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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강화길 제1길 上, 천등고갯길(아라뱃길터미널~당산정)2022년 11월, 27일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강화길

강화길 제1길 上, 천등고갯길(아라뱃길터미널~당산정)2022년 11월, 27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2. 12. 17. 00:26

2022년 11월27일은 조선시대 6대로 중 강화길을 걷는다, 경기옛길 중 처음 걸었던 평해길은 관동대로 로 동대문인 흥인지문에서 망우리고개까지 서울구간을 걸은 후 경기옛길 평해길을 따라 갔었고 삼남길은 충무공이순신장군 백의종군길 의금부터인 종각에서 부터 시작해 남태령으로 간후 경기옛길 삼남길을 이어 걸었어나

강화길은 조선시대 강화도로 가던 길이라서, 서울 돈의문(서대문)에서 강화도까지 가야 하지만 서울구간은 다음으로 미루고 경기도 출발지부터 걷는다,

여기는 경기옛길 강화길 출발지인 아라김포여객터미널이다, 이곳으로 오는 교통편은 지하철 9호선 종점인 개화역에서 16-1번 버스로 와야한다,

강화길 제1길은 천등고갯길로 아라김포여객터미널에서 풍무역앞 새장터공원까지다, 강화길(김포옛길)의 첫 관문, 임긍의 효심이 깃든 어로(御路)길" 이라는 제목의 길 안내가 보인다,

경기도 강화길(김포옛길) 전체구간 안내도 도 출발점에 있다,

강화길 제1길 스템프함이 출발지에 있다,

거북선모형으로 만든 강화길 스템프함, 강화길 끝이 바다라서 거북선 모형으로 스템프함을 만든 모양이다,

강화길 제1길 스템프는 경기도 강화길 - 김포옛길 천등고개라는 도장이 새겨져 있다,

강화길 시작은 스템프를 찍고나서 뒤로돌아 현대아울렛으로 가는 일직선 길을 따라 가면된다,

그리고 오른쪽 도로변으로

또 일직선으로 멀리 보이는 고가도로 이래로 간다,

신호등이 있는 도로도 건너고

끝까지 가면 굴포천 안내판이 보이는데

굴포천에 놓여진 어울림다리를 건너가는 길이 강화길이다,

강화길 제1길 천등고갯길은 강화의 주된 길 강화로 라는 안내가 있는데 강화로는 신경준의 도로고 와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조선의 간선도로중 제 6로라고 했다, 강화로는 한양에서 양화나루로 한강을 건넌 후 양천, 김포, 통진을 지나 강화도로 이어지는 길로 현재 양천은 1963년도에 서울 양천구로 편입되였고 강화도 지역은 1995년에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였다,

과거 강화도는 경기만 일대의 바닷길과 임진강이 합류하려 서해로 빠저 나가는 한강 하류인 조강의 강길이 연결되는 지역이여서 평상시에도 인적, 물적 교통량이 많은 도로 였다, 유사시에는 천도지로 이용되기도 했던 강화로가 다른 노선에 비해 짧은 노선임에도 6대로에 포함된 중요한 이유다, 사진에 보이는 하천은 어울림 다리를 건너가면서 보이는 굴포천이다,

강화로의 본 노선은 한양 - 양화진 - 철곶천 - 약포교 - 김포 - 백석현 - 통진 - 강화부로 이어지며 총연장 120리(약47km)이다, 다만 조선시대 당시 경기도에 속했던 지역들이 현재는 상당부분 서울이나 인천의 행벙구역에 속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제외하고 경기도내 지역으로 한정하면 김포 - 백석련 - 통징 - 갑곶진 구간으로 총 연장 80리(31km)정도다, 

강화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첫째는 한강의 물길을 이용한 물류 유통의 기능이 였어며 두번째로는 국방의 기능을 담당하는 주요 도로 였다, 한강으로 들어오는 외세를 막는 역활을 했는데 덕포진과 문수산성은 이를 증명해주는 중요한 문화자원이다,

 

세번째는 왕실 피난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고려 고종은 여몽항쟁기 1232년 부터 1279년까지 개경에서 고려 궁지가 있는 강화도로 파천을 했고 조선 인조는 병자호란시기 강화도로 파천하려고 하였어나 청군이 이미 한강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남한산성으로 피신 한바 있다,

이렇듯 강화로는 다른 길들에 비해 짧은 구간임에도 많은 이야기와 가치가 담겨있는 길 입니다, 현재는 강화대교까지 거의 직선으로 나 있는 4차선 48번 국도(김포대로)가 김포와 통진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라 할 수 있다, 라고 안내되여 있다, 

개천을따라 내려간다,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로 진입하는 날개 도로 아래를 지나

고속도로와 개천변 가운데 길을 따라서

내려가면 고촌지역일대 아파트단지가 보인다,

이 개천은 서부간선 수로다, 첫번째 다리를 건너서 아파트가 보이는 앞 쪽

도로변 인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김포대로 신곡사거리 직전, 오른쪽 도로로 직각으로 꺽어 들어가면

고촌 어린이 공원 있다, 지도에는 신곡공원이다,

어린이공원길 끝 삼거리 고촌우방아이유쉘 아파트 앞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직각으로 꺽어서

