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의주길 제1길 벽제관길 上, 삼송역~송강공릉천 공원(2022, 12, 25)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의주길

의주길 제1길 벽제관길 上, 삼송역~송강공릉천 공원(2022, 12, 25)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3. 1. 3. 00:38

조선시대 한양에서 대륙으로 오가던 길이 의주길이다, 그 여정의 출발점인 벽제관은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을 배웅했어며,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도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하룻밤 쉬고 오던 길이였다. 이 길도 지금 옛길은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옛길을 똑같이 재생시켜서 가는게 아니고 옛길의 흔적을 따라 새롭게 조성한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아래는 의주길 탐방을 위해 이동해야 하는 교통편과 일정 예상이다,

한편 삼송역에서 멀지 않은 숲길에서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조선의 국경 문제를 매듭지은 주인공 역관 김지남의 묘를 만날 수 있으며, 공릉천 부근에서는 고양군민들이 힘을 모아 공릉천에 다리를 세워 의주대로를 탄탄대로로 만든 사람들의 기록이 담긴 덕명교비를 볼 수 있다. - 경기옛길 홈페이지 -  의주길은 지금의 서대문터 인 돈의문에서 무악재와 홍제동, 구파발을 지나가는 옛길이 있었지만 경기도 옛길의 출발점은 삼송역이다,

2022년 12월 25일 삼송역 8번 출구를 나가니 의주길 덕명교비 2,2km 안내판이 왼쪽으로 가라는 표식이 있다, 그 다음은 불타오르 닭 앞 왼쪽 골목이다,

불타오르 닭 앞 골목길 10여m 지점 사거리에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가 일직선으로 골목길 끝까지 기야한다,

경기옛길 홈페이지에는 이곳 골목길이 의주길 벽화거리라고 했는데 초입부에는 벽화가 보이지 않는다,

골목길을 조금 더 올라가니 이런 모습들이 보인다, 그래서 벽화거리인가 보다,

다른 마을처름 골목 전부에 그려진 벽화가 아니라 몇 집의 담 벽에만 그려져 있는 

길지않은 벽화거리를 지나서 삼송역에서 부터 일직선으로 올라 온 골목길 끝까지 가면

4차선 도로인 통일로가 나오고 통일로에서는 왼쪽으로 내려가야한다, 여기서 벽제관은 7,7km 이니 그리 멀지는 않다,

잠시 통일로를 내려가다가 도로 위로 보이는 생태 통로 아래로 들어간다,

생태통로 아래를 지나면 옆에는 엘리베이터가 있고

왼쪽으로 들어가는 길도 있는데 

여기서는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보니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도 되는데

쉬운길을 두고 이렇게 가파른 계단으로 헉헉대며 올라 갔어니 ~

계단이 끝나는 곳 앞 의주길 이정표가 있다,

도로 위에 조성되여 있는 생태통로다, 이 생태 통로는 계단으로 올라온 곳 오른쪽이 한우물숲길 공원인데 이 공원과 아랫녁에 있는 오금천을 이어주는 역활을 하는 통로 로 조성이 된 것 같다,

지금 막 올라온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은 이렇게 보인다,

며칠내린 눈이 얼어 붙어 미끄러운 길이다, 조심해서 내려간다,

오른쪽 옆에는 고양오금초등학교와 

고양오금유치원이 있는 여기는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이다,

이길 끝에서

왼쪽길로

삼송119안전센터까지 내려가서 앞 사거리에서

오금천 하천변으로 내려간다,

오금천변을 따라간다, 사실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물이 흘러 내려가는 방향이니 내려 간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다,

오금천은 그리 넓은 하천은 아니다,

그래도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지역 하천이니 하천변은 잘 다듬어저 있다, 오금천을 따라 약 700~800m쯤 내려가니 공릉천과 합류되는 지점 직전에

한천변보다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비석이 보인다, 이 비석은 덕명교비(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2호)다,

높이 286cm 비신은 가로 95cm, 두께 25cm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덕명교비는 한양과 북부지방을 연결하는 의주대로 구간 중 공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사항을 기록한 비다. 비의 건립자는 이한, 유후성, 윤면지, 이상식, 홍시우를 대표로 한 760여 명의 주민이다.

특히 수십 명의 인명이 이두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 이두 문자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비의 건립 연대는 1658년(효종 9)이며, 고양시 공릉천 일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360년이나 된 역사를 지닌 비다.

