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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경기옛길영남길제8길 죽주산성길下(비봉산정상~죽산버스터미널)2023, 04, 09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영남길

경기옛길영남길제8길 죽주산성길下(비봉산정상~죽산버스터미널)2023, 04, 09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3. 5. 1. 00:25

비봉산 정상에서 올라온 길 반대편으로 넘어 간다, 여기도 산 죽이 무리지여 자라고 있다, 산죽이 보이는 것 만으로는 설악산이나 한라산 인 줄?

산죽이 자라고 있는 지역은 다른 잡목들이 있는 곳 보다 더 아늑한 느낌을 받는다,

정상에서 30~40m 정도를 가면 갈림길이 있는데 여기서는 왼쪽이다,

왼쪽으로 들어가서 다시 20여m쯤 거리에

아래로 내려가는 데크 계단이 있다,

그리 길지 않은 계단을 잠시 내려가면

이제 부터는 계속 내림길이다,

내려가는길 왼쪽으로는 마을도 보이고

내림길은 가파르지도 않다,

그러다가 보이는 이정표 가 있는 갈림길,

오른쪽 600m 거리에는 매곡마을이 있고 죽주산성은 200m다,

여기서 부터는 다시 올라간다,

서서히 올라가는 길 앞에 보이는 돌담

여기가 죽주산성이다,

산성으로 올라와서 다시 오른쪽으로 산성 위쪽으로 올라간다,

조금 높게 쌓여져 있는 산성 아래

산성 암문도 있다,

암문 위를 덮고 있는 덥게 돌은 한장의 돌을 길게 다듬어 올려 놓은 형태다, 먼 옛날 여기까지 이 무거운 돌 들을 어떤 방법으로 옮겨와서 이렇게 덮어 놓았을까?

높은곳 본성 內城 으로 올라왔다, 내성은 조선시대, 중성은 신라시대, 외성은 고려시대 등 축조시기가 규명되였다고 하는 성이니 지금 올라 온 외성은 고려시대에 축조한 성인 모양이다, 내성으로 들어가면서 보이는 왼쪽 아래로 이어지는 성은 북문 방향이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성은 남문 방향이다,

여기는 비봉산 정상에서 1,4km 남문지 는 36m의 자리로 성곽으로 서는 제일 높은 곳인 듯하다,

외성에서 내성으로 올라간 곳 왼쪽은 북문과 포루가 있다는 방향이다,

북문지로 내려간다, 북문지 라고 했어니 북문이 있었든 자리로 간다는게 된다,

북문 터로 내려가면서 보이는 아랬녁

내려가는 길은 경사도 조금 있다,

잠시전 이정표가 있던 곳도 돌아보고

성위를 걷다보면

왼쪽으로 90도로 꺽어진 곳이 있는데

죽주산성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죽주산성 전체 둘레는 약 1688m이며

성곽의 높이는 6∼8m이며 내성 및 복원 성벽은 2.5m 내외 정도라고 한다,

또 한 곳에 문이 있는게 보인다, 여기가 죽주산성의 북문자리 인 것 같다,

이곳 문 위에도 문 덮개는 한장의 돌을 길게 깍아 올려놓았다,

여기가 북문 자리인 것 같은 이유는 문 안에 이정표가 세워저 있기 때문이다,

영남길 제 8길 죽주산성 자료를 찾아서 옮겨왔다, 죽주산성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비봉산정에 있는 고려시대 성곽이다, 통일 신라시대 처음 축성된 것으로 알려지며 고려시대에 크게 중수했다, 죽주는 죽산의 옛이름이고 죽산 매봉 위에 죽주산성이 있는데 이 성은 신라때 산 정상에 270m 둘레의 작은 성을 고려때 밖으로 1,5km의 외성을 다시 본성 1,7km가 있어 보기 드문 세겹으로 된 견고한 석성이고 지금도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라고 알려준다, - 경기옛길 홈 -

북문터를 지나서 죽주산성 포루지로 들어간다,

보이는 돌이 포루가 있었던 곳의 주춧돌 인 것 같다,

포루는 성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성벽을 돌출시키거나 유리한 지세에 대포를 쏠 수 있게 장치한 누각을 말한다, 죽주산성에는 북 동쪽 치성부분에 포루 초석의 일부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곳이 여기다,

