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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부여왕릉지 & 정림사지 2023, 08, 01 본문

국내 山行日記/문화유산투어

부여왕릉지 & 정림사지 2023, 08, 01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3. 9. 6. 00:42

삼복권역 커뮤니티센터에서 약 180km를 2시간 이상 달려서 부여 왕릉원으로 왔다, 부여왕릉원 주차장에는 숭목전이 있다,

숭목전은 백제시대의 종묘격인 백제왕들의 사당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충남 부여 능산리고분군에 있다, 숭목전에는 시조 온조왕을 비롯해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성왕부터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2018년 5월부터 총사업비 30억원을 투입해 지은 숭목전은 3029㎡ 부지에 제례 준비 공간인 전사청과 삼문, 담 등의 시설을 갖췄다.

숭목전 앞 주차장에서 부여 왕릉원 매표소로 간다,

부여 왕릉원 매표소에 문화유산 투어 여권 35페이지에 + 스템프를 찍었다,

안내도 도 보고

주변을 둘러보니 부여 왕릉 버스 정류장도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에 대한 안내도 있는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의 고도(古都) 중 한성백제 서울을 제외한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 지역의 백제시대 대표 유적지 8곳을 한데 묶은 것이다. 백제사 700년 중 후기 200년 도읍지인 공주와 부여, 그리고 사비시대 두 번째 수도였던 익산의 문화유산들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대한민국 중 서부에 있는 백제의 왕도(王都 = 왕궁이 있는 도시)와 밀접하게 연관된 유적으로 주변국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 후기(475~660)를 대포하는 유산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약 700년간 이어진 한국의 고대 왕국 중 하나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위 가치(OUV)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7월 8일 독일의 본에서 개최된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전 인류의 유산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하면서 백재역사유적지구를 통해 동아시아의 문명 형성에 이바지한 백제의 역활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음을 높이 평가했다,

부여군은 나성, 왕궁, 왕릉, 사원 4개 요소를 모두 등재했지만, 공주는 사원 터(대통사지), 익산은 왕릉(익산 쌍릉)이 빠졌다. 웅진백제의 국가사찰 대통사는 등재 당시 그 소재지가 명확하지 않았고, 익산의 쌍릉도 2010년 당시에는 무왕릉으로 볼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후 대통사지와 쌍릉까지 확장될 것이란 주장도 있다,

입구에 있는 매표소에서 메표를 하고 부여 왕릉원으로 들어간다,

입구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부여 왕릉원 안내도 와,

부여 왕릉 벽화도 있다,

부여왕릉원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백제 왕릉이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군은 중앙의 왕릉군 7기다,

이들 고분은 모두 왕과 왕족들의 문묘로 백제 후기 묘제를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석실분이다, 석실의 천장 구조는 초기에는 아치형에서 정갈한 육각형 또는 사각형 형태로 발전하였다,

특히 동하총의 4벽에는 사신도가, 천장에는 연꽃 무뇌와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는 벽화분으로 중요한 학습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분군은 3기씩 앞뒤 2열을 이루고, 또 북쪽 후방 50m 지점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구성되었다. 이 고분군은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전해오고 있다.

부여 왕릉원에서는 지금  3호분과 4호분은 발굴 조사 중이다,

사적 제14호. 고분군은 부여읍에서 동쪽으로 논산 가도를 따라 3㎞ 정도 거리에 있다. 북쪽에 동서로 가로 놓여 있는 해발 121m의 능산리 산의 남사면 산록에 위치해 있다.

