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경기옛길 경흥길 제7길 영평팔경길中(포천야구장~오가사거리)2023, 06, 11, 본문
영평천이 굽이처 돌아가는 멋스러운 숲 속에 금수정이 보이는 곳
영평교에서 2,4km 안동김씨 고택 620m 거리인 이곳은 금수정 맞은편 포천야구장이다,
포천야구장 앞 창옥교(2개의 다리 중 앞에있는 작은다리, 뒤는 오가천교다,)를 건너서
520m거리에 있는 안동 김씨 고택으로 간다,
창옥교를 건너 왼쪽 오가천 하천 뚝을 따라간다,
안동 김씨 고택으로 가는 길은 오가천 뚝길과 농지 가운데 길, 두곳이다,
뚝길 끝,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뚝을따라 가면서 보이는 금수정 앞 영평천
그리고 왼쪽의 영평천 뚝길과 영평천도 돌아 보면서
계단으로 올라간다, 보이는 계단마저 잘 어울리는 듯한 그런 곳이다,
계단을 올라가니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묘지가 있다, 이 묘들이 일반적인 묘들과는 달라 보인다, 나중에 알았지만 안동 김씨 종택의 묘였다,
묘 옆으로는 안동김씨 고택이 있다,
이곳은 포천야구장에서는 560m 거리고 안동김씨 고택은 60m 다,
안동김씨 고택과 금수정이 있는 여기는 포천야구장에서 평지길 620m를 걸어서 올 수도 있지만 타이어 자국을 보니 차로도 올수 있는 곳인듯 하다,
안동김씨 고택 앞에서 영평천 방향으로 30여m에 金水亭 금수정이 있다, 경기도 포천시는 내(川)를 안고(抱) 있는 도시다. 들어오는 물은 없고 나가는 물만 있는, 물을 품고 있다가 내주는 지역이다. 물을 품고 있는 곳은 국사봉과 자등현, 광덕현이다. 국사봉은 산내천에 자등현과 광덕현은 영평천에 품었던 물을 내준다, 산채천과 영평천은 합류해 연천군 신답리 아우라지 나루터에서 한탄강으로 흘러들기까지 풍성한 수량으로 절경을 빚어냈다.
산내천과 영평천이 빚어낸 수려한 경관에 영평8경이 있다. 영평8경은 백로주, 선유담, 와룡암, 창옥병, 청학동, 금수정, 낙귀정지, 화적연 등이다. 그중에서도 금수정은 우거진 숲, 맑은 물, 기암괴석, 병풍같이 우뚝한 절벽을 찾아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1716~1787) 같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곤 했다.
특히 선조 때 영의정을 14년이나 지낸 박순은 은퇴 후 아예 영평8경의 하나인 창옥병 절벽위에 집을 짓고 살다가 생을 마쳤다. 그의 행장에는 선조 19년(1586]) 가을, 휴가를 받아 영평의 초정에 목욕하러 갔다. 이때 영평현의 백운계에 은거할 배견와 拜鵑窩와 이양정 二養亭을 짓고, 백운계, 청령담 淸?潭, 토운상 吐雲床, 창옥병 蒼玉屛, 산금대 散衿臺, 청학대 靑鶴臺, 백학대 白鶴臺 등의 명호를 제 題하였다 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영평8경 중 몇 개는 박순의 제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金水亭입구 왼쪽에 안동 김씨비석도 있다,
영평8경 중 2경인 金水亭 금수정 이다.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영평천, 강은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굽어져 내리다가 금수정 앞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려가 한탄강과 합류한다. 정자 아래는 전복을 엎어 놓은 듯한 하얀 바위들이 햇빛에 반사돼 눈부시다. 금수정은 본래 고려 말기 학자 척약재(?若齋) 김구용 金九容 (1338~1384)의 소요처다. 그의 호 척약재 는 백문보가 김구용의 서재에 써 준 척약재기 에서 땄다.
척약 은 걱정하고 두려워하다 라는 뜻이다. 백문보는 소년 급제한 김구용이 자만하지 말고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하라며 경계의 글을 써줬다. 그가 호를 척약재로 정하자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과 친분이 있는 이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한복) 열 눈이 보고 있고 열 손이 가리키네. 전전긍긍 자신을 지탱하며 처음처럼 끝까지 삼가시게
(이색) 범의 꼬리를 밟은 듯 살얼음을 건너듯이 정밀하게 살피시게
(정도전) 마음 혹여 놓으면 살타래처럼 엉키리니 반드시 일삼아서 종일토록 애쓰오
(정몽주) 저 물도 밤낮을 쉬지 않고 넘실 넘실 흐르는데 그대 마음 흔들리면 핼맥은 막히리,
라고 매사 조심하라는 뜻을 전했다.
그는 삼봉 정도전과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도전에게 보낸 몇편의 시가 보인다. 보주(예천의 옛이름)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만나지 못하자 시를 써서 정도전에게 보냈다.