포루지에서 보이는 죽산면 일대

맞은편 산 위에도 여러 개의 건물들이 있다,

죽산면에도 넓은 토지가 있는 것 같다,

포루지를 나가는길

북포루 안내가 있는데

거울로 만들어진 안내판이라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반대편에서 보니 포루는 포대 누각이 있었던 자리였다,

포루지를 나가 내려간다,

포루지에서 부터 내려 가는 길은

한 편의 동양화가 생각나는 아주 멋스러운 곳이다, 산성의 모두 돌아보지 못했어니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죽주산성에서는 포루 일대가 단연 제일 아름다운 곳인 것 같다,

그리 멀지는 않지만 끝까지 내려가면 산성입구가 있는데 여기에는 신출 귀몰한 장군 신명神明 송문주 안내판이 있다, 고려고종 18년 1231년 몽고가 처음으로 고려를 침입했고 이후 40년 동안 6번이나 고려를 유린했다, 전란으로 경기 지역 피해는 매우 극심했는데 안성도 예외는 아니였다, 의렇듯 몽고의 침입은 참혹했지만 고려의 항쟁도 치열 하였다,

최씨 무신정권은 몽고군이 지나가는 주요 길목에 방호 별감을 파견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산성으로 들어가 항전 하도록 독려했다, 안성 죽주산성 전투는 고종 23년 1236년 3차 침입때 일이다, 죽주는 개경에서 충주를 거처 경상도 지방으로 내려가는 영남대로 에 있는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였다,

최씨 무신정권도 죽주의 중요성 때문에 몽고의 1차 침입 때 박서장군이 이끌었던 귀주성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경험이 있는 송문주 장군을 파견했다, 그는 몽고군이 죽주근처에 이르자 백성들을 죽주산성에 들어 가게 한 뒤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는 고려사절요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 있다, 몽고군사가 죽주에 이르러 항복하라고 타으르므로 성중의 군사가 출격하여 쫏아 보냈더니 포를 가지고 다시와서 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이 포에 맞아 무너졋다,

성중에서도 포 로서 그들을 역공격하니 몽고군사가 감히 가가이 오지 모했다, 조금 후에 또 인유, 소나무, 홰, 쑥풀 등을 불을놓아 공격 하므로 성중 군사가 일시에 문을 열고 출전하니 몽고 군사의 죽은 자가 헤아릴수 없었다, 몽고 군사가 온 갖 방법으로 공격했는데 무릇 15일 동안이나 끝끝내 함략시키지 못하자 공격에 사용하던 병기들을 불살라 버리고 갔다, 송문주 장군은 귀주성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경험을 살려 목고의 공격방법을 예측하여 방어 함으로서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 시켰다,

휘하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오늘은 적이 받드시 아무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방법으로 그에 응해야 한다 고 미리 공격계획과 공격방법을 알려주었고 적이오면 과연 그 말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명 神明 이라 했다,

1236년 고려 고종 23년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송문주 장구운 멀리서 왔어니 어찌 배 고프지 않겠는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고 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놀란 적이 물러가니 뒤쫏아가 무찔럿다는 기록이 이 있는 신라시대 집수시설 6기와 조선시대 집수시설 2개가 발견되여 죽주산성은 예로부터 물이 풍부한 성城 이라는기록이 진실임을 발혁 주는 증거지인 이곳을 보수하는 공사도 지금 진행중인 모양이다,

집수시설 개선사업을 하고 있는 곳 앞에는 죽주산성 동문이 있다,

동문 옆으로는 산성을 따라 남문방향으로 가는 성곽과 연결이 되지만 영남길을 동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죽주산성을 나와서 동문을 돌아보면 동문은 홍예문이다, 누각은 없어졋지만 여기가 죽주산성의 정문 이였던 것 같다,

동문에서 포루지로 가는 방향의 성곽을 보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리고 도착한 죽주산성입구 주차장에 있는 죽주산성 현황도를 보니 죽주산선 외성은 618m, 중성은 1,336m, 내성은 1,125m이니 오늘 우리가 지나 온 성길은 죽주산성의 일부만 본 셈이다, 다시 한번 더 찾아가서  둘러보고 오는 것도 좋은 여행지 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죽주산성은 오누이가 힘겨루기로 쌓았다는 전설도 안내되여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연남길 제 8길 스템프한을 찾아야 하는데 죽주산성에 들어 와서 내내 찾 았어나 보이지 않아서

