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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경기옛길 경흥길 제5길 반월산성길下(반월산성 동치성~신북면행정복지센터)2023, 05, 28,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경흥길

경기옛길 경흥길 제5길 반월산성길下(반월산성 동치성~신북면행정복지센터)2023, 05, 28,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3. 6. 21. 00:21

동치성 부근 건물지를 내려가 동치성 남벽으로 내려간다,

남벽은 일부만 보수가 되었어며 아직 많은 구간은 보수가 되지 않은 곳이다,

반월산성 안내도가 있었는데 큼지막하게 확대해서 붙였다, 抱天 半月城 반월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1998년에 사적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청정산(해발 283m)에 위치하고 있어며 성의 형태가 마치 반달과 같아 반월성이라고 불린다, 성의 둘레는 1080m이고 면적은 116,305m2로 산 정상을 둘러 쌓은 퇴메식(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 주위에 머리띠를 두른것 처름 성을 축조한 방식)산성이다,

반월성은 포천을 관통하는 경흥로(현 43번 국도로 서울과 함경도(강원도)를 연결하는 최단 노선)와 수직으로 놓여 있어 대러를 따라 이동하는 적의 경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지리적 장점을 가지고 있는 요충지로 백제가 한강지역을 점령하고 북진했을 시기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지역을 점령했을 시기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라는 629년에 고구려의 낭비성인 반월성을 차지하면서 한강 이북지역의 영토를 확장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반월성은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조선시대 문헌에 1618년(광해군 10)에 판관 이성구가 개축하여 1623년까지 시용하였어며 둘레가 1930척이고 성안에는 두세곳의 우물및 장령, 삼대, 기우제단, 성황사 등이 있었다, 고 기록 되여 있어며, 문헌과 발국조사 결과를 토대로 볼때 삼국시대에 주로 이용되었고 이후 폐성 되였다가 조선 중기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개축하였고 포천지역을 수호하는 중심 산성으로서 기능하였다, 현재 산성에는 발굴 조사를 통해 치성과 문지, 건물지, 우물지, 토광, 제단 등의시설리 발견되었어며 옛 성벽의 2/3정도 복원을 완료했다,

이제는 반월성에서 나가야 한다, 우리가 내려온 동문(동치성)은 이곳에서 380m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며 내려온길 직진으로 남문(서치성)으로도 갈 수도 있다, 이 구간은 아직 성곽 복원이 안되여 있다, 여기서 경흥길로 이어지는 길은 군내면사무소 방향이다, - 안내문을 그대로 붙이면 되는데 궂이 써서 올린 이유?는 옮겨 적어면서 역사공부도 할겸, 폰으로 볼때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도 있다, - 

동치성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갈림길에 큰 고목이 있다,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다,

반월산성을 나가서 내려 가는 길은 임도다

산성 복원시 유용하게 이용했을 것 같은 임도,

내려가는 길은 자동차는 다닐 수 있는 도로지만 조금 경사도는 있다,

경사가 가파라도 내려가는 길이니

서서히 내려간다,

오늘이 5월 28일이니 5월말경인데 아직은 연록의 빛이 싱그럽기만 하다,

군내면사무소 방향으로 내려가다보니 가는길 왼쪽에 옆 개울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이 있다,

계단 맞은편에 있는 이정표는 구읍리 석불입상과 포천 향교로 가는길이라는 안내가 있다,

향교로 가는 길이라면 이 길이 옛길이다, 경흥길 시그널도 붙어 있다,

계단으로 내려가 계곡 다리를 건너서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간다,

이길에는 촘촘히 설치되여 있는 이정표가 길을 안내해 준다,

어늘은 새벽에 집 나설때부터 여태까지 한 시도 그치지 않고 비가 내린다,

우의도 입고 우산도 받처 들었지만 온통 물에 빠진듯이 젓었다,

우의를 입었더니 땀으로 몸이 젓고 신발은 바지에 묻은 빗방울과 풀 덤불의 물기로 흠뻑 젓었어니 

그랗다고 우의를 벗어던지고 우산도 안 받칠 수가 없어니;

이렇게 하루종일 쉴사이 없이 내리는 비를 온 몸으로 맞어며 걸을 수 있다는게 이 마저도 좋은 추억이 될 것만 같다,

숲 사이로 포천향교가 보인다, 1173년(명종 3)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어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594년 중건하였으며,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가 1962년 이 지역 유림에 의해 중수되었다.

포천향교의 현존 건물은 5칸의 대성전, 6칸의 명륜당, 내삼문(內三門)과 외삼문(外三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건축형태는 강학공간이 외삼문 안에, 제향공간이 내삼문 안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포천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어 있고, 현재 향교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향교는 지근거리에 있지만 향교로 내려가 보아도 문이 잠겨있을테니 들어가 볼수 도 없다, 그래서 포천향교는 통과다,<

포천향교 뒤 작은계곡을 지나가면

바로 오른쪽에 불상이 보인다, 구읍리 석불입상이다, 이 불상은 포천지역의 불상 중 가장 시대가 오래된 것으로 고려 전기 블교 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50cm, 길이 5m의 석축을 쌓고 불단을 만들어 석불을 모셔놓았는데, 주변에 기왓장과 도기편들이 산재한 것으로 보아 불상을 봉안했던 당우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석불입상은 화강암 1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소발의 두정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상호는 원만하나 마손이 심한 편이다.

양미안, 비량, 구순, 턱 등도 부분적으로 마멸되어 있으나 그 원형은 알아볼 수 있다. 양쪽 귀는 길게 흘렀고 목에도 삼도를 두를 흔적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으며, 양어깨는 당당하여 자비스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어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의문이 뚜렷하게 흘러내렸으며 수인은 왼손은 허리 앞에서 상장하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외장하였다.