왕릉원 고분군에서 내려간다

내려가는길 오른쪽 넓은 잔디 밭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부여왕릉원 아트뮤지엄과 능산리 사지, 그리고 나성이 있지만

오늘은 많이 더운날이라 다음 장소로 이동 하기위해 울창한 숲길을 따라 밖으로 나간다,

아랫쪽에서 왕릉원을 나가면서 올려다 보는 왕릉은 이런 모습이다,

왕릉원을 나와서 약3km정도 떨어져 있는 정림사지로 왔다,

정림사지 박물관 입구를 지나서

정림사지로 간다,

정림사지 정문 매표소에서

문화유산투어 여권 백제고도의길 + 부여정림사지 스템프도 찍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안내를 보니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 까지 약 700년간 존속한 한반도의 한 나라 라는 안내가 이곳에도 있다,

백제역사 유적지구는 백제의 도읍들과 연관된 백제후기(475~660)의 유산으로 웅진, 왕도, 관련 유적인 공산성고, 송산리 고분군, 사비도성, 관련 유적인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 나성, 사지시대의 복도 관련 유적인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 8개의 유적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은 사비시기(538~660) 백제왕궁 관련 유적으로 발굴 조사 결과 대형건물지 등 왕궁의 주요 시설물과 정교하게 판축된 토성이 확인 되었다, 부소산성은 비상시 대피시설로 사용되었다,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중앙에 위치하였던 절터로, 도심에 세워진 절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중 하나이다, 목탑의 한계를 극복한 높이 8,3m 의 석탑이 만아 있어며 발굴조사결과 금당지, 강당지, 승방지, 등이 확인되어 불, 법, 승의 불교의 3보물 모두 구비한 백제고유의 사찰 건축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 후기의 수도 였던 사비는 북, 서, 남,을 금강이 천연의 해자 역활을 하였고, 동쪽 부분만 인공적인 방어시설(나성)을 설치했다, 나성은 동 아시아에서 새롭게 출현한 도시 외곽성의 가장 이른 예 중 하나로 도시방어의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로서 역활을 하였다,

부여 왕릉원은 나성 밖에 위치하여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도시 한복판에 조성하였던 이전 시기의 왕릉군들과는 다른 입지여건을 보여 준다, 발굴조사 이전에 대부분 도굴되었어며 고군분의 서쪽 절터 에서는 567년에 제작된 석제 사리갑과 함께 금동대항로가 출토되었다,

백제역사 유적지구 중 한곳인 정림사지로 들어간다, 

정림사지 정문으로 들어가면 일직선 상에 정림사지 5층 석탑과 정림사지 석불좌상이 있는 전각이 있다,

정림사지는 사찰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공방시설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사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5층 석탑으로 들어가는길 좌우에는 연꽃 밭도 있고

중문지도 있다, 중문지는 석탑기단에서 남쪽으로 약 14m 거리에 있다, 초석을 받치던 적심석 8기가 동서 2열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추정 할 수 있다, 정면 길이는 11,3m 측면 너비는 5,3m이다, 고려시대 중문지의 기단은 바깥 부분을 깬돌로 쌓아 마감한 석축기단이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한 가운데 위치한 백제의 가장 중요한 사찰이다, 중문과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 상에 위치하며, 동서 회랑 및 건물지, 승방지 등이 확인 되었다,

중심 사역의 규모는 동서 약62m 남북 약 120m이다 발굴결과 민무늬토기를 포함한 청동기 시대 문화층, 정림사 창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심국시대(백제)문화층, 고려시대 문화층 등이 드러 났다, 정림사지 발굴 조사시 의 기록 사진도 있다,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한가운데 위치한 백제의 가장 중요한 사찰이다, 중문과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동서 회랑 및 건물지. 승방지 등이 확인 되었어며 중심 사역의 규모는 동서 약 62m 남북 약 120m 이다,

발굴 조사결과 민무늬 토기를 포함한 청동기 시대 문화층, 정림사 창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삼국시대(백제), 문화층, 고려시대 문화층 등이 드러났다, 사찰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공방 시설이 있었고 고려 시데에도 사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금당지다, 금당지는 부처를 모시던 전각이 있던 곳으로 삭탑 기단에서 북쪽으로 약 15m 거리에 있다,