덕명교비 비신의 비문은 비바람등으로 마모가 심해 일부분은 판독이 어려운 실정이고 비의 가장 윗부분인 옥개석의 일주도 마모되여 있는 상태다, 비의 앞면에는 전자로 경기도 고양군 신원덕명교라 기록되여 있고 앞면에는 전자 이외에도 가는 글씨로 된 비문이 새겨져있다,

비의 뒷면에도 비의 중간 부분부터 비문이 기록되여 있는데 고양 신원 덕명교량명 이라 기록되여 있다, 이후 비문의 그 아래로 수십명의 인명이 한문과 이두문자 등으로 기록되여 있다, 이 비의 내용은 한양과 한반도 북부 지방 및 중국을 연결하는 의주길 관서대로 구간중 신원동 공릉천 위에 다리를 놓어면서 그 자세한 사황을 기록으로 표기해둔 것이다, 

덕명교비가 있는 이곳에 경기옛길 삼남길 제1길 스템프함이 있다,

경기도는 2013년 10월 26일 경기옛길 의주길을 만들면서 스템프함도 만들었을테니 그 역사가 벌서 10여년이 되여 가지만 스템프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물론 매번 새로 갈아야 했겠지만 관리를 잘 하고 있다는 증거다,

덕명교비의 마모상태는 눈으로 보기에도 심각해 보인다, 더 이상 마모가 진행되지 않게 잘 보존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일까지 챙기다가 잘해야 본전 정도일 일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사명감이 있는 공무원은 있을것 같은데 아쉽기만 하다,

덕명교비를 지나 이어지는 길은 공릉천변이다, 공릉천은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신도동과 양주시 장흥면의 경계선이며, 관산동, 사리현동, 지영동을 거쳐 파주시 교하면에서 한강과 만나는 총 길이 30.5Km의 하천이다,

공릉천 이름은 파주 삼릉에 있는 공릉의 명칭을 따서 공릉천으로 부른다. 주변의 퇴적 평지대는 화훼단지와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恭陵(공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1460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죽었다. 처음에 왕후릉이 아닌 세자빈 무덤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은 없다. 다만 양석과 둘레돌을 둘러 무덤을 보호하게 하였다.

경기도 양주시, 고양시, 파주시에 흐르는 하천으로 한강의 제1지류다. 힘차게 내달리는 공릉천의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백로와 기러기떼 등 겨울 철새와 원앙,비오리 등 천연기념물을 쉽게 만날 수 있다. - 다음백과 -

공릉천은 강 폭이 넓다, 그래서 천이라기 보다 강으로 불릴 만큼 큰 하천이다,

100번 고속도로인 수도권 제1순환도로 아래를 지나간다,

고속도로라서 그런지 도로폭도 엄청나게 넓은 공룡천4교다,

공룡천 4교를 지나서

계속해서 공룡천변으로 내려가면

통일로493번길 신원교와 호국로 벽제육교등 2개의 다리가 공룡천을 가로 질러 건너간다,

신원교 와 호국로 벽제육교등 2개의 다리 앞에는 돌다리도 있다, 공룡천에는 이렇게 보이는 돌다리가 여러 곳에 있다,

그러나 이 돌다리는 일반 개천에 놓여진 징금다리와는 사뭇 격이 다른 프리미엄 급 다리다,

다리를 지나가면 다시 또 다리가 보인다, 아래로 보이는 낮은 다리는 맞은편 레미콘공장으로 들어가는 전용?다리인 것 같고

위에 보이는 다리는 철교다, 여기도 기차가 다니는지?

이곳 오른쪽에 공원이 있다, "공릉천 고향의봄" 이라는 사각 구조물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본다,

사각구조물 기둥에 붙어있는 작은 현판을 보니 송강정철 이라는 한자가 보인다, 내용은

영자미화 詠紫微花 (詠 읊을 영, 紫 자주빛 자, 微 작을 미, 花 꽃 화)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어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 보지 말라

거리의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여 다투리,

그리고 아랫쪽 작은 글씨는 "정철 1536~1593" 에 대한 이야기다,

조선 선조 때의 정치가이며 시인, 자는 계함, 호는 송강으로 벼슬이 죄의정에 이르럿다, 서인파의 투사로서 당쟁의 와중 속에서 몇 차레 파란과 귀양살이를 격었다, 그는 시인으로서 천재적 자질을 나타내여 많은 걸작 가사를 남겼다, 그의 가사는 종래의 란문투를 벗어나 3, 4조 운율에 의해 자유자재로 우리말을 구사 했어며 그의 호탕하고도 원숙한 시풍은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명종 15년, 김성원을 위해 지은 "성산별곡" 과 선조 13년 강원도 관찰사로 갔을때 지은 "관동별곡" 선조18년~21년 전라도 창평에 은거 했을때 지은 "사마인곡" "속미인곡" 등 4편이 있고 사설시조 "장진주사" 1편과 단가 77수가 "송강가사"에 실려 전해오고 있다,

고양시 신원동에 부모님의 묘소가 있어서 오래동안 함께 하며 많은 작품을 남긴 송강 정철

송강의 가사문학 중 최고로 꼽히는 훈민가 16수 중 4수의 효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子孝[자효]시조도 있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각가지 형태의 자연석에 음각으로 새긴 시비들

공원을 가득 채운 듯한 시 비들이 보이는 공원을 나간다,

이곳 공원 이름은 송강 공릉천 공원이 공식적인 이름 인 것 같은데 다음 지도에는 송강 시비 공원 이라 표기되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