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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삼남길 제1길 한양관문길 上(남태령 표석~온온사)2022년 9월 25일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삼남길

삼남길 제1길 한양관문길 上(남태령 표석~온온사)2022년 9월 25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2. 10. 21. 00:01

서울과 경기도 경계 남태령, 여기서부터 경기옛길 삼남길 1코스가 시작된다, 경기옛길 삼남길 1코스는 이곳 남태령부터 인덕원 옛터 까지로 9,7km 다

삼남길의 시작은 한양에서 부터 전라도 땅끝까지 이므로 그 출발이 서울 남대문이여야 하지만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을 따라 서울 경계까지 와서 이어지는 경기도 구간(경기옛길)이라고 보면 된다,

서울과 경기도 경계인 남태령을 지나서

내려가는 방향 왼쪽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있는데 이길이 남태령 옛길이다,

남태령 옛길은 한양에서 삼남(충청, 전라, 경상도)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곳을 지나 수원, 안성을 거처 남쪽으로 갔어며 반대로 과천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사당동, 동작동, 흑석동을 거처 노들나루(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들어갔다,

원래 이 고개는 여우고개로 불리였는데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원으로 행차할때 이 고개에서 쉬면서 고개 이름을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임금에게 속된 이름을 아뢸 수 없어 남태령(남행할때 첫 번째로 나오는 큰 고개)이라 아뢴 이 후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였다,

이곳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2번째 스템프함이 있다,

첫번째는 서울 출발지인 종각역 의금부 터 에 있었어며 한양 경계인 이곳 남태령에 있는 2번째 스템프다,

여기서 부터는 따로 충무공 백의종군길은 없다,

옛길이 삼남길이 였어니 삼남길을 따라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도 함께다, 

경기옛길 삼남길 출발스템프도 이곳에 있다,

삼남길 제1길 남태령 이라는 도장이 찍힌다, 이제 이 스템프는 삼남길이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의 스템프라 보면 될 것 같다,

조선시대 옛길 이야기도 안내되여 있다, 조선시대에도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있엇습니다, 1770년 신경준과 홍봉한 등이 영조의 명에 따라 편찬을 시작한 "증보문헌비고" 라는 책은 전국의 도로를 총 9개로 정리하고 있고, 신경준의 도로고는 6개, 김정호의 대동지지는 전군의 도로를 10개로 정리 하고 있습니다, 

이들 도로는 의주로 가는 길을 첫번째 길로 해서 시계방향으로 순서를 매겻는데 중국과 통하는 의주대로, 일본으로 오가는 사신들이 이용했던 연남대로, 한양과 삼남지방을 연결했던 삼남대로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길들을 통해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가교 역활을 수행했고, 조선시대에는 마침내 동 아시아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 축으로 발 돋움 할 수 있었다, 라고 안내되여 있다,

남태령 옛길 안내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여 있는 곳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가파른 돌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길은 평평한 계곡길이다,

계곡은 말라 있지만 비가 많이 올때는 물이 많이 불어 나는지? 계곡 바닥은 이번 여름 장마로 많이 파여져 있다,

경기 삼남길 시작이라 그런지 내려가는 길은 야자매트도 깔려있다,

삼남길은 순 방향이 흰색 바탕이고 역방향은 붉은 색 바탕으로 표식이 되여 있어며 여기는 삼남길 보다는

관악산 둘레길 이정표가 설치되여 있는 길이다,

관악산 둘레길 뿐 만이 아니라 남태령 둘레길 안내도 있다, 남태령 옛길은 지금의 과천, 봉담 고속도로에서 사당방면으로 가다보면 우측 숲길로 들어선다, 남태령은 오래전부터 서울과 수원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였다, 

현재의 남태령은 서울 관악구 남현동과 경기 과천시 관문동을 연결하는 큰 도로지만 옛날에는 사람 한명 지나기 어려운 아주 좁은 길이였고 조선시대 선조들에게는 한양에서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 이였다, 일제 강점기에 이 길을 넓히면서 서울의 반쪽은 없어지고 지금은 과천의 일부만 남아 있어며 과천시는 이길을 복원하고 있다, 라는 내용이다,

남태령 옛길은 도시화로 이렇게 2차선 도로가 나 있다,

가는길 왼쪽으로 상당한 고급 주택들이 자리를 하고 있어니 도로는 기본일게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작은 공원, 여기는 남태령 3,1운동 만세 시위지 라는 안내도 있다,

과천면 주민이였던 이복래 등이 주도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이복래는 본래 시흥 출신으로 시위 당시에는 과천면 히리에 살았다,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이 벌어 졋다는 것을 알고 인근 주민들에게 3월 30일 남태령으로 모이라고 했다,

주민들이 모이자 그 들에게 손수 제작한 태극기 15개를 나누어 주었다, 이복래와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함께 과천읍내로 행진하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공립보통학교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 안내판 내용 -

오른쪽 공원은 남태령로 확장으로 지금 남아있는 공원의 규모는 그리 커지 않다,

남태령 옛길과 남태령로가 만나는 곳에서 

남태령로 인도로

조금 더 내려가면

관문사거리부대 앞 버스정류장 유리벽에 節性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다,

마디절 節자 와 성품 性자로  쓴 글씨인데 이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자신의 성품을 절제하라" 는 내용으로 추사의 스승인 완원이 평소 강조한 덕목을 추사 김정희 선생이 큰 글씨로 쓴 글 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옛길이니 옛날을 떠 올리게 하나보다,

