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백제를 걷다, 부소산성 2023, 08, 01 본문
정림사지 박물관에서 잠시 더위를 식히고 부소산성으로 왔다, 부소산성은 부여읍 쌍북리에 소재한 사적 제5호. 삼국시대 백제의 都城(도성)이다.
둘레 2,200m, 면적 약 102만㎡.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부소산성 정문 매표소 앞 묽은색 함에 있는 문화유산투어 여권 34페이지에 스템프도 찍고
산성으로 들어온 곳을 돌아보면 이런 모습이다,
부소산문으로 들어간다, 여기는 표를 받는 사람은 없지만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야 한다,
이곳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부소산문을 들어가서 오른쪽 외곽 길로 들어간다,
이 길은 삼충사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다,
삼충사(三忠祠)는 백제시대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1984년 5월 충남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 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며. 흥수는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
부소산문에서 삼충사로 길을 잡은 이유는 부소산성을 모두 돌아 보려는 욕심때문 이기는 하지만 워낙 푹푹 찌는 날이라 가능 할려는지는 모르겠다,
삼충사 옆에는 작지만 연못도 있다,
그늘이라도 있어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바람 한점 없는 날이니 그늘이 있어나 없어나 덥기는 마찮가지다,
테뫼식산성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백제) 통일신라시대, 조선시대에 각각 건설한 성벽이 서로 겹치거나 관통하는 지점이다, 가장 아랫 부분은 견고하게 다져진 판축토성으로 이루어진 백제 성벽이고
기와나 토기 파편이 섞인 중간층은 통일신라시대 성벽이다, 가장 위쪽 성벽은 산 정상부를 둘러 쌓은 형식인 테뫼식 산성으로 고려 말에서 조산초기에 축성 되었다, 라고 안내하고 있다,
계속해서 파르지는 않지만 계속되는 오름길을 거의 다 올라 가면
첫번째 누각이 보이는데 이 누각은 영일루로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있어며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 보인다고 허며,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 영일루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영일루를 지나면 군창지가 있다, 군창지는 백제 때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부소산 동쪽에 있는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군창지는 1915년 땅 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건물터의 규모를 자세히 밝혀냈다. 백제 때부터 자리잡은 이곳 군창지를 조선시대에도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23년 8월 초 다시 또 군창지 발굴 조사를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산성을 따라 가는길
이렇게 잘 만들어진 길로도 갈 수있고 옆 능선을 따라 갈 수도 있다, 두 곳의 길은 서로 만나기도 하고 또 떨어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낙화암으로 가는 길이다,
부소산성 수혈건물지 자료관도 있지만 닫혀 있어니 무었을 전시했는지?는 알 수 없고
반월루로 왔다, 반월루는 부소산 서남쪽 언덕 위에 자라 잡은 누각이다,
이 곳에서는 부여읍 전경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수루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오래 전에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 있던 자리에 1972년에 半月樓 반월루를 세웠다,
반월루는 부소산성의 옛이름인 반월성에서 따온 이름으로 半月(반월)은 멀리 흐르는 백마강 모습이 마치 달과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반월루에서 내려다 보는 부여 시내 전경은
1400년이나 지난 먼 옛날 백제 왕도다,
반월루에서 내려가면 사거리다, 직진은 낙화암 방향이고 오른쪽은 궁녀사, 왼쪽은 산성입구로 내려가는 산성내 사거리다,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이 길로 들어가는 이유는 이길 중간쯤에 궁녀사가 있기 때문이다,
궁녀사로 내려가는 길은 백제왕자들의 산책로라 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길은 같은길 일테니 이 길을 걷는 사람도 왕자처름 다니면 왕자가 되는게 아닐까,
사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궁녀사 이정표가 있다, 이곳 지명과 설치물들은 고유명사다 그래서 영어로 표기한 것 모두 소리나는 대로 적혀있다,;
이 건물은 궁녀사 외삼문이다,
궁녀사는 낙화암에서 꽃처름 떨어진 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세운 사당이라 적혀있다,
궁녀사 외삼문으로 들어가면 전면 3칸의 작은 궁녀사가 있다,
문은 닫혀 있지만 내부에는 참배할수 있는 공간과 궁녀들의 모습을 그린 영정이 있을 것같다, 삼천궁녀를 추모하는 궁녀사이니 영정 속에서나마 꽃다웠든 그녀들의 혼이 지금도 살아 있는 것만 같아서 안타깝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다, 패망 백제는 이렇게 사당 속으로 저물어 갔나보다,
산성 여기저기에는 이렇게 큼지막한 이정표도 곳곳에 있다,
숲 그늘이지만 바람이 없어니 찌는 듯한 날씨인데도 무었때문에 부소산성으로 왔는지?
