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조계종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의 송광사 下 2023, 07, 30 본문
송광사 관음전 뒷편으로 승보박물관 옆으로 해서 임경당 쪽으로 이어서 내려가다가 왼쪽 임경당과 승보박물관 시이로 간다,
그리고 다시 종고루 앞으로 왔다, 종고루로 들어가서 대웅전 왼쪽으로 한바퀴 돌아온 셈이다,
종고루 옆 샘물이 나오는 것을 보니 여기도 사각으로 돌을 깍아 그릇을 만들어서 물이 빠지지 못하게 만든 샘물 그릇이 있다,
다시 종고루로 들어가면서 벽에 붙어놓은 송광사 안내도를 보니 이렇게 많은 전각을 보유하고 있는 송광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격어면서 폐사에 이르기도 했어며 1842년에.큰 화재가 일어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졋어나 또 다시 세웠어며.일제직전에는 항일의병을 돕는 근거지 역할을 했던 사찰이기에 일제에 의해 사찰 건물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후에도 여 순 사건과 625전쟁으로사찰의 중심 전각들이 불탔지만 계속해서 건물들을 복구하여 오늘에 이른다,
종고루를 지나 대웅전 마당으로 해서 승보전과 응향각 사이로
관음전 우측 옆으로 들어가면
하사당 담벽에 또 다른 샘이있다, 오늘 송광사를 대충 돌아보면서 만난 샘만 해도 3곳이나 되니 송광사가 이렇게 번창할 수 있었던 데에는 풍부한 샘물도 일부역활을 했나보다,
관음전 뒤에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있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이 있다, 보조국사는 송광사로 처음 들어올때 지팡이를 꽃아 자라게 한 고향수 이야기의 주인공인 보조국사 지눌(1158~1210)스님이 열반에 드신 후 모신 사리탑이 있는 곳이다,
이 서리탑은 1210년(희종 6)에 열반하신 지눌스님을 고려 희종이 佛日 普照國師(불일 보조국사)란 시호와 甘露塔(감로탑) 이라는 탑호를 내렸고 3년 후인 1213년(강종 2년)음력 4월 10일에 세웠다, 독특한 형태와 고려 고성의 부도 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부도탑 옆에는 부도탑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佛日 普照國師 비석도 세워 놓았다,
부도탑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전각은 관음전이고 왼쪽 옆에는 하사당이다,
송광사의 전체 면적, 전각의 수는 전국에서 손 꼽힐 정도로 크다. 다만 큰 절임에도 불구하고 송광사에는 탑이 없다, 또한 풍경과 석탑 석등이 없어 송광사에는 3가지가 없다는 말도있다,
풍경이 없는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석탑과 석등이 없는 이유는 송광사 터가 연화부수 형으로 무거운 석탑을 세우면 가라 앉는다는 의미 때문이라고 한다.
3가지는 없지만 3가지 명물도 있는데,비사리구시 라고 불리는 커다란나무 밥통과 능견난사라고 하는 음식을 담는 그릇들,과 쌍향수 라는 향나무등 >3가지다.
송광사는 한국의 3보 사찰로 꼽힌다,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사찰이기 때문이다. 또한 부산의범어사, 구례의 화엄사등과 함께 5대 사찰로 꼽히기도 한다.
송광사는 뛰어난 승려들을 많이 배출한 곳 답게 여러 고승들이 나왔다. 송광사의 松廣(송광)이란 이름에서 松(소나무 송)자를 파자하여 十八公으로 풀이, 고승 18명이 나오게 될 절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국사전, 약사전, 영산전을 비롯해 목조삼존불감, 고려고종제서, 대반열반경소, 수선사형지기, 금동요령,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묘법연화경찬술, 금강반야경소개현초 등 전국 사찰 가운데 가장 많은 문화재가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일일이 다 볼아볼 수도 없었지만 그 이름 마저도 생소하기만 하다,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 선사가 송광산에 길상사 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것이 시초이다. 고려 신종때 조계종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고치고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면서 발전했다.
또한 고려의 대선사이자 조계종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옮기려고 터를 잡는 중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리자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지자 그 뒷등을 솔개가 내려앉은 곳이라 하여 치락대라 불렀다고 전해오는데,
최남선 선생은 이 전설에 따라 송광을 솔개의 사투리인 솔갱이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고도 풀이했다. 다른 유래로는 예로부터 조계산에 소나무가 가득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이 이 산을 솔메라고 부른 것에서 '송광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산 이름을 따서 사찰 이름도 송광사라 불렀다는 것이 있다.
이후 산 이름이 조계산으로 바뀌면서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지금의 송광사로 바뀌었다. 지눌의 제자 혜심이 중창한 뒤부터 조선 초기까지 많은 국사를 배출하였는데 이 절에서 배출한 국사는 지눌을 비롯해 16명이나 되어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은 중요한 승보종찰이라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 성철스님 등이 해인사 위주로 중심이 이동하면서 약간 밀리게 되었다.
송광사에는 이들 16명의 국사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었지만 1995년에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던 3점을 제외하고 모조리 도난당했고, 안타깝게도 2018년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그나마 컬러사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토대로 다시 복원할 수는 있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랄까
종고루에서 천왕문을 나가고
천왕문과 이어져 있는 우화루를 지나서 송광사 본찰 을 나가면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으로 나가야 하는데
임경당 앞으로 흐르는 개천이 요란한 물소리를 내면서 작은 폭포를 형성해 떨어진다,
우화각과 아치형 삼청교, 그리고 임경당으로 흐르는 개천의 모습은
지금으로서도 선계를 이르는듯 하다
송광사는 전설처름 전해 오는 그릇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 온다, 지눌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그릇 세트는. 수공예품인데도 세트인 29개의 그릇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는 500개였다는데, 아무튼 이 그릇들을 포개어 놔도 딱 맞을 정도로 그 정교함이 대단하다고. 했다, 훗날 조선 숙종이 똑같은 그릇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는
능히 볼 수는 있어도 이치를 알기 어렵다, (보기에는 쉬워보이는데 만들기는 어려운)고 해서 "능견난사" 라고 했다는 그릇이다,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들어온길 전나무 숲도 지나서
조금만 더 내려 가면
또 하나의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은 화장실이다,
화장실을 지나서 개천을 건너가는 누각도 있는데
극락교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천정 양쪽에는 작은 용이 새겨진 보가 있는 다리다
다리를 건너 작은 공원을 나가면
송광사 매표소다,
2023년 7월 30일 오늘은 여기까지다,
송광사에서 숙소인 삼복권역 커뮤니티센터 까지는 약 30km의 가까운 가리다, 어제 저녁에도 매식을 했지만 하루 정도는 숙소에서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고기도 구워 함께 먹는 맛 또한 상상 이상이다,
불을 피우다 보니 점차 어듬이 빚게 내리는데
추억이란 이렇게 만들어 가야 하나보다
2023년 7월말 여름 여행은 이렇게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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