현재 허리 부분 이하의 부분은 매몰되어 있으므로 하부의 의문 처리와 양각 부분은 잘 알 수 없다.노출된 현 상태의 실측치는 높이 192cm, 어께폭 77cm, 동체 두께 30cm이다.

이어지는 길은 계속해서 계단으로 올라가서

이어지는데 계단으로 올라가면서는 이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 방울이

내리는 빗 방울처름 떨어진다,

그래도 길은 참 아름답다, 경흥길이 아니였어면 어떻게 이곳으로 와 보았을까?

경흥길을 마지막으로 경기옛길은 모두 끝이 나지만

경기옛길 6대로를 따라 걸어면서 오늘처름 새로운 것도 많이 보고 

우리 이웃들이 함께 동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울림이 아니였나 싶다,

포천향교를 지나 산길을 따라 가지만 사실 이곳이 어디인지? 알 지는 못한다,

이렇게 경흥길 이정표나 시그널이 알려 주는대로 따라서 갈 뿐

이제는 산길을 지나 평지로 내려 왔다, 오늘은 산길이 더 좋은게 이유가 있다, 

산길에서는 바지는 젓지 않지만 이런 들길은 풀자락을 스치기만 해도 물이 줄줄 스며들어서 신발 속으로 흘러 내린다,

이런 길만 있어도 괞찮을 것 같은데

이제는 마을이다, 사실 정확히 이 마을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도상으로 확인을 해 보면 군내면 하성북리 쯤인가 보다,

집은 뜸하지만 마을길을 따라

걷고 

또 걷다보니 반월산성로로 나왔다, 그리고 라라워시 간판이 붙어있는 건물도 보인다,

라라워시 건물을 보면서 오른쪽으로 가면 주차장도 있는 곳을 지나

골말교를 건너서는 왼쪽으로 보이는  

울타리 옆 골목길로 이어진다,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 이곳에도 농가주택들이 있는데 지도상으로는 하성북리 지만 마을 이름까지는 알 수 없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빗 속이라 어디 잠시 앉아 쉬여 갈 곳도 없다, 전국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있는 마을 정자 하나 없는 곳이라서 

옆으로 흐르는 개천을 보니 물도 점점 더 불어난다, 이제는 이 개천 뚝길로 계속 가야한다,

포천 금강지하수 간판도 보인다, 

금강지하수 앞 도로는 호국로다, 개천이 있고 도로가 있어면 여기는 다리가 있다, 호국로 포천3교 아래서 비를 피해 잠시 자리를 깔았다, 신발을 벗고 앉았는데 바지에서 물이 줄줄 흐른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흠벅 젓었다,

온 몸에서 물이 뚝둑 떨어지지만 비를 맞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느긋하게 앉아서 간식을 하고

다리 위로 올라와서 호국로 갓길을 따라 30여m 정도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구리 포천 29번 고속도로 종점인 신북IC 2교 아래를 지나 왼쪽으로<

고속도로 옆 길로 올라간다,

비가 오는 날이니 오늘 경흥길 제5길을 걷는 내내 한 사람도 볼 수 없었지만

여기도 마찮가지다,

이길이 어디로 이어지는 지는 끝까지 가 보아야 알겠지만 도로인데도 지나가는 차도 없다,

그러다가 이길의 끝 고산아파트와 신아포미재아파트가 보이는 곳 43번 호국로 옆 화물차들이 줄지어 주차를 하고 있다,

이길 끝에는 포천일보 사옥이 있고 아파트로 들어가는 전용도로도 보인다,

43번 국도 호국로 인도로 구신북대교앞 교차로 로 올라간다,

그리고 K마트와 포천흑돼지 농장직영 까망깨돈 음식점도 있는 곳

구신북대교앞 교차로를 건너간다,

교차로 건너서는 다시 오른쪽으로

20여m를 가다가 왼쪽 개천 뚝으로 간다,

이어서 바로 작은 개천은 포천천으로 합수되고

경흥길은 계속해서 포천천 뚝길을 따라 이어진다,

이렇게 포천천 변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넓은 지대의 농토도 있다,

그리고 포천천을 건너가는 신북대교도 보인다,

포천천 뚝길에서 신북대교 삼거리로 올라와 건너편으로 가야 한다, 

현대자동차 정비센터 앞 도로변에는 이렇게 꽃밭을 만들어 놓고 갓길은 있어도 인도는 없다,

여기서 이어지는 길은 꽃밭 끝에서 U턴을 해서 포천현대자동차 서비스 센터 옆으로 해서 다시 포천천변 뚝길로 가야한다,

또 포촌촌 뚝길로 가 보아야 비가 내리는 날이라 아무 것도 보일게 없을 것 같다, 인도가 없어니 43번 국도가 위험해서 편의상 길을 돌려놓기는 했겠지만 이번에는 도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가는길 건너편 설담재, 설렁탕, 곰탕, 갈비탕, 육개장 전문 음식점에는 벌서 조명을 켯다,

조금 더 올라가니 이번에는 시골식당, 육해정, 등의 대형 시당들이 즐비한 마을이다,

우리가 올라가는 길에는 없는 음식점들이 왜 건너편에만 있는 것 일까?

인도는 없지만 상가가 있는 곳은 걸어갈 수 있는 공간은 넉넉하다,

작은 개천 다리를 건너 가면서는 걸어갈 수 있는 길도 있고

그러다가 보니 신북파출소가 보인다,

신북파출소 앞 버스정류장이 있고 버스 정류장 뒤는 신북면행정복지센터다,

여기는 걍흥길 제5길 종점이다, 여기서 부터는 경흥길 제6길 만세교길 출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