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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경기옛길 경흥길 제5길 반월산성길 上(포천터미널~반월산성 동치성)2023, 05, 28,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경흥길

경기옛길 경흥길 제5길 반월산성길 上(포천터미널~반월산성 동치성)2023, 05, 28,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3. 6. 19. 00:00

청성산 정상에 자리한 반월산성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있다, 반월산성은 경흥대로와 수직으로 놓여있어 대로를 따라 이동하는 적의 경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반월산성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경흥(대)로를 장어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경흥로와 밀접한 과계가 있는 문화유적이다, 

특히 창성문화공원, 포천향교, 구읍리석불입상 등과 둘레길로 연결되여 살아 있는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 경기옛길 홈페이지 에서 옮김 -

2023년 5월 28일 07시 20분 동서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도착한 포천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직진으로 100여m 가서

오른쪽으로 꺽어들면 포천천 한내교가 있다,(한내교를 건너와서 포천시내 방향으로 찍은 것임)

한내교를 건너가면서 보는 포천천

한내교 건너 한내사거리에서도 직진

이어지는 길은 포천로다,

포천로로 직진을 하는길 건너편에는 만리장성 중식당과 소래포구 횟집도 있는게 보인다,

그리고 조금 높은 지대로 올라가면서 보이는 까막골 동치미 막국수 식당도 이른 시간인데도 영업을 하는 것 같다,

한내교에서 부터 서서히 높아지던 고개마루 모내기 간판이 있는 곳에서 건널목을 건너

청성역사문화공원으로 들어간다, 포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내교를 건너 이곳까지는 약 400여m정도의 거리다,

공원입구에서 직선으로 위령탑으로 가다보면

끝 지점 오른쪽에 경흥길 제5길 반월산성길 스템프함이 있다,

오늘도 이곳을 지나가는 기록이니 스템프를 찍었는데 반월산성이 새겨져 있다,

스텀프함 앞에는 소녀상도 있다, 소녀상은 대체로 옆에 보이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이곳 소녀상은 맨발로 어디로 인가 가는 듯한 모습이다,

이곳의 위치는 위령탑 앞 광장이다,

스템프함이 있는곳 오른쩍 주차장 방향

길로 이어지는 산성으로 가는길

포천시민대종 200m 반월성둘레길 650m 우리는 이길을 찾아 가야한다,

안내 표식을 따라 들어가서

야자 매트길로 언덕으로 올라가는데 경로 이탈 경고음이 울린다,

다시 안내표지가 있는 원점으로 돌아 와 현충탑옆 길로 들어가니

소원의 종탑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종을처서 파손이 우려 되는지? 종치는 줄을 잠궈 놓았다,

이곳에 경흥길 이정표가 있다, 출발지인 포천시외터미널에서 1km, 신북면행정복지센터 까지는 9,4km 다,

그리고 경기옛길 이야기 판에는 포천에서 나고 자란 위대한 학자이자 항일 의병장 면암 최익현선생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한 선생은 유년기를 보내면서 성리학의 기본을 익혔어며 경기도 양평으로 이주한 뒤에는 애국과 호국 정신을 기리며 훈산 위정척사의 근간을 마련하신 분이다, 위정척사는 조선후기 외국세력과 문물이 침투하자 유교 전통을 지킬 것을 주장하며 일어난 사회적 운동이다,

일제의 만행으로 국권상실 후 1912년에 만주로 넘어가서 광복단에 활동한 최익현 선생은 이후 국내 독립운동과의 연계를 위해 조직 연락망을 담당하기 의해 다시 조선으로 밀입국 했다, 그렇게 조선과 만주를 오가면서 활약하던 중 일본 경찰에 잡혔다,

최익현 선생은 전 재산을 털어 무기를 구입했고 여러 곳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때의 심한 고문때문에 반신불수가 되였고 고문의 휴유증으로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1년에 지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면암 최익현 선생을 기억하며 지금의 우리를 있게한 선조들의 아픈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라는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흥길 반월산성길, 언덕길을 올라서