낙화암은 직진으로 가지만 오른쪽에 있는 부소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부소산 정상에는 泗疵樓(사자루)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送月臺(송월대)가 있던 자리다. 조선순종 24년(1824)에 세운 林川面(임천면)의 관아 정문이던 것을 1919년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로 옮겨짓고 이름을 皆山樓(개산루)에서 사자루로 바꾸었다
泗疵樓(사자루)는 부소산성 가장 높은곳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시대 누각으로 2층 문루 건물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건물 정면에 한말 義親王(의친왕) 李堈(이강)이 쓴 泗(水+此)疵樓(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쪽으로는 해강 金圭鎭(김규진)이 쓴 白馬長江(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 泗泚樓(사자루)라 이름했다.1984년 5월 충남 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된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누각이다
사자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鄭智遠(정지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金銅釋迦如來立像(금동석가여래입상, 보물196)이 발견되었다.
사자루에서 부소산성 북성벽 1지점이 있는 동쪽 아래로 내려간다, 1996년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데 포곡식 산성의 성벽 구조가 파아되었다는 곳으로 당시 성벽과 관련한 영정주공 과 판축(흙을 켜켜이 쌓아 다져 올림)이 매우 정교하게 구축된 양상이 확인 되었다는 알림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소산은 금남정맥의 끝자락이다, 금남정맥은 무주 주화산에서 북서로 뻗어 계롱산에 이르고 계룡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부소산까지 약 118km에 이르는 산 줄기의 옛 이름이라는 안내도 있다, 금남정맥은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다, 正脈 정맥길의 끝은 대개 바다가 되는데 금남정맥은 마지막 봉우리인 부소산(106m)조롱대에 이르러 강(백마강)에서 끝난다,
북 성벽 1성벽으로 내려가면서도 백마강도 보인다,
가파르게 잠시 내려가면 조망대 겸 쉼터도 만들어 놓았고
산책로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코스가 어디로 연결이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사자루에서 그리 먼곳이 아니라서 부소산성 장대지까지 내려왔다, 장대지란? 군사 지휘를 하던 장군의 지휘소가 있던 터로 일반적으로 동, 서, 남, 북, 방향을 앞에 붙인 장대가 있었던 터를 말한다,
부소산성 장대지는 발굴 조사만 하고 그대로 덥어 놓았다, 여기서 더 이상 진행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없어서 다시 내려온 길로 올라간다, 한참을 헉헉대면서 올라가니 더운날이라 물에 빠진 것 처름 땀이 줄줄 흐른다,
사자루로 다시 올라왔다,
일행들은 이미 낙화암에 가 있을테니 빠른 걸음으로 잠시가면 낙화암과 고란사로 가는 영 갈래길이 니온다,
오른쪽은 고란사와 백마강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고 직진은 낙화암이다, 오른쪽 아래쪽에 있는 고란사 바로 위쪽이 낙화암이다, 고란사 절 뒤 바위틈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자란다.