숲속 마을 대우아파트를 지나서

T자형 삼거리를 건너 왼쪽으로 간다,

길 건너에 있는 이 안내 이정표를 참고 하면 된다,

그리고 2차선 도로를 따라 직진으로 약 300m 거리 오른쪽 시골향기 식당앞에서 고촌체육공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시골향기 식당 골목길 끝은 그리멀지 않다, 여기에

고촌읍 역사길 안내판이 보이는데

고촌 당산이라는 안내도 있다,

길 아래는 체육공원이니 

체육관련 시설물들이 보인다,

안내판 옆 계단으로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가면 울타리가 처진 곳이 보이는데 울타리 안은 맑은물 정수장이다,

맑은물센터를 지나 다시 또 올라가는 계단길

조금은 가파른 150여 계단을 올라가면

당산 정상에 정자가 있다, 정자 이름은 당산정(堂山亭)이다

당산 정상에는 제를 올리는 제단도 있는데

제단뒤 표석에는 당산미 내력이라는 안내가 있는데 내용을 읽어보면 이 산의 북동쪽 아래 마을은 안시미, 서쪽과 북쪽은 풍굴 마을로 이 일대가 양천 허씨의 집성촌이 였어며 당시 허 씨 문중에 허장사가 태여났다 전한다, 양천 허씨들은 이 산 남쪽 골자기에 당집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 왔다,

 

또한 이 산에 아가위(한약초의 일종)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전 한다, 그 후 허씨들은 떠나고 지금의 배천 조 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또한 1919년 3월 25일 고촌면민들이 이곳에서 3, 1 독립만세운동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매년 정월 대보름 날이면 인근 동네 사람들이 모여 달맞이를 하건 곳이기도 하다,

 

이 산은 당집이 있어 당산미, 당살뫼라 불렀다는 설도 있고 배천 조 씨 들의 족보 기록에는 아가위 당자를 써 당산미로 기록되여 있고 현재는 당산미라 부른다, 일부 지도에 옥녀봉이라 표기 된 것은 잘못 표기 된 것으로 이를 바로 알리기 위하여 인근에 살던 주민들이 이 글을 이 돌에 새긴다, 라고 적혀 있다,

옥녀봉(玉女峰)은 남쪽에서 이곳 당산미와 마주보던 봉우리로 장차 부락의 뒷산으로 마을 이름을 옥녀의 비녀자리라 하여 비녀釵(차, 채)자를 써 장차(長釵)부락이라 이름지였다 한다, 라는 안내도 있고

저 푸른 창공을 바라보며 가슴을 활짝 펴고 이산을 텅째로 들여 마셔 버리자, 당산에 영협함이 모든 이에 고통을 덜어주고 이 산에 아가위가 너에 몸속에 흐르는 피를 맑게 하여 줄 것 이니라, 라고 새겨진 시비도 있다,

당산정에서 보이는 뾰죽한 탑이 있는 저 산은 인천의 주산인 계양산으로, 계양구 지역 일대도 훤히 내려다 보인다,

계양산에서 부터 김포 방향으로  검단시도시 일대 와

김포 풍무동 일대와 한강신도시 까지의 아파트 군락이

끝이 없을 것 처름 이어지는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한강 건너를 바라보면 일산 지역이고

이어서 북쪽으로 바라보면 행주산성과 방화대교가 보인다, 그 뒤로 서울 남산타워와 잠실 롯데타워도 뽀죽하 보이는 곳이라서 여기는 주민들 달맞이 장소도 좋겠지만 맑은날 야경은 더없이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강건너로 조금만 더 멀리 바라보면 그림처름 보이는 북한산과 도봉산에 한동안 시선을 뗄 수 없다,

한강 이남 방향으로 바라보면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은 김포공항 앞 개화산이 펼쳐진다, 이렇듯 당산미 는 해발 100여m가 채 안되는 산이지만 도심 속 자연과 잘 어우려지는 최고의 아름다운 조망권을 지닌 산인 것 같다,

찾는 이 하나 없고 갈 곳 없는 중 늙은이 오동지 긴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석양에 막대집고 당산에 올라서니 매서운 칼 바람이 귓불을 에이누나, 서산마루 지는 해가 왜 이다지도 서럽던가, 산 새알 꺼내먹고 칡뿌리로 배 채우던 ~ 라고 적힌 당산미  장문도 읽어보면서

또 하나의 역사적인 이야기도 있다, 1919년 3월, 일제시대 고촌에서는 무슨일이 있었을까? 대한민국만세 소리가 경성탑골공원에서 하늘 높게 울려퍼지자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게 갖고 있었던 고촌의 김정의는 마을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을 독려했다, 김정의는 김정국, 윤재영, 김남산, 윤주섭, 이흥돌과 함께 당산미에서 밤새도록 태극기를 만들었고 1919년 3월 24일 이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고촌 당산미에서는 긴 장대에 태극기를 높이 꽃아놓고 계획적으로 산에 모여 일제에 항거 하였어며 지금도 당산미 정상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는 내용도 있다, 태극기 계양대 사이로 보이는 북한산과 도봉산 줄기가 한강과 잘 어우려지는 전경이 멋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