관문사거리부대 앞 버스정류장을 지나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신호등이 있는 곳 건널목으로 건너간다,

길을 건너가면 25편의점 앞길로

다음 골목길로 들어가는게 옛길이다,

골목길 입구에는 용마골 이라는 표지석도 있다,

2차선 도로기는 하지만 마을 골목길이다,

이렇게 삼남길 리본도 붙어 있다,

이렇게 보이는 주택가를 계속해서 따라간다,

조금은 특이해서 3층 건물을 찍었다, 폭 1m도 안되는 것 같은 3층 건물, 몰론 삼각형이니 반대편은 약 5~6m 정는 되여 보인다, 이렇게 작은 땅에 지어진 3층 건물, 건축비 값이나 할려는지? 내가 해야할 걱정은 아니지만,

2차선으로 이어지던 도로는 그나마 골목길로 바뀌였고

안전난간대 아래는 계곡이다,

서광사라는 절 안내도 있는 길을 올라가다 보니

관악산 등산 안내도 도 있다, 현재의 위치에서도 관악산으로 올라 갈 수가 있다,

골목길 끝에 있는 서광사는 폐업중이고

삼남길 리본을 따라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과 옆으로 나가는 길, 삼거리에서 옆으로 나가는 길로 간다, 직진해서 올라가면 관악산 등산로다,

이렇게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나가면

촘촘하게 삼남길 리본이 걸려 있다,

묘지 도 지나서

아래로 내려가면

계곡이다

계곡을 건너서 들어가면

계곡 건너편 산으로 연결이 된다,

여기서도 길은 편안하고

삼남길 리본은 거의 5~10m 간격으로 걸려 있다,

야자매트도 깔려있는 길을 가다가

다시 작은 계곡을 건너가면

계곡 옆으로 야자매트가 깔린 길이 나오고

작은 언덕으로 연결이 되는데

익른 아주 싱그러운 녹색의 숲길이다,

이렇게 리본이 곳곳에 걸려 있어니 길 따라가는 어려움도 없지만

길 또한 여유롭기만 하다,

이렇게 좋은길을 끝으로 아랫녁 도로와 만난다,

이 도로는 과천 중앙로 로

과천 관문 체육공원 앞 도로다,

1층은 신의주 전설 순대집,

2층은 고추짜장면 짬뽕 냄비유동집인 중국집도 있는 곳을 지나간다,

스타벅스와 천주교 과천성당도 지나가고

길 건너에는 계속해서 과천 관문체육공원이 이어지는 곳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보이는데

이 도로는 관악산길이다,

관악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6년째 연애중 찰영지 입간판이 보이는데

6년째 연애중 찰영을 했다는 주택이 보인다

그 옆으로 과천초등학교가 있다,

과천초등학교 끝 골목길 삼거리에 온온사가 있다, 온온사는 삼남길 1코스 에서는 꼭 들려야 하는 장소다, 그 이유는?

온온사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역대 현감비석군이 있다, 이 비석군은 원래 시흥군 과천면에 관문리 흥첨날 249의 5번지 도로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겻다고 하는데 조선 정조 6년(1782)에 건립된 현감 정동준의 비로 부터 1927년애 새워진 변성환에 이르기 까지 모두 15명의 비석이 보존되여 있다,

대부분의 비석은 장방형의 비좌에 비 신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식으로 보이고 있다, 과천현에 부임했던 역대 현감의 변화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건립연대를 알 수 있어 당대에 유행했던 비석의 형식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다, - 안내문 내용 -

비석군 옆 수령 600년 은행나무도 있는데

은행나무 밑둥 둘레는 6,5m이며

은행나무 높이는 25m나 되는 거목이다, 600년 세월이니 조선 초에 심어진 나무다,

온온사다,

온온사 왼쪽 한켠에

삼남길 두번째 스템프함 이 있다,

경기도 삼남길 제1길 온온사라는 도장이 새겨 있는 스템프를 찍는다,

온온사 옆 공터는 과천현 관아지 안내가 있다, 과천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건물인 관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돌로만들어진 유물이 발견되고 나무의 나이가 많은 점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온온사를 중심으로 관아가 지어졋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과천현 관아는 조선 초기 무학대사의 제자인 열이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없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임금이 묘소(능), 온천, 사냥을 오고 가면서 이용하던 행궁의 기능과 지방 관청의 기능을 모두 처리했기 때문에 다른 곳의 관아보다 규모가 더 컷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천현 시수읍지(숙종25, 1699년 작성)에 과천현 관아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지금은 규모가 작아 보이는 과천현 관아 터 지만 옛날에는 인근에 아무 것도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여 얼마나 큰 규모였는 지? 상상 할 수 는 있겠다,

과천의 객사였던 온온사가 축조된 것은 조선 인조 27년(1649년)이었으나 현재의 온온사는 정조대왕이 1790년 2월 11일 아버지 사도세자 능행 중에 과천 객사에 경숙하면서 "경치가 좋고 쉬어가기가 편한다" 하여 객사 서헌에 "온온사"를 동헌에는 옛 과천의 별호인 "부림헌" 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한 것을 계기로 온온사라

부르게 되었다. - 안내문 인용 -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외국에서 온 사신이나 나라 일을 하는 관리들이 숙소로 이용하던 곳이다, 고을 원이 일을 하던 동헌보다 더 지위가 높다, 그래서 고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며 건물도 정성을 다해 지었다, 온온사는 지금 공사중이다, 담장공사 등으로 새 단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절이 아니니 스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온온사 외부 뜰은 개방 되여 있지만 실내 문은 닫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