념비각을 지나서 종각방향으로 올라간다,

오른쪽에 보이는 도로는 종로다,

이 일대는 서울을 대표하는 지역이라 그런지

보도에도 돌을 깔아놓았는데 눈이 온 다음날이라 길이 많이 미끄럽다,

한겨울에 얼기라도 하면 어떻게 다녀야 할까?

이곳은 중학천이다, 중학천은 경복궁 북쪽에 솟은 북악산의

남서쪽에서 흘러내려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앞을 지나 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와

미국대사관 뒤쪽을 거쳐 청계천에 합류하는 길이 2.4km의 하천이다.

조선시대 청계천의 지천(支川)중 가장 규모가 큰 하천이 였지만

1957년 도시 정비를 목적으로 복개를 해서 중학천 물길은 볼 수 없었는데

종로구청에서 청계광장에 이르는 옛 물길 340m를 복원하고 청계천

유지 용수를 24시간 공급해 물이 흐르도록 복원한 하천이다,

중학천을 지나 올라가니 조선시대 종로를 만난다는 안내가 보인다,

우리가 서있는 종로, 이곳은 조선건국이래 도성의 중심지로 현재까지 발전해왔다,

조선시대 종로는 중앙관청과 관련된 관리들이나 시전행랑의 상인 등 중인의 거주지가 있었다,

당시 시전은 국가가 설치한 상설시장으로 주민들의 일상 생활용품과

정부에서 쓰는 물건을 공급 하였다,

조선시대 상업의 중심지역인 종로는, 서울 600년의 모습이

지하 4~6m 깊이에 문화 층 별로 켜켜이 쌓인채 보존되여 있는 조선의 폼페이다,

종로구 청진동 149번지 일대의 서울 종로 청진 8지구 도시환경 정비사업을 위한

2011년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시전 행랑을 비롯해

조선 전 시기에 걸친 건물지, 도로 등, 유구(옛 건축물의 흔적)가 확인되였고

그 중 피맛길에 자리했든 우물도 복원했다, 우리가 발디디고 서있는 서울, 이 땅 아래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조선시대 600년 역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라고 안내되여 있다,

종로1가 교차로 로 올라왔다, 종로1가 교차로는

종각과 제일은행 본점빌딩, 종로타워와 영풍타워가 사방에 있는 곳으로

여기서 북쪽 안국동 방향으로는 조계사가 있는 곳이다, 

종각역 1번 출구 제일은행 본점앞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이정표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금부에서 풀려난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위해 경남 합천으로 향했던 백의종군 길의 출발지를 안내하는 이정표다,

이정표가 세워진 종각역 1번 출구 인근은 조선시대

의금부가 있던 곳으로 충무공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받고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기 위해 경남 합천으로 출발했다.

종로1가 교차로 지하는 종각역이다, 보신각으로 건너간다,

조선시대 한양에 처음 종을 건 것은 1398년(태조 7년) 광주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 서쪽 종루에 걸었다, 1413년(태종 13년)에 종루를 통운교(지금의 종로네거리)로

옮기고 1458년(세조 4년)에는 새로운 종을 주조하여 달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되었다.

그 후 1619년(광해군 11년)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때 세운 종각은 임진왜란 전의 2층 종루가 아니고 1층 종각이었으며

여기에 건 종은 명례동(지금의 명동인근) 고개에 있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보신각 종은 본래 원각사에 있던 종으로 세조때 주조한 것인데

1536년(중종 31년)에 숭례문 안으로 옮겨 놓았다가 1597년(선조 30년)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전한 것이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나 화재와 중건이 있다가 1895년(고종 32년)에 종각에 보신각 이란

편액이 걸린 이후 종도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세대 도성의 문을 열고 닫는 시간과 화재와 같은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때 종을처서 알렸든 종각터다, 도성 문을 열때 치는

종을 파루, 문을 닫을때 치는 종을 인정이라 했는데 파루는 불교의 33천에 따라 33번,

인정은 별자리의 28수에 따라 28번을 첫다고 설명되여 있다, 

이 건물은 종고류, 종각, 인경전으로 불리였는데,

1895년 고종이 보신각으로 명명했다, 1979년에 재건하면서 세종때의

규모에 맞춰 새 건물을 지었어며, 현재 걸려있는 종은 1985년에 제작한 보신각

새종이고 옜 보신각 동 종은 국립중앙 박물관에 보관되여 있다,

1866년에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1871년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가 일어나 미군이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싸운 뒤 4월 25일 퇴각을하자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 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반포해 쇄국의지를 강하게 천명했다,

이에 따라 서울 종로 네거리, 경기도 강화, 경상도 동래군, 함양군, 경주,

부산진 등을 포함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서울에 세웠든 척화비는 1882년 8월

종로 보신각 부근에 묻혔다가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길 때 발굴되어 경복궁에 보관되여 있다,

보신각 앞 척화비가 있었든 ▲ 곳 이라는 비석이 보인다,

보신각 뒤 종로구 관철동 사무실에서

서울 첫 눈 구경 뒷풀이 겸 2021년 송별연을 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