평원에서 한 번 이별한 후 / 함께 회포를 나누지 못한 지 오래이네
떠돌다 보니 사람은 늙어 가는데 / 애쓰다 보니 한해가 바야흐로 다하네
화군에는 수 많은 산들이 둘러 있는데 / 구성에는 하나의 길이 통하네
양양은 이미 지났으니 / 어찌 마음 속이 부끄럽지 않은가 (안동에서 삼봉에게 답하다)
이 금수정 사진은 금수정 안내판에 있는 사진을 확대해서 붙였다,
금수정 앞 마당에는 이곳이 김구용이 소요하던 곳이며 한때 양사언의 정자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두 사람의 시비가 건립되여 있다, 양사언의 시비는 그 유명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사람이 오르지 않고 뫼만 높다 하더라" 시조가 새겨져 있다.
양사언의 시비 앞 경흥길 제7길 스템프함이 있다, 경흥길 제7길 영흥팔경길 금수정 스템프를 찍었다,
김구용은 고려 공민왕 때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한 뒤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직강에 올랐다.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등과 더불어 성리학을 일으키고 불교를 배척하는 척불숭유의 선봉에 섰다. 그는 원나라를 밀어내고 중국을 장악하기 시작한 명나라와 친교를 하자는 친명파였다.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일을 극구 반대하다가 6년 동안 유배살이를 하기도 했어며 1384년 명나라와 국교수립을 위한 행례사로 사신으로 가던 중 요동에서 백금 1백냥과 세모시, 마포 각 50필을 지참했다는 누명으로 체포 됐었다. 그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명으로 대리위로 유배되던 중 영녕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김구용의 시비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누명을 쓰고 유배를 떠날때 지은 범급(帆急)이라는 시다.
돛단배 빠르니 산이 달아나는 듯 / 배가 가니 강기슭 절로 옮기는구나.
지나는 고장 따라 그 풍습을 묻고 / 배 대고 머무는 곳에서는 시 지을 수밖에
오 나라 초 나라 강남 땅 천년 오래이고 / 여기 자연은 5월이 가장 좋은 때라 하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싫어 말게나 / 맑은 바람 밝은 달이 나를 따르고 있으니.
금수정의 본래 이름은 우두정 牛頭亭 이다. 김구용은 금수정이 있는 자리가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말하곤 했는데 아들 명리가 은퇴 후 아버지를 기려 이곳에 정자를 짓고 ‘우두정 牛頭亭 이라 이름했다. 세종때다. 우두정을 금수정으로 바꾼 이는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불리는 봉래 蓬萊 양사언 楊士彦(1517∼1584)이다. 양사언은 포천 안동 김씨의 외손이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정자가 양사언에게 넘어왔다고 한다.
정자의 주인이 된 양사언은 안동김씨의 김 金과 정자가 있는 창수면의 수 水를 따서 금수정이라 이름했다. 외가쪽에서 정자를 얻고 보니 마음이 짠했던 모양이다. 이 정자는 안동김씨의 정자다 라는 마음을 담았을 터
양사언은 정자 편액은 물론이고 정자 동북쪽 아래 절벽에 금수정 각자를 쓰고 금수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 가운데 바위에도 부도 라는 글씨를 새겼다. 정자 앞에 전복처럼 엎어져 있는 하얀 바위이다. 양사언이 썼던 편액은 6, 25 때 정자가 불타면서 없어지고 현재의 편액은 정자 아래 바위에 새겨진 각자를 본따 써 붙인 것이다.
금수정에는 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현재의 금수정 건물은 1989년 남아있는 기단과 초석, 관계 문헌을 통해 복원했다. 건물 구조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 형태다. 금수정의 빼어날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박순, 이덕형, 한석봉, 이서구,등 당대의 시인 묵객들이 찾아왔다.
우두정 물가 집에 자주 묵으니, / 풍토에 대해 보고 듣는 것 많아졌네
마을 사람들은 늘 범과 표범에 대한 걱정을 말하고, / 숟갈로 나무 허리를 깎아 흰 꿀을 거두고,
마을 밖에서는 메조를 찧는 절구소리 들리네 / 늙은이는 새로 와서 하는 일이 없으니,
책상 위에는 먼저 약재 캐는 책을 펼치네, / - 박순 의 "우두정에 의지하여 머물다" 라는 시다,
사암 박순 은 영의정을 14년간 지내다. 중앙정치무대의 피말리는 당쟁을 보고 정치를 그만두기로 했다. 천연사 라는 스님을 만나 영평에 정착한다. 그해가 1586년인데 양사언이 죽은 지 2년 되는 해다. 창옥병 절벽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우두정에 자주 들러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시를 짓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는 시에서 우두정 물가 집에 자주 묵는다고 했는데, 그집이 우두정 옆에 있는 포천 안동김씨 고가터 일 것이다.