이렇게 평평한 지대로 올라간다, 이 곳에

반월각이 있다, 반월각(시민대종 종각)종각에서는 포천시내 전망과 왕방산이 포천의 진산처럼 버티고 있고 남북으로 흐르는

포천천을 따라 길쭉한 분지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는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처 진다는 장소지만 오늘은 비가 내리는 날이라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포천탄생 600년 기념탑은 무궁무진 포천의 힘찬 기상을 표현하기 위해 높이 10m에 이르는 2개의 원뿔형 모양으로 포천에서 생산되는 돌로 만들어졌으며 중앙의 조형물에는 14개 읍면동을 시화(市花)인 구절초 꽃잎에 새겨 넣어 하나의 포천임을 표현한 탑이다,

포천탄생 600주년 기념탑 타임캡슐 안에는 포천시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발전상을 돌아 볼 수 있는 역사자료 정책자료 발전계획 포천 프라이드 600선 등 총 113개의 자료와 책자를 넣어 봉인해 100년 후인 2113년에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격변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은 산성 포천 반월성 

포천청성산 정상부를 둘러가며 쌓은 산성인 반월성지는 1080m로 포천시 주변지역에 있는 성곽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크다, 산성은 고대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 까지 전란이 일어났을 때 중요한 역활을 했던 장소로 

반월성지는 고대시대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한강 지역을 차지할 당시에 완공되였다고 전해지는데 지금까지는 일종의 전설로 여겻다, 그러나 여기서 발견한 홀수해공구단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여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마홀군이 포천이였음이 확인되였다, 

이 처름 유서깊은 산성이지만 고려시대에는 폐성되여 한동안 잊혀졋지만 조선 광해군 시절 후금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대시대 성곽터 위에 다시 돌을 쌓는 방식으로 산성을 완성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난 후 반월성지는 또 다시 버려졋다, 정치적 이유로 탁월한 곳에 세워진 군사적 요충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반월성지는 주변 일대를 파악하기 좋으면서 동시에 적들이 공격하기 어려운 장소였다, 제대로 완공했다면 아마 청나라 침공을 막는데도 큰 역활을 했을 수도 있었는데 군사적 요쇄가 역사적인 정쟁으로 인해 제 역활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라는 안내가 있다

반월성지 半月城址로 올라가고 있는 이 길은 천성산 둘레길이다, 

반월산성이 보인다, 반월산성은 해발 283.5m인 청성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평면 모습이 반달 모양인 이 성의 둘레는 1,080m로,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포천지역의 주성 역할을 하였다.

성안의 주요 시설은 문지 2곳, 치성 4곳, 장대지 및 망대지 2곳 그리고 건물지와 우물지 등이 조사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북진 때 이 성이 이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마홀수배공구단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성안에서 발견되어 고구려 때 포천의 지명이 마홀임을 알 수 있다.

전략적으로 요충지대인 이곳을 통일신라시대 때 궁예의 세력이 이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이후 광해군 20년(1618년) 영평에 감영을 두고 이 성을 수축하였으며, 주군을 설치하여 인조 원년(1623년)에 혁파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까지 이용된 산성이다,

이 성은 지리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성곽이 지닌 여러 특징에서 한국 산성의 기능과 성격은 물론 고대사를 규명·복원하는 데 중요하다.

그리 먼거리는 아니지만 빗속에 성곽을 따라 걷는 운치를 느끼며 걷는길

성곽둘레길에서 성내로 들어 가는 입구가 있다,

산성내로 들어가는 작은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보이는 성내진입길, 여태까지 일반적으로 보이던 성내로 들어가는 성곽길과는 다른 생소한 길이다, 작아서 더 앙증맞고 멋스러운 길이다,

성내로 들어가서 보이는 모습은 마치 평평한 구릉지 같다, 더욱이 성의 기본일 것만 같았던 여장도 안보인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보이는 돌 몇개가 있는 평평한 땅은 토광지? 라는 안내가 있다, 토광이란? 쌓을저貯, 감출장藏, 구멍공孔, 저장혈 貯藏穴, 구덩유구, 소형유구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어나 대체적으로 저장시설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데 바월 성에는 총 27기가 확인 되였는데 헬기잘 주변 8개, 동치성 주변 4기, 동문지 안쪽 대형기와 건물지 내부에서 12기, 동문지 남쪽 내벽 근처에서 3기가 확인되었다,

형태는 장방형, 원형, 타원형, 장타원형, 부정형 등이며 상면 크기는 8~229cm, 하면 크기는 45~302cm, 단면형태는 원통형, 주머니형, 화분형, 복 주머니형 등이다, 유물로는 각선문 기와, 완, 고배류, 장동호편, 연질기와, 목탄, 철제 밀낫, 장란형 토기편, 삼발형 토기편, 백제 토기푠 등이 수습되였다,