산성입구 주차장 화장실 주변도 살펴 보다가 아래로 내려간다,

이런 길을 따라 내려 가면서 보아도 스템프 함 비슷한 것도 안 보인다,

여기서 다시 동문으로 올라가 본다, 목적은 스템프 함을 찾아야 하니까, 스템프를 꼭 찍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경기옛길을 걸어면서 한곳도 빼지 않고 찍어 왔어니 여기서도 찍어야 하는게 맞을 것 같아서다,

무한정 다시 돌아 갈 수도 없고 스템프는 포기하고 동문에서 다시 돌아 내려왔다, 도로가 가까워 지면서 죽주산성 간판도 있는 주차장이 있는 곳도 지나 가니

산성 주차장과 화장실까지 있는 곳이 보인다, 혹시 여기에 스템프함이 있을까? 여기도 없다,

이제는 포기하고 도로로 내려 가는데, 도로에서 죽주산성으로 들어오는 입구 갈림 길목에 스템프 함이 있다,

스템프 함이 있는 곳을 찾느라 허비한 시간이 30~40분은 되였을 것 같은데 이제라도 찾았어니 다행이다, 스템프를 찍었다 이 마저도 인증이기 떼문에 소중하다,

이곳은 도로변에 있는 육교 앞이다,

경기옛길 홈페이지 자료실에 있는 제8길 스템프함 위치 와 현장에 있는 스템프함 위치는 전혀 다르다, 이런 잘 못된 정보로 초행길 사람들을 고생 시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자료가 잘못 되였어면 바로 잡아줘야 하는데 한 마디로 어이가 없다,

영남길 제8길 스템프함은 죽양대로 육교와 죽산낚지명가 음식점사이 죽주산성입구(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420-2)에 있다,

스템프함 옆에는 상구산 하구산 미륵당 한평마을 이야기 등도 안내되여 있다, 이 이야기들은 이 일대 이야기다,

스템프함 앞에는 비석군이 있는데 오래되여 글자가 마모되여 잘 알아 볼 수도 없다, 이런 곳에는 어떤 이유로 이곳에 비석군이 있는지 안내판 하나 정도는 필요할 것 같은데?

비석군을 지나 약7~8m 쯤에는 단독으로 있는 비석도 있고

17번국도인 죽양대로 옆 미륵당 길을 따라 죽산면 사무소 방향으로 간다, 

이 일직선 길도 조금은 멀다,

산성입구 스템프함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계속해서 내려 가다보면 

두번째 육교도 보이는데

육교 옆 삼거리에 미륵당 문화재마을 이라는 표지석도 있다,

미륵당마을 제사음식에 대한 이야기, 밥에는 바위가 들고 국에는 구렁이가 들었던 제삽밥 이야기도 있고

그리고 이 길에는 정자도 있는데 올라가 보니 바닥은 모두 떨어지고 관리상태가 아주 안좋다,

정자를 지나면 오른쪽에 매산리 석불입상도 있다

이 석불입상은 두려움을 없애고 소원을 들어주는 태평미륵이라고 했다, 안성은 과거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 문화가 발전 하였는데 특히 미륵이 많아 미륵의 고장이라고도 불렸다, 안성 전역에 약 16구의 미륵이 분포하는데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미륵이 있는 도시중 하나다,<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몽고군 침입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김윤후 장군의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미륵은 태평미륵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는 중앙관리들의 출장시 숙소를 제공하던 역원驛院 인 태평원太平院 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미륵당 오층석탑 미륵당내 석불입상 앞에 건립되여 있는 화강암 재료의 일반적 형식의 석탑으로 화강석 부재가 정연하고 짜임세있게 결구되어 있어며 규모는 작은편이다, 1매의 판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상면에는 낮은 각형의 괴임대가 각출되어 기단을 떠 받들고 있다, 단층기단 네 귀에 우주를 새겻어며 1석으로 조성되여 있다, 이 석탑에서는 건립시기와 탑지석이 출토 되였고 탑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여 있다, 건립연대는 993년이고 석탑의 전체 높이는 1,9m로, 1000년 전에 만들어진 석탑이다,