고란사 절 연혁은 백제 말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도 하며, 또 궁중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한다, 혹은 백제가 멸망할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삼거리 바로 앞 바위 위에 百花亭(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百濟古記(백제고기)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고 아래로는 강물이 흐르는데
백제의 모든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를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墮死巖(타사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후궁이 궁녀로 와전되었고 이후 궁녀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勇談(용담)이 많은 英主(영주)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聲勢(성세)를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望海亭(망해정)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歌舞酒宴(가무주연)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成忠(성충)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諫(간)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과 金庾信(김유신)등의 영주와 名臣(명신)이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階伯(계백)은 5천의 적은 군사로 黃山(황산)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 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王城(왕성)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孝(효)를 데리고 熊津城(웅진성)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죽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하여 大王浦(대왕포)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곳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백제 마지막의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낙화암은 백마강에서 50m정도 높이의 절벽이다, 이곳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진 궁인들을 꽃에 비유해서 이름 했다는 낙화암이다,
먼 옛날 이야기지만 백제말 의자왕이 3천궁녀를 거느리고 놀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역사 왜곡?이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지만,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뛰여들어 죽었다는 낙화암의 전설이 되여 전해오는게 아닐까?
역사야 어찌되었건 낙화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은 금강이다, 그러나 여기는 백마강이라 부른다, 왜? 일까? 扶餘邑(부여읍) 정동리 앞 虎岩(범바위)에서 부여읍 현북리 파진산 모퉁이까지 약 16㎞ 구간을 백마강이라 한다.
전북 장수군 神舞山(신무산 897m)에서 발원하는 금강은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熊津(웅진) 또는 금강이 되고 維鳩川(유구천)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古省津(고성진) 또는 백마강이 된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큰 포인트인 낙화암을 나와서 이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은 들어왔던 길로 나가다가 부소산성내 사거리에서 오른쪽이다,
내려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돌아가는 길이니 발 걸음도 가볍다,
잠시 내려가다보니 금당지 와 회랑지가 있다, 사지 중심에서 북쪽에 위치한 금당지는 이 중의 석조기단을 조성하고 각 사면에 각각 1개씩의 계단지가 있다, 금당지 규모는 동서 15,9m 남북 12m이다,
회랑지는 금당의 좌우에 있는 남북 방향의 동서 회랑과 중문에 연결되는 남회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남 회랑지의 길이는 6,5m~6,7m 정도된다, 서, 회랑지는 평평한 기와를 7~7 단 중첩하여 기단을 조성했다,
금당지와 회랑지를 지나 내려온 곳은 사비도성 박물관이 있는 부여객사가 있는 곳이다, 부여객사는 부소산성 아래 삼국시대 백제 왕궁터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중 하나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건물이자 공식적으로 지역을 방문한 중앙 관리나 외국 사신이 묵을 수 있는 숙소다 건물은 굴패를 모시는 정당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좌, 우익량을 두고 있다,
객사에서 보는 부소산성 주차장과 부여 읍내 전경
주차장으로 내려 가면서 목곽창고가 보인다, 목곽창고는 나무로 만든 창고로 식품을 보관하는 자정 시설로 사용도었던 창고라는 안내가 보인다,
창고에서 당시의 참외, 다래, 복숭아, 살구, 수세미, 오이 등의 씨앗이 발견 되어 왕국의 식자재를 저장하는 창고 였음을 알 수 있다,
부소산성 아래 관북리 유적지 일대를 마지막으로 부소산성 여행은 끝이다,
주차장에서 부소산성 일대를 돌아보니 큰 건물로 지어진 사비도성 박물관이 멋스럽게 보인다, 이런 일정은 하루 정도는 잡아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데 여기도 수박 겉할기 식이니 이번 여름은 너무 많은 곳을 보느라 길에서만 시간을 보낸 느낌이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 가야 하는 시간이다, 부여 한옥 찻집에서 달달한 음료수 한잔도 하고 출발을 한다, 집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200여km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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