토광지를 지나 성벽 위로 나 있는 길로 동치성 방향으로 간다, 반월성 내 경흥길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어지는 반월 성내 길은 보이는 것 처름 여유롭기만 한 길이다,

반월성은 여장이 없기 때문에 성곽 위에 다시 토성을 쌓은 듯 한 그런 성이다,

성곽과 성곽 위에 올려진 토성, 안쪽으로

작은 쉼터가 있는데 이곳에는 반월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욱 이어져 있다,

반월성은 방어시설의 거점으로 지리적으로 경흥로의 육로를 통해 남북이 이어지고 영평천, 한탄강, 임진강, 등 수로를 통해 동서가 연결되였다, 때문에 경기북부지역을 방어하는 산성들은 철원에서 포천으로 통하는 남북교통로(경흥로)를 방어 축으로 삼아 남북 방향으로 축조되였다,

 

신라는 고구려지역까지 영토를 확방하기 위해 629년 반월성(낭비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낭비성 전투에서 승리하며 김유신이 신라최고의 장군으로 명승을 날렷어며 승전의 기세를 바탕으로 고구려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되였어며 신라는 한강 이북에서 반월성을 최대 군사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동문지, 동치성, 등을 설치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대동강일대를 점령하며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경기북부지역에서 당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통일신라는 반월성의 장대지와 동문지일대를 보수하며 중요 군사거점으로 활용했다, 특히 8세기 중엽 발해와 국경을 접하며 대치하던 시기 반월성에 8동 정도의 건물을 짓고 군사 및 행정 거점으로 이용했다,

포천 반월성 시대별 활용은?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4세기후반부터 석성을 쌓어며 군사시설을 정비했다, 포천반월성도 4세기말~5세기 초 백제관련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동북방까지 영토를 확장하고자 북방 교통의 요지였던 포천지역에 산성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시대는 1995년 반월성 발굴조사시 포천지역의 고구려 지명인 마홀 馬忽 명문 기와가 출토되여 고구려가 반월성을 점령한 것을 증명해 준다, 당시 반월성 관할 범위는 포천지역을 미롯해 양주지역까지 경기북부 지역을 총괄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강일대를 점령한 신라와 완충지대 역활을 했다,

 

반월성에는 한강유역 고구려산성 건물지와 동일한 구들시설이 발견되고 6세기말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신라진흥왕의 북방진출을 견제 하기 위해 활용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북방진출을 위해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견제 했다, 신라의 한강 이북 군사거점인 북한산성이 고구려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여 있었기 때문에 경기북부지역 중 한강과 육로로 직접 연결되는 포천지역을 받드시 확보하고자 했다, 7세기초 신라 진평왕은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확대하기 위해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고자 629년(진평왕 51년) 8월 경기북부지역 중 고구려의 최대 전략적 요충지이며 최남단 방어기지인 낭비성 공격을 명했다, 

이에 따라 당대 최고의 장군인 김용춘(태종무열왕의 아버지) 김서현(김유신의 아버지)등 5명의 장수와 당시까지 소규모 부대를 일끌었던 김유신등이 참전했다, 전투초기에는 고구려군의 기백에 눌려 신라군에게 전세가 불리 했지만 김유신이 충정을 맹세하고 고구려군 진영을 휩쓸고 다니며 승기를 잡아 5천명의 목을 베고 1천명을 사로잡는 큰 전과를 올렸다, 당시 고구려군의 규모를 약7~8천명으로 추정하는데 병력의 80%정도의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김유신은 낭비성 전투에 장군이 아닌 중당당주(군관)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어며 이를 기반으로 장군의 지리에 올라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활을 했다,