매산리석불입상, 미륵당이라 부르는 높은 누각 안에 모셔진 높이 5,6m의 미륵불상이다,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미륵은 보살과 부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 모습 또한 보살상과 불상 두가지 형태로 제작되는데 이 입상은 보살상 으로 만들어 졋다,

이 미륵불은 높은 머리 위에 사각형의 보개(불상을 보호하고 장식하기위해 머리위에 설치하는것)를 쓰고 있다, 높은 보개는 고려초기 보살상에서 흔히 볼 수 잇는 양식으러 이를 통해서 이 불상이 고려 초에 조성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목구비는 비례거 맞지않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두 귀는 볼에 밀착시키며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고 굵은 목에는 번뇌, 업,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 三道 가 표현되어 있다,

석불입상에서 나와 이어가는길 길 양쪽으로 소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석불입상 앞 도로는 이제 끝이 나고 농로로 들어간다,

이이지는 농로를 따라 가는길 좌우 양쪽으로 펼쳐지는 들녁은 넉넉하다,

평야지대는 아닌데도 이렇게 넓은 들녁이 있어니 이 지역에는 오래된 역사가 아직도 살아 있는듯하다,

농로를 따라 가다가 거의 끝지점에 이르면 또 한곳의 5층 석탑이 보인다, 여기는 봉업사지로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봉업사 지는 죽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로 봉업사 奉業寺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 와 더불어 경기도 3대 사찰로 꼽히는 거대 사찰이였다, 1530년 문헌에 따르면 이 때에 이미 봉업사는 없어 졋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8호 봉업사지 삼충석탑, 제89호 봉업사지 당간지주 등 문화재가 남아 있다, 봉업사지 인근에는 칠장사, 관음당의 장명사지. 미륵당의 매산리사지, 등이 남아 있어 죽산 지역의 불교 문화가 융성 했음을 알 수 있다,

봉업사가 사라진 봉업사터 에는, 그때의 영광을 그려볼 수 있는 보물 제435호봉업사지오층석탑이 남아 있다,

또한 봉업사는 고려태조 왕건의 초상화를 모셧던 절이라고 안내되여 있어나  글자가 오래되여 알아 볼 수 조차 없다,

봉업사터는 지금 발굴 조사가 진행중이였다, 봉업사 옆으로 해서 이어지는 길은 봉업사에서 직진으로 가면 죽전버스터미널 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인데 우회하도록 해 놓았다,

이 길도 옛길은 분명 아닌 것 같은데 무었을 보여 줄게 있어서 이렇게 돌리는지? 영남길은 이해가 안되는 구간이 종 종 있다,

그러다보니 농로를 따라 빙 돌아서 간다,

그래도 길을 만들어 놓았어니 지정되여 있는 길을 따라 가야한다,

그러다보니 죽산향교길과 주주로가 만나는 사거리까지 왔다, 죽산터미널은 이곳 사거리에서 왼쪽이다,

롯데리아 앞에서 장호원, 일죽IC방향으로 간다, 여기서 장호원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장호원은 경기도 와 충청도 경계마을이다, 그러면 경기옛길은 장호원 지역 어디에선가 끝이 날 것이다,

롯데리아 옆 건물 끝 넓은 공터 주차장이 있는 곳에

죽산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터미널은 편의점에서 매표 하고 관리하는 간이 터미널이다, 영남길 제8길은 여기 가 끝이다, 여기서 1329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20분 정도 걸려 남부터미널로 돌아가면 오늘의 일정이 끝이난다,

경기옛길 제8길 죽주산성길 시작지점인 황새울마을 입구에서 죽산터미널까지 13,7km에 4시간 30분정도가 결렸다, 여기서 시간은 걷는 시간이고 휴식시간은 별도니 실제 시간은 이 보다 더 많다고 보면된다,

남부터미널로 돌아와 사당동으로 이동해서 생태탕으로 저녁을 먹는다, 하루 종일 걷느라 고생했어니 반주도 한잔이다, 2023년 4월 9일 벌서 어둠이 내리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