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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삼남길 제7길 독산성길 上(세마교~독산성 세마대)2022, 10, 30,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삼남길

삼남길 제7길 독산성길 上(세마교~독산성 세마대)2022, 10, 30,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2. 11. 29. 00:00

1호선 세류역에서 25번 버스로 도착한뱅뱅이 정류장 여기는 뱅뱅아울렛이 있는 세마교 앞이다,

삼남길 제7길의 출발지인 세마교를 건너간다,

세마교에서는 황구지천도 보이고 오산화성고속도로 서오산 TG도 보이는 다리다,

세마교를 건너가면 오산화성고속도로 아래로 지나간다, 

고속도로 아래 삼남길 제7길 독산성길 안내가 세워저 있다,

제7길은 이곳 세마교에서 은빛개울공원까지로 8,2km이며 2시간 정도가 걸리는 어려운 길이라고 알려준다,

출발지인 세마교는 화성시 정남면 괘랑리이고 오산화성고속도로 아래서 부터는 오산시 양산동으로 화성시와 오산시의 경계로 화성시에서 오산시로 들어가는 길이다, 

고속도로 아래서 약 200m지점까지는 인도가 없는 좁은 2차선 도로를 가야한다, 그리고 첫번째로 보이는 마을길 사거리에 삼남길 표지가 있는데

표지 뒤 삼남길 이정목은 길도 없어보이는 숲으로 들어가라고 방향 표시가 되여 있다,

들어오는 입구는 길이 없을 것 같은 잡초더미 였는데 조금 들어가니 이렇게 아름다운 숲 길과 만난다,

태양을 마주보며 가는 숲의 향기는 싱그럽기만 하다, 

무척이나 넉넉하고 여유로운 숲길을

솔 향을 느끼면서 가는길

이대로 독산성 까지 이어지는 줄 알았는데 마을길이 보인다,

그리 넓지는 않은 농로길 같은데 이길이 독산성으로 가는 길인가 보다,

그러나 잠시 가다보니 가던길은 계속해서 이어지지만 삼남길 표지목은 오른쪽으로 가라고 알려준다,

낙엽이 깔린 오른쪽 길로 올라간다,

어디서 어디로 이어지는 지는 산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이길 끝이 독산성인 것 같다,

한여름에 찾아 와도 시원할 것만 같은 그런길이다, 

작은 계곡에 신선교라는 앙증 맞은 다리도 놓여 있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신선이 되는 모양?

어쩌다가 한 두사람 정도만 보이는 한적한 길은 서서히 고도가 높아 진다,

이 길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 가는 길도 보이는데 소나무가 빽빽하게 보인다, 

가는길 삼천리 북카페도 있다, 20여권의 책도 있는데 이 정도라면 보여주기 위한?, 여하튼 이곳은 독산성 삼천리 쉼터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삼천리 인가보다, 

북카페를 지나서 가는길

피톤치드 고농도 산림휴양시설 독산성 산림욕장 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여기가 독산성 산림욕장인 모양이다,

이제 앞이 훤히 트이는 곳까지 올라왔다,

이곳에 있는 경기도 삼남길 지도 안내판을 지나면

다른 방향에서 올라온 차들도 보이는 곳 여기가 독산성 주차장인가?

여기서도 다시 보적사로 올라가야 한다,

차들도 올라가는길 숲길을 걸어 올때는 그런대로 버겁지는 않았는데 세멘트포장길이라 그런지

숨 가쁘게 잠시 올라가면

보적사 주차장이 보인다,

이곳에 삼남길 제7길 독산성 스템프함이 있다, 여태까지 오면서 보았던 삼남길 스템프 함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경기도 삼남길 독산성 이라는 도안이 새겨진 스템프를 찍었다, 잉크가 말랐는지 잘 안 찍히지만 그래 도 찍엇다, 

스템프함 옆에 세워진 안내에는 사적 제140호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1,095m의 태뫼식 산성과 산 정상부에 복원되여 있는 권율장군의 승전과 관련된 장대를 말한다, 라는 안내가 보인다,

독산성과 세마대지 사진 지도도 있고

주차장에서 보적사로 올라간다,

보적사로 들어 가는 문은 독산산성 동문이다, 일반적인 산성 문과는 다른 암문 형태의 문으로 동쪽에 있는 문이라서 동문이다,

독산성 동문에 대한 안내는 동문은 평거식 성문(양쪽 벽 위에 장대석이나 판석을 수평으로 걸처 방형의 통로를 만든 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킨 문으로 문확석(문짝을 여닫을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것)이 각각 두개씩 남아있다, 라는 문인 동문으로 들어간다,

보적사로 들어와서 내려다보면 오산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보적사다, 독산성 동문안에 있는 사찰로 지어진때를 알 수 있는 옛 문헌이나 유물이 없는 절이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차레 고쳐지었고 용주사를 세울 당시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과 요사(승려들이 머무르는 거처)3동이 다시 지여졋다고 한다, 