고구려의 낭비성인 포천 반월성은 남북으로 이루어진 산맥사이로 평탄한 지형이 형성된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관북지방(함경도)과 서울을 연결하는 경흥로(관북로)의 교통 요충지에 축조되였다, 특히 양주지역의 중량천을 따라 한강과 연결되어 한강 이북 지역을 점령하기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 시설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한강 진출과 남진 정책을 위해 반월성을 거점으로 활용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북진을 방어하기 위해 낭비성을 운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낭비성 ㅟ치에 대해 청주지역, 파주 칠중성, 포천 반월성 등이 대표적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서 7세기초 신라의 영역이 한강과 임진강 하류 유역을 점령 했지만 포천지역은 당시까지 고구려 영토에 속하고 있었어며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포천지역 지명인 마홀 명문기와 를 비롯해 6세기말 말 전후의 고구려 유물이 출토 되고 고구려의 낭비성을 포천 반월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월성내 장대지는 북측의 가장 높은 지역 해발 282m에 위치한다, 반월성은 전체적으로 지형이 北高南低. 서고동저 西高東低의 형상을 하고 있고 북벽은 청성산 정상부 북쪽에 발달된 능선의 외부 급경사를 이용하여 축조 되었기 때문에 장대지가 있는 이곳은 남쪽의 성 내부 뿐만이 아니라 서, 북, 동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장대지에는 남북 13,4m 동서 30,1m의 장방형 대지가 형성되어 있어며, 장대지의 남북 방향으로 교통호가 개설 되어 있다,

장대지는 적심이나 초석의 흔적이 없고 하부의 단단한 암반이 정리된 흔적으로 보아 이곳의 건물은 암반층을 이용하여 건물을 지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장대지 서쪽의 교통호 단면을 정리하던 중 남단의 기와 무더기에서 마홀수해공단 이라고 쓴 기와가 수습되어 고구려의 마홀군 馬忽郡 치소가 당시의 반월성이 었음을 확인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장대지 전체가 6,25직 후 평탄화 작업에 의해 파괴 되었고 암반의 상면이 조사전에도 지표상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모든 유구는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는 애기당지(제사시설)자, 반월성이 위치한 청성산은 포천시의 진산으로 옛날부터 신성시 되었다, 때문에 많은 제사및 무속행사가 이루어 졋어며 제사 유구로는 지역주민들이 애기당 이라 부르는 당집이 있었다, 반월성은 조선 광해군 대에 후금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을 수축하였어나, 이후 성의 기능을 잃고 포천의 치소와 종교적인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애기당지는 지역수호신인 당금아기를 모신 사당으로 지금으로 부터 40~50년 전에 불타 없어 졋거나 625때 소실되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도 있다,

애기당지에 대한 조사는 반월성 4차발굴조사 때 처음으로 이루어젹어며 쌓였던 륵을 정리 하자 상면에서 시멘트로 덧대여 보강한 건물의 기단 시설이 확인되었다, 애기당을 건립했던 기단 내에는 2단으로 구축된 높이 0,6m의 석단이 있는데 애기당의 하부 구조로 추정 된다, 석단의 북쪽면에는 2단의 계단 시설이 확인 되엇어며 석단을 노출 하면서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물결무늬의 평기와 와 후대에 제작된 시멘트 암막새가 수습되었다,

애기당은 높이 1단의 동서 4,3m, 남북 3,9m 규모의 기단위에 북서 15도의 주향을 지닌 정방형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2단의 기단만 복원한 상태다,

애기당을 지나 산성 성곽을 따라 가는길

이곳에도 성곽 외부에서 성내로 들어오는 문이 있다, 여기는 성내로 들어온 문과는 3배 정도로 큰 문이다, 성내 진출입 문은 대문(소문)이거나 암문 등이 성곽의 일반적인 출입문인데 삼국시대에 쌓아진 고대 성이라 그런 형태의 출입문도 없고 성곽 위에 쌓아올린 여장도 없는게 특이하다,

또한 이곳에는 반월성 내 건물이 있던 장소다, 반월성내 에서는 지표조사 때 모두 6개 지역에서 건물지가 조사 되었는데 이중, 1차~6차 발굴 조사때 대부분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건물지는 서 치성과 헬기장 부근으과 동 치성 부근에 주로 집중되어 있어며 대체로 여러 시기에 걸처서 조성된 것으로 중복이 심한 편이다, 특히 상층부는 파괴가 심하여 원형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이곳은 동문지 지역 건물지다,

수혈주거지 

수혈주거지는 모두 백제시대 조성된 군사용 막사로 추정된다, 헬기장 주변과 동치성 서쪽 남벽 주변에 6개동, 동문지 주변( 현재의 위치) 주거지 1동 기와건물지 초석, 등등의 안내가 있다,

위에 옮긴 이야기들은 모두 산성내 안내판을 기준으로 작성 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