고려 시대의 기단은 벡제시대의 기단을 재 활용 하였다, 금당지의 하층 기단에는 동쪽에 7곳, 서쪽에 4곳, 남쪽에 6곳, 북쪽에 7곳의 적심석이 남아 있었고, 기단 내부는 한 곳에서 적심석이 확인 되었다, 적심석 배치로 보아 금당은 툇간을 포함하여 정면 7칸, 측면 6칸의 건물로 추정되며 정면 18,7m, ↓ 측면 13,80m 크기이다,

이 건물은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보호 전각이다, 

강당지는 경전을 연구하고 교육하던 전각이 있던 곳으로 정면 39,1m, 측면 16,3m 의 긴 사각형 평면의 건물이다 고려시대의 강당지는 정면 31,8m 측면 17,3m로 벡제시데 보다 작아졌다, 백제 강당지으 ㅣ기단은 여러장의 기와를 비스듬히 맞대어 쌓아 만든 합장식 와전기단과 달리 평평하게 쌓은 평적식 와적기단으로 이루어 졌다, 현재 강당지에는 고려시대 삭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서편 건물지다, 서편 건물지는 강당지로 부터 약 1m 서쪽에 떨어져 있다,

강당지 동쪽에는 이 건물지와 대칭을 이루는 동편 건물지가 남아 있는데, 남북 39,3m 동서 12,1m 의 크기 였다, 조사 당시 백제나 고려시대의 퇴적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 엿지만 부분적으로 기와열이 확인 되었다, 서편 건물지의 현재 모습이다,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이다, 이 석불 좌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으로 화재로 인해 심하게 마모되어 형체만 남아 있고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좁은 어깨와 가슴에 올린 두 손의 표현으로 미루어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지나불상으로 짐작된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단정하고 균형감 있는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이 전각은 강당지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을 보호하는 전각으로 지어졋다,

동편 건물지는 강당지와 약 1,2m 북쪽에 있는 북승방지와 4m 정도 똘어져 있다, 건물의 남쪽 끝은 동회랑지와 연결되며 평면 규모는 정면(남북)39,3m 측면(동서) 12,1m로 가당지 규모와 비슷하다, 기단부는 기와를 평평하게 쌓아 올린 와적 기단으로 구축 되었다,

정림사지에 있는 백제의 5층석탑. 국보(1962.12.20 지정)로 높이 833㎝.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석탑의 구조는 기단 위에 탑신부가 있고 상륜부는 복 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다. 기단은 단층으로 얕으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개의 우주를 별석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2매의 면석을 끼웠는데, 우주는 목조건축의 기둥에서처럼 위는 좁고 아래는 넓게 표현되어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1층 탑신에 大唐平百濟國碑銘 이라고 새겨놓아 당시의 수난을 엿볼 수 있다. 2층의 옥신 높이가 현격히 줄어들었지만 3층부터는 체감률이 완만하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면서 끝이 약간 반전되어 있고, 층급받침은 2단으로 얕게 표현되어 있다. 이로 인해 정림사지 탑은 큰 규모의 석조물이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며, 마치 다층누각 형태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 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이다,

정림사지 조감도다, 

정림사지에서 옆에 있는 정림사지 박물관으로 간다,

날씨가 너무 더운 날이라 걷는 걸음마다 땀 방울이 뚝뚝 덜어질 정도다,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면서 에어컨 바람으로 느끼는 시원 함 이란

딴 세상으로 온 것 같은 느낌이다,

큰 창 밖으로 보이는 박물관 뜰 조형물도 보고

전시실로 들어 갔다,

어디를 가던 박물관은 그 시대 상을 가장 광범위 하게 알 수 있는 장소지만 

오늘은 사실 박물관 전시실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

더운 날 계속해 온 야외 활동의 대피 처가 박물관이니

박물관 전시물들을 둘러보기는 하지만

건성 건성 구경하는 수준으로 박물관 내로 피한을 온 셈이다,

여하튼 이렇게 돌아 보면서

잠시의 시간이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보낼 수 있었어니 여기서 멈추고 다시 다음 장소인 부소산성으로 가야한다, 빡빡한 일정 이기는 하지만 나름 이렇게 보내는 휴가도 좋은 추억만들기가 아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