1831년 편찬 화성지에 따르면 보적사는 21칸 반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1902년 약사전을 허물고 새로 지였어며 1987년에 고쳐 지어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현재는 석가여래와 약사여래, 지장보살을 모신 대웅전과 요사 2동과 3층 석탑이 있다, 보적사는 1978년 세마사로 이름을 변경 하였다가 1996년 다시 보적사로 바꾸었다,

보적사라는 이름에는 전해져 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삶이 어려운 노 부부가 쌀이 두되 밖에 나지않아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구차하게 사느니 부처님께 공양하기로 마음을 먹고 공양을 한후 집에 돌아오니 곳간에 쌀이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보적사 산성을 따라 오른쪽으로 나간다,

보적사 오른쪽은 보적사 텃밭이 있는 이런 모습이다,

성 위로 가면서 내려다 보는 보적사로 들어 온 길 보적사 입구 주차장도 내려다 보고

나가다가 되돌아 본 보적사는 규모가 큰 절은 아니다,

성 길은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조금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성 길은 아름다운 길이다,

아침에 들어 온 세마교 방향 일진산업단지에 있는 일진전기(높은 건물)뒤로 화성시 일대가 조망된다,

그 아랫쪽으로는 황구지천이 길게 이어지고

일진산업단지 위로는 수원시와 수원비행장(사진에 보이는 길게 이어지는 공터)일대도 보인다, 

성 길을 계속가면 남문으로 가겠지만 독산성에서는 꼭 보고 가야할 세마대가 있어 다시 보적사 방향으로 20여m를 가다가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여기는 독산성 정상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이곳에

보이는 정자 하나, 

여기가 禿山城, 洗馬臺 다, 독산성은 백제시대에 쌓았다고 전해지며, 도성의 문호와 관련하여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이다. 그래서 독산성은 백제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독산성은 1593년 7월에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 장군이 근왕병 2만 명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이 성에 주둔하면서 왜군을 물리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군사와 백성이 협동하여 불과 4일 만에 수축하였다고 알려진다.

권율 장군은 명나라 군사들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서 1593년 2만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이 성에 주둔하였다. 이 성은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는 하지만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큰 단점으로 대군을 장시간 주둔시키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곳까지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는 독산성 일대가 벌거숭이산임을 보고 물이 부족한 지역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래서 부하로 하여금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내어 성 안의 군사들을 조롱하도록 했다. 이에 맞선 권율 장군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꾀를 내었다. 즉 성 안 서장대에 장막을 치고 잔치를 열고, 군사들로 하여금 백마를 성 위로 데리고 올라가서 흰 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도록 한 것이다.

잔치를 벌이는 모습에는 곡식과 물의 풍요함은 물부족에 대한 염려 따위는 전혀 필요없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사람이 쓸 물도 부족한 판에 말의 등에 물 한 동이를 연거푸 퍼붓는 것이었다. 왜군이 보기에 이 성 안에는 물이 차고 넘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결국 이를 본 왜군은 잔치를 벌이고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길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해하고 장기간 싸우더라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퇴각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독산성의 서장대를 세마대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권율 장군은 이곳에서의 승리로 서쪽으로 향하던 왜군의 진로를 막았다. - 네이버 지식백과 독산성과 세마대 -

세마대에서 남문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면서 보이는 오산 시내

조금 더 가깝게 보면 오산시에도 아파트군락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 중에서 유독 높은 빌딩 4개는 무슨 건물일까 궁금 하다,

남문으로 내려 가면서 왼쪽 언덕에 있는 보적사 요사채도 보고

내려가는 길은 성 안이라서

평평한 흙길이다,

어디서든 성내에는 여유로운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데 여기서도 마찮가지로 느껴진다,

앞에 보이는 여유로운 저 성길은 조금전 세마대로 올라가기 전 전망대에서 이어지는 독산성 북측이다,

남문 앞으로 내려와서 내려 온 길을 올려다 보면 이런 모습이다,

전투가 벌어진 성이지만 지금은 여유롭고 아름 답기만 하다, 성곽이 조금 끊어진 이곳은 남문이다,

남문을 나가기전 여러 개의 안내가 있는데 이곳에 있는 안내에는

정조의 효심이 담긴 독산성이라 제목을 달고 내용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 했다가 환궁 하던 중 장마로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백성들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갔다, 

그로부터 30년 뒤 풍수지리 문제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고 논란이 일어 났지만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히려 독산성을 더 고쳐 쌓도록 명하여 지금의 독산성의 모습이 갖춰 졋다는 내용이다,

남문 이야기도 있다, 남문은 독산성 정문으로 진남루 라는 문루가 있었다, 1831년 편찬된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의 규모는 6칸이 였어며 남문은 영조, 정조, 순조때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문으로는 말과 소가 다닐수 있었어며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활을 했다, 지금의 모습은 1979년에 복원하여 정비한 것이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켯던 문학석 2개가 남아 있다, 문학석 2개는 사진에 보인다,

문학석을 가깝게 보면 이런 모습이다,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유적 사진 안내도 있다,

남문을 나와서 보는 독산성 성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