금빛 물결과 은빛 모래 한결 같이 평평하고 / 골짜기 구름과 강가에 내리는 비에 백구가 더욱 선명하네
참 됨을 찾아 우연히 무릉도원 길을 찾아가니 / 고기배 보내지 마라 산촌마을에 가네 - 이덕형의 시 금수정
금수정 이야기는 경북일보 2017년 5월 26일자 [정자] 69. 포천 금수정 金水亭 김동완 여행작가 의 기사를 옮겨 적은 것이다, 금수정 앞 강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오솔길도 있다,
잠시 강으로 내려 가면 양사언이 금수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 가운데 부도라는 글씨를 새겼다는. 하얀 바위 가 있다, 지금도 부도 라는 음각 글자는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에도 수천 수만년동안 물에 깍이고 깍인 하얀색 바위들이 있다,
강에서 금수정으로 올라 와 건너다 보면 안동김씨 고가가 보인다,
안동김씨고가는 조선시대 포천지역에 거주했던 안동김씨의 고택으로 2004년 발굴조사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 등의 초석이 발견되었다. 고가에는 예부터 많은 선비들이 찾았던 곳으로 외부 손님들이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위에 붙인 금수정 시를 쓴 한음 이덕형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안동김씨 고택 앞으로 나와서 돌아 보는 금수정 일대
안동김씨 고택은 1번 문간채, 2번 사랑채, 3번 대문채, 4번 안채 등 4개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다,
포천 안동김씨 고가터 抱川 安東金氏 古家터 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다,
조선시대 포천 지역에 거주했던 안동김씨의 종택이 있던 곳이다. 원래의 종택이 언제 지어졌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건물은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후손들이 터를 정리하고 주변에 경작지를 조성하였다. 2004년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가 있던 곳에서 초석이 발견되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안채, 사랑채, 문간채, 행랑채 등 4개 건물을 복원하였다.(안내판 설명)
포천 안동 김씨 고가터 는 남서쪽으로는 영평천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으로는 완만한 구릉지가 있는 곳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건물터로, 조선시대 포천지역에 거주한 안동김씨의 고택이 있던 곳이다. 종가 건물은 한국 전쟁 중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후손들이 터를 대충 정리하고 그 위에 가옥과 기타 건물을 짓고 주변에 경작지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대문은 잠겨 있어니 담 넘어로 보이는 사랑채와 대문채와 안채도 보인다,
안동김씨 고택은 2004년 발굴 조사를 통해 고가 터에서 안채와 중문 및 광 솟을대문과 행랑채, 사랑채로 구성된 건물터를 발굴했다.
안동 김씨 고택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복원했다, 이 사진은 복원작업을 하기전 2007년 사진이다, 안채 터는 기단의 남쪽과 서쪽 일부와 초석만 남아있는 상태여서 건물의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힘든 상태였다. 초석은 총 8기가 확인되었으며, 북쪽에 주로 남아있다.
중문과 광 터는 기단석과 초석이 잘 남아있으며 건물의 규모도 파악할 수 있다. 기단은 현재 북쪽과 남쪽에 1단, 서쪽에 2단이 남아있다. 총 9기의 초석이 확인되었으며, 초석이 없는 자리에서도 적심이 확인되었다.
뒤로 돌아가니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안채, 사랑채, 문간채 등을 옛 모습을 추정하여 새로 지어 현재에 이른다. 안동김씨 고가터는 그 연원을 명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남아있는 유구만으로도 한강 이북 지역에는 별로 존재하지 않던 조선 후기 양반가옥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에서 검색한 내용이다)
켜켜이 역사가 쌓인 금수정과 안동김씨 고택을 지나서 이어지는 길은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오가교차로 방향이다,
안동김씨 고택에서 도로까지 약 400m 정도의 거리를 나왔다,
이어서 오른쪽으로 오가교차로 로 올라간다, 여기서 오가교차로 까지는 약 300m거리다, 오가교차로로 올라가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포천 야구장 일대 와
더 오른쪽으로 낮은 언덕 숲이 안동 김씨 고택과 금수정이 있는 곳이다,
앞에 보이는 37번 국도(큰 도로)가 지나가는 곳
이곳이 오가교차로다, 여기는 영중농협 산지유통센터가 있는 곳이다,
농협 산지유통센터앞 오가삼거리 버스정류장으로 왔다, 오늘은 여기서 돌아간다, 버스시간을 검색을 해보니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버스가 온다는 정보다, 그러고 있는데 외국인 젊은이가 정류장으로 왔다, 외국인이지만 이 마을에 있는 사람이니 포천으로 가는 버스가 오는 곳이 맞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지금 곧 도착한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후 검색을 해도 정보가 뜨지 않았던 꼬마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헐 ~ 한국사람이 외국인에게 안내를 받아 버스를 탓다,
다음주에는 이곳 맞은편으로 들어와 이어서 가야한다, 맞은편 정류장은 오가사거리 버스정류장아다,
포천으로 돌아가는 곳 정류장 이름은 오가 삼거리인데, 맞은편은 오가사거리다, 같은 곳인데도 버스 정류장 이름은 다르다, 무었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중농협 앞에서 경흥길 제6-1길을 끝내고 제7길을 시작해서 8km를 왔다, 다음에는 이곳에서 약10km를 더 가야 제7